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랑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살가운 만화 54] 요시다 아키미, ‘바닷마을 다이어리’ 1ㆍ2

등록 2010.03.19 14:31수정 2010.03.19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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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엄마다움, 아빠다움, 아이다움

 

지난 2008년 8월 15일 밤, 한여름이었음에도 한밤에 세차게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온도가 뚝 떨어졌습니다. 이튿날 8월 16일 새벽 다섯 시에 딸아이가 태어났는데, 한여름에 아이를 낳기 때문에 더위로 애먹을까 걱정했지, 날이 추워 오들오들 떨며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도 몸이 안 좋던 옆지기는 아이를 낳으면서 몸이 더 나빠졌고,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되어도 몸이 나아질 낌새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제 아침에 부랴부랴 짐을 꾸려 영등포역으로 간 다음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갔습니다. 온 동네가 재개발로 들쑤석거리는 인천에서는 도무지 깃들일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버거워 멀리멀리 시골마을을 알아보려고 경주로 가는 길에 대구에서 한 번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길을 나선 날부터 갑작스레 눈이 오고 추위가 닥칩니다. 아이한테 아주 젖을 끊고 밥만 먹이고 있는 지 얼추 보름이 되자 옆지기는 엊그제부터 달거리를 다시 합니다. 사람들은 젖을 뗀 아이가 애를 먹겠다고 근심을 하지만, 처음부터 몸이 아픈 채로 아이를 낳은 옆지기 또한 애를 먹으면서 힘들 줄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겨우 짬을 내어 시골마을을 돌아다녀 보고자 했지만, 다시금 몸이 몹시 나빠진 옆지기와 함께 움직일 수 없기에 어제 아침에 부랴부랴 다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옆지기는 새벽 다섯 시까지 잠이 들지 못하다가 자리에 눕습니다. 아이는 저녁 아홉 시 무렵 고맙게 일찍 잠들어 주었으나 새벽 네 시 이십 분부터 깨어 도무지 다시 잠들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리 칭얼 저리 낑낑 요리 버둥 조리 꿍얼 하면서 뒤척이고 울고 투정을 부립니다. 힘들 때에는 새근새근 잠들어 주면 더없이 좋을 텐데, 새근새근 잠들고 나면 고단함이 조금은 가실 텐데, 아무래도 힘든 사람보고 푹 자라고 하는 말은 입발린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힘든 사람은 잠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면서 더 힘든 나날이 팍팍하게 이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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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이야기 1권 겉그림. ⓒ 애니북스

바닷마을 이야기 1권 겉그림. ⓒ 애니북스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눈곱만큼도 슬프지 않다니 당황스럽다. 부모님은 내가 일곱 살 때 이혼했다. 할머니 얘기로는 아버지 빚과 여자 문제가 원인이었다고 했다. 이혼하고 2년 뒤엔 엄마가 재혼한다며 집을 나가 버렸다. 그날 이후 언니와 나, 내 동생은 할머니 집에서 살면서 부모님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이젠 할머니마저도 돌아가셨고, 낡은 집엔 우리 세 자매만 남았다.' … "작은언니. 생판 모르는 아저씨가 누워 있어." '눈물이 안 나와요, 아버지.' ..  (1권 14∼15, 35쪽)

 

다가오는 토요일은 처남이 태어난 날입니다. 옆지기한테는 동생인 처남은 중학교 1학년입니다. 옆지기는 저한테 당신 동생 태어난 날 이야기를 하면서 동생 보러가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산집에는 물이 나오지 않아 그곳에 어찌저찌 찾아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있는 모텔에서 자야겠지?" 하고 말을 잇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만만치 않은 살림을 고단하게 꾸린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옆지기 부모님 살림을 돌아본다면 우리와 견줄 수 없이 고단하고 벅찹니다. 그래도 우리 세 식구 지내는 집은 겨울에 춥지 않았고 물을 마음껏 쓰며 코앞에 저잣거리와 생협이 있습니다. 때때로 잊어서 그렇지, 우리 조그마한 살림집은 퍽 좋은 보금자리입니다. 그만큼 달삯이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옆지기 식구들은 물이 안 나오는 컨테이너집에서 어떻게 지내실까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덩그러니 커다란 전원주택에서 무엇을 하면서 하루하루 지내시고 있을까요. 집이 없다고 걱정만 한가득이지는 않을 터이고, 집이 크다고 시름 하나 없다고 할 수 없을 터입니다만, 값싼 집도 비싼 집도 없이 누구한테나 살가운 보금자리가 있을 수 있는 우리 삶터가 되기는 왜 이리 어려운지 궁금합니다. 언제부터 우리네 살림집이 좋은 보금자리로서가 아니라 돈값으로 얼마짜리 부동산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합니다. 식구들이 오순도순 지내는 사랑을 꽃피우는 둥지이면서, 이웃과 동무 누구나 스스럼없이 찾아와 밥 한 그릇 나누고 잠자리 며칠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사랑방이기도 한 살림집은 언제부터 자취를 감추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참 그렇지. 스즈가 하면 어때요? 친딸이잖아요." "그러면 되겠구나. 발인할 때는 인사만 해도 되니까." "그건 안 됩니다. " "그래도 스즈가 참 야무진 애라서." "그래요. 스즈는 영리한 애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건 어른들이 할 일입니다. 이건 부인 되시는 분이 해야 할 몫이에요. 요코 씨. 어른이 해야 할 일을 아이한테 떠맡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 어린애가 아이답지 않은 것만큼 슬픈 게 또 어디 있겠어요." ..  (1권 5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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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속그림 가운데. ⓒ 애니북스

