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 갇힌 책과 골목고양이 그림책

[책이 있는 삶 128] 책을 읽는 사람 마음밭과 삶

등록 2010.03.12 14:40수정 2010.03.1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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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우리에 갇힌 책

그제 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눈 내리는 밤길을 조용히 거닐며 이곳 저곳에 깃든 모습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아이하고 어울리고 씨름을 하면서 기운이 다 빠진 터라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고되고 벅차구나 하고 새삼 헤아리면서, 아이가 없던 때에는 밤 두 시이건 새벽 네 시이건 홀로 바지런히 밤 골목 마실을 가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렇지만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동안 아이 모습을 벌써 수 만 장 사진에 담았습니다. 웃고 울고 까불고 놀고 책을 읽고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숱한 모습을 사진으로 하나, 둘 담는 동안, 나와 옆지기가 어릴 때에 어떠했을까를 돌아보고, 그 무렵 우리들 어버이 되는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되새깁니다.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틀림없이 여러 가지를 잃는 삶이면서 어김없이 여러 가지를 새롭게 얻는 삶입니다.

프랑스사람 조슬린 포르셰 님과 크리스틴 트리봉도 님이 함께 쓴 <우리 안에 돼지>(숲속여우비,2010)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고작 112쪽짜리 책이니 금세 덮을 수 있었지만, 이야기가 쏙쏙 와닿으면서 가슴으로 잘 스며들은 까닭에 금세 덮고 다시금 찬찬히 돌아보고 있습니다.

"쥘리앙 말이 돼지가 움직이지 못해야 몸집이 빨리 크고, 그럴수록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30쪽)." 같은 대목은 요즈음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축사에서 놀라운 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동물들과 몸을 부대끼며 일을 하면서도 마치 동물이 기계인 듯 대한다는 점입니다. 돼지의 기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86쪽)." 같은 대목은 어느 만큼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헤아릴 만한 이야기라고 봅니다.

그러면 "사실 돼지 축사 건물 전체가 자연과 차단된 구조랍니다(55쪽)." 같은 대목을 살갗 깊숙하게 느끼는 분은 얼마쯤 될까요. 돼지우리에 갇힌 돼지만 자연이 사라진 곳에서 살집만 하루 빨리 불리도록 내몰리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일하거나 살아가는 곳에서도 더 빨리 돈만 벌도록 내몰리고 있는 '자연이 자취를 감춘' 곳임을 깨닫는 분은 얼마나 되려나요. 우리는 우리가 즐겨먹는 고기와 푸성귀를 키우는 곳에서만 짐승과 푸나무를 기계처럼 다룰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목숨이 깃든 사람이 아닌 돈벌이 기계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며칠 앞서 헌책방에서 김수미 님 산문모음을 두 권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샘터,1987)를 먼저 읽고 있습니다. 김수미 님이 책을 낸 줄은 진작 알았으나 이제까지 이분 책을 읽은 적이 없다가 몹시 새삼스럽다고 느끼며 쥐어들어 읽는데, 당신 나이 마흔을 앞두고 처음으로 책을 쓰셨더군요. 세월과 삶과 눈물콧물과 웃음이 고이 스민 책을 펼치면서 김수미 님 지난날 마음하고 오늘 제 나이를 곰곰이 짚어 봅니다. 스물세 해 앞서가 아닌 오늘 읽기에 비로소 내 마음밭으로 스미는 이 책을 곱게 쓰다듬으면서, 우리에 갇히는 삶이 아닌 보금자리를 일구는 삶이란 무엇인지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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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나 '길'이 아닌 '도둑' 이름을 붙인 고양이 그림책과 <우리 안의 돼지> 이야기책을 나란히. ⓒ 최종규


ㄴ. 골목고양이

골목동네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 처음에는 '골목길'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골목사람' 사진을 찍는다고 느꼈고, 이내 '골목집' 사진을 찍는다고 깨달았습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골목-'이 붙은 낱말은 '골목길'과 '골목집' 두 가지가 실립니다. 그렇지만 '골목집'이 한 낱말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때때로 '골목길'마저 한 낱말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만납니다. 돌이켜보면, 저 스스로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살고 있지만 골목사람 삶터를 사진으로 담으려 하지 않았다면 골목길이든 골목집이든 옳게 헤아리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제가 '골목집'이라고 적어 놓은 글을 '골목 집'으로 띄어 놓는 편집자들은 국어사전조차 들춰볼 생각이 없기도 했겠으나, 당신들한테 낯선 이야기에 찬찬히 마음을 열 그릇이 안 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처음에는 골목길과 골목집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제 깜냥껏 '골목꽃'과 '골목나무'와 '골목자전거'와 '골목문'과 '골목문패'와 '골목전봇대'와 '골목가게'와 '골목밭'과 '골목빨래' 같은 낱말을 지어서 씁니다. 골목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니 '골목삶'이요, 골목에서 마주치는 강아지이니 '골목강아지'입니다. 그저 저절로 톡톡 튀어나오는 말마디입니다.

헌책방을 다니고부터 '헌책방'이 한 낱말인 줄 알았습니다. 헌책방을 다니기 앞서는 '헌책방'인지 '헌 책방'인지 '헌책 방'인지 몰랐습니다. 아니, 알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나하고는 동떨어진 곳이니 어떻게 적바림하든 제가 아랑곳할 일이 아니었겠지요. '헌책방'과 '헌책'이라는 낱말은 버젓이 국어사전에 실려 있으나, 꽤나 많은 사람들이 두 낱말을 띄어서 쓰곤 합니다. 따지고 보면 헌책과 헌책방하고 나란히 놓일 '새책'과 '새책방'이라는 낱말은 국어사전에 없습니다. 한 낱말이 아니니 맞춤법에서는 띄어서 적으랍니다. 새책을 다루는 곳은 마땅히 '새책방'이라고 해야 하건만, 그냥 '책방'이라고 하면 된답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헌책을 다루는 헌책방 또한 그예 '책방'이라고 하면 될 텐데, 헌책방을 놓고는 반드시 '헌책방'이라고 해야 한다는군요. 세상사람 생각이 이렇습니다.

얼마 앞서 <도둑고양이 연구>(파랑새,2008)라는 그림책 하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나온 지 이태밖에 안 되었으나 벌써 품절이 되어 더는 구경할 수 없는 책입니다. 일본사람이 빚은 이 그림책은 일본에서는 "Let's Follow And Observe A Town Cat!"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는데, 한글판 책은 'Town Cat'을 '도둑고양이'로 옮겨 버렸습니다.

퍽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그림책입니다만, 책이름이 '길고양이'도 아닌 '도둑고양이'이니 몹시 어처구니없습니다. 아니, 어찌할 바 모르겠습니다. 'Town Cat'이라 하면 '동네고양이'나 '도시고양이'란 소리가 아닌지요? 우리한테 동네나 도시에 사는 고양이라면 '길고양이'일 테고, 시골에서는 '들고양이'입니다. 고양이는 길가가 아닌 골목집 사이사이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살아가니, 옳게 이름을 달자면 '골목고양이'입니다. 어쩔 수 없는지 모르나, 골목동네에서 살지 않고 골목고양이를 마주할 일이 없으며 골목사람하고 어깨동무하지 않으니 '골목' 이야기를 모르는 탓이요, 지청구를 해도 부질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우리 안에 돼지

조슬린 포르셰 & 크리스틴 트리봉도 지음, 배영란 옮김,
숲속여우비, 2010


#책읽기 #책이야기 #책이 있는 삶 #삶읽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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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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