제주도 '미루나무'에는 특별한 게 있다?

[제주도 여행 4] 제주도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가기

등록 2010.03.11 09:18수정 2010.03.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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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내가 여행하는 법은 이렇다. 슬렁슬렁, 대충대충, 여행객 같지 않게 지내기. 혼자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곤 서귀포 매일 시장을 어슬렁 거리거나 서귀포 시내를 '발길 닿는 대로' 걸어다니는 일이다. 그렇게 걸어다니다 보면 '여행자의 눈'이 아닌 '현지인의 눈'으로 많은 소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혼자 하는 여행이 늘상 '상큼 발랄'한 것은 아니다. 혼자 먹는 밥이 익숙하고, 사람들의 시선 따윈 개의치 않는 성격이지만, 제주도는 나름 관광지가 아닌가. 가끔 너무 먹고 싶은 음식인데 2인분 이상만 주문 가능해 못 먹는 경우가 생기는 거다. 정말이지 그때 나, 너무 서럽다.


정식이 맛있다고 추천 받아서 간 밥집. 들어서자마자 아줌마가 물었다. "혼자 오셨어요?" "네 혼자 왔습니다. 보면 몰라요?"라고 되묻고 싶지만 살짝 미소만 짓는다. 보통은 이렇게 나의 서러움(?)은 끝나고 마는데 이번은 달랐다. 정식은 2인분 이상만 주문이 된다는 거다. 그래서 '혼자 먹는 여행객을 위해 준비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비빔밥을 먹으라는데. 아흑, 옆에 한 상 가득 차려진 정식 음식들이 어찌나 탐이 나던지.

이중섭 거리의 카페 '미루나무' 딱 내 느낌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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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카페 '미루나무' 사장님이자 어린이책 작가인 이광희씨의 모습이다. 미루나무 카페의 전체적인 느낌은 바로 요 정도? ⓒ 이유하



그래서 결심했다. 나도 마음껏 2인분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도록 친구를 사귀자고. 목표 지점은 이중섭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갤러리 카페 '미루나무'다. 듣자하니 서귀포에 사는 예술인들이 다 모이는 재미난 곳이라고 했다.

포부도 당당하게 '미루나무'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오.. 은은한 조명 아래 예술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장님이 있었다. 내가 엉덩이를 들이밀 곳은 바로 여기야! 단번에 '필'이 왔다.


거기에다 지금 '미루나무'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초록 누룽지'라는 예명을 가진 작가는 (본명 공개를 거부하셨다, 쩝) 작년 9월 15일부터 서귀포의 그림 감옥에 기거하고 있어서 나랑 안면이 있었다. 나에게 거처를 제공해 주신 문화도시공동체 쿠키의 '예술+인+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초록 누룽지' 작가도 제주도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초록 누룽지'는 디자인 전공을 하다가 전업화가로 전향해 전국을 도보 여행을 하면서 드로잉 미술공부를 하고 있다. 제주도에는 겨울을 나기 위해서 들어왔다고. 심심할 때 '미루나무'에 와서 커피 한 잔 마시며 놀다가 알바까지 하게 되었단다. 한 번 보면 친한 거지 뭐 나는 또 무식하게 들이댔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그냥 (아, 소개할 말이 없다) 놀러온... 아이예요."

어린이책 작가 사장님에, 화가 알바생, 그리고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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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누룽지'작가는 전국 해안선 일주를 하면서 연필 드로잉만으로 그림 기초 공부를 하고 있다. 그의 그림 여행은 2013년까지로 예정되어 있다고. (http://blog.daum.net/ellust) ⓒ 이유하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니, 아! 이 푸근한 분위기. 카페를 구석구석 구경하고 있는데 입구에 어린이책이 놓여 있었다. 의아한 마음이 들어서 물어보니 '미루나무'의 사장님이 어린이책의 작가이기도 하단다. 어린이들이 읽는 역사책을 쓰는데 <박은봉 이광희 선생님의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두근두근 역사여행-조선>등이 대표작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쓴 책만해도 10권이 넘는다고.

듣다보니 이력도 재미있었다. 잡지<생각쟁이>의 기자 생활을 하다가 돌연 때려 치우고 전업 작가가 되기를 결심,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어학 연수를 하러 간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돌아와 서귀포에 카페를 연 것이 언 4년 째. 제주도에 정착한 이유도 단순했다. 일주도로 여행을 하던 중 "이곳에 살면 좋겠어"라는 아내의 한 마디에 제주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면서 빈둥대고 있자니 하나 둘 씩 손님들이 들어왔다. 올레길을 걷는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잘거리고 있는 나에게 동네 주민이 와서 맥주 한 잔 마시라며 권하고(아... 이 인심), 빵도 한 번 먹어보라고(아, 난 사랑받는 아이) 했다. 그렇게 눌러 앉아서 이야기 나누다 벌써 어둑어둑해질 지경. 이게 바로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다고 하는 것일까.

술 마시다 '급결성'한 밴드 '랍스타' 거친 매력이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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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공식(?) 밴드 '랍스타'의 공연 모습. 임진강을 '맛깔나게' 부른다. 가끔 사람이 없을 때면, 사장님의 첼로 연주를 들을 수도 있다. ⓒ 이유하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미루나무' 바로 옆, 이중섭 창작 스튜디오 입주 작가인 서양화 화가 이두원(29) 작가가 들어왔다. 거칠게(?) 긴 머리와 수염을 휘날리면서 등장하는데 오, 포스가 남다르다. 이 사람은 누굴까 쳐다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앉더니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주에 술 마시다가 '급결성'한 미루나무 공식(?) 밴드 '랍스타'의 보컬이 바로 이두원 작가였던 거였다. '헛둘헛둘' 음정을 잡고 있자니 미루나무 주인장 이광희씨가 이번에는 기타를 들고 나오신다. 어머머, 이쯤 되면 실력이 궁금해지는 걸?

'랍스타'의 공식 노래는 <임진강>. 뭔가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맛이 물씬 풍겨지는 밴드였다. 엇박자에 기타 반주는 제각각, 고음 부분에는 살짝 쉬어주는 센스까지! 그 '거친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다가오는 6월경에 예정된 이두원 작가의 개인전에 그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중이란다.

언제든지 객원보컬은 환영이라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지원해 보는 거도 좋을 듯하다. 단, 오디션을 통해 '너무 노래 잘하면' 탈락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노래 실력보다는 노래의 '걸죽한 맛'을 살릴 수 있는 분에게 강력 추천한다.

여행의 묘미는 '설렁설렁함'인 나는 제주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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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환쟁이'라고 불러 달라는 이두원 작가. 상상풍경화라고 칭하는 그의 작품은 감각이 수집한 것들을 다듬어 시처럼 함축한 그림을 그린다. (http://www.cyworld.com/doo221) ⓒ 이유하



그러니까 다리에 힘 빼고 보면, 이런 공간도 있는 것이다. '쓰레빠' 신고 어슬렁 어슬렁 와서 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다양한 자기 분야에 대한 정보도 나누는 공간 말이다. 손님과 주인의 경계가 불분명해서 '필' 받으면, 노래도 부르고, 피아노도 치고, 영화도 같이 보고, 혹은 좋은 작품이 있으면 전시도 하는 공간이다. '미루나무' 내에는 기증한, 혹은 전시중인 작가들의 작품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루 있어도 꼭 10년쯤은 머물렀던 것 같은 공간. 어리버리하게 앉아서 수다도 떨고, 맥주도 한 잔 마시다보니 벌써 밤 12시, 카페 문 닫을 때 같이 나와 버렸다. 아고고 저런, 여기서 눌러 앉으면 엉덩이만 커져. 나는 어디까지나 여행객이란 말이야! 제주도민이 아니라고!
#제주도 #서귀포 #미루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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