1권 속그림 가운데. ⓒ 애니북스

새벽 여섯 시 반, 아이는 드디어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두 시간 남짓 칭얼 낑낑 응애 끅끅 하면서 보냈습니다. 이제 한두 시간쯤 달게 잠이 들었다가는 다시금 벌떡 깨어나 놀겠지요. 아빠는 그때까지 이 일 저 일 부지런히 해야 하고, 이렇게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고 아이를 부대끼고 아침에 아이한테 밥을 해 먹이고 어제 하루 쌓인 빨래를 어그적어그적 하면서 아이를 씻기고 머리를 감기고 하다 보면 낮나절에는 그예 온몸 구석구석 쑤시고 결리지 않은 데가 없으면서 방바닥에 자빠질 겝니다. 아니, 나흘째 집 청소를 못했으나 오늘은 집 청소까지 말끔하게 하고 나서 자빠져야겠습니다. 아직 끌르지 못한 여행가방 보따리를 풀고, 다 마른 빨래를 개며, 아픈 옆지기를 토닥이다 보면 어느 결에 낮 두어 시쯤 될 터이고, 이무렵이면 아이는 낮잠을 잘 무렵이라 벌게진 눈으로 또 칭얼대고 낑낑댈 테군요.

 

.. "많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느낌이네." '토모아키가 한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의외로 당연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  (1권 135쪽)

 

겨우 잠이 든 두 사람을 머리맡에서 바라봅니다. 아프고 힘든 두 사람이 덜 아프고 덜 힘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으나, 아프면 아픈 대로 살고 힘들면 힘든 대로 지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들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 어떤 마음과 느낌이었을까 곱씹어 봅니다. 형이나 나는 얼마나 찡얼거리거나 낑낑대었을까 궁금합니다. 어머니한테 여쭈어 보면 "그 옛날 일을 어떻게 기억하냐?" 하면서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아버지는 알까요? 아이돌보기는 오로지 어머니 혼자 하셨는데, 아버지는 찡얼거리거나 낑낑대는 당신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가뜩이나 새벽 일찍 일어나 통근버스를 타러 달려나가야 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는 하루하루인 아버지한테는 당신 아이가 당신 삶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내 아버지가 당신 아이를 바라보거나 헤아렸던 느낌을 곱씹으며, 나는 내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거나 헤아리는지를 돌아봅니다. 내가 우리 아이한테 짜증을 부리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짜증이 모두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지 않았나 떠올리며 섬뜩합니다. 내가 우리 아이한테 사랑스러운 매무새로 어르고 달래며 안고 놀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사랑스러운 매무새란 우리 어버이가 저한테 베푼 세상이 고이 이어진 셈인가 싶어 놀랍습니다.

 

제 삶자락은 제 나름대로 꾸리는 삶자락이지만 이 구석 저 구석에는 내 어버이 삶자락이 켜켜이 쌓여 있을 테지요. 제 삶결은 제 깜냥껏 가꾸며 일군다지만 이 모습 저 모습에는 내 어버이와 내 살붙이와 내 이웃한테서 받은 모든 손길과 눈길과 마음길이 고이 스며 있을 테지요.

 

.. '타다는 우리가 선물한 미끄럼 방지용 고무가 붙은 장갑을 끼고 병원 현관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하면서 "사실은 다리를 자르고 나서 몇 번이고 죽고 싶었어"라고 말했다. 아사노가 진지한 표정으로 "지금도 그래?"라고 묻자, 타다는 "이젠 그런 생각 안 해"라며 웃었다.' ..  (1권 187쪽)

 

저는 누군가한테 아이였으며 누군가한테 어버이이고, 우리 아이 또한 누군가한테 아이이지만 앞으로 누군가한테 어버이가 될 고운 목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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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속그림. ⓒ 애니북스

2권 속그림. ⓒ 애니북스

 

 (2) 만화책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야기

 

만화책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과 <한낮에 뜬 달>을 읽습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큰이름으로 묶이는 만화책으로, 이 두 권이 끝이 아니라 앞으로 3권 4권으로 죽 이어질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 카마쿠라 작은 바닷마을에서 세 자매와 어린 '배다른 동생'이 함께 복닥이는 조그마한 삶자락을 그려낸 만화입니다. 우리로 치면 안면쯤 될까요. 아니면 옥구나 돌산이나 감포쯤 될까요. 작다고 하지만 병원이 있으니 강릉이나 울진이나 목포쯤이라고 해야 할까요. 바다와 함께 숲이 있고 논밭이 있으며 마을 크기처럼 작은 도심지가 있으며 어린이 축구단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가득 채우는 연속극처럼 크고 굵직하며 으리으리한 이야기란 하나 없는 자그마한 마을 자그마한 사람 이야기를 살포시 담은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이고 <한낮에 뜬 달>입니다. 그런데 크고 굵직하며 으리으리한 이야기이든, 자그맣고 자그마한 이야기이든,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며 사람과 사람이 복닥이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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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이야기 2권 겉그림. ⓒ 애니북스

바닷마을 이야기 2권 겉그림. ⓒ 애니북스

.. "난 그 집에서 무서운 걸 수도 없이 봤어. 아빠랑 엄마가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 할머니 장례식 날, 엄마가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화장하는 모습, 그리고 이와사키와 엄마가 서로를 안고 있는 모습. 병원에서 깨어나 처음 본 것도 부모님이 다투는 모습이었어. 내가 한 짓은 결국 아빠의 외박과 정원에 놓인 화분 수만 늘렸지." ..  (2권 46∼47쪽)

 

큰도시에서도 사람 사이에 사랑이 꽃핍니다. 작은마을에서도 사람 사이에 생채기가 생깁니다. 어디에든 믿음이 있고 눈물과 웃음이 함께 있습니다. 어느 곳에든 아픔이 있으며 기쁨과 즐거움이 나란히 있습니다. 넉넉한 살림에 걱정없어 보이는 느긋한 사람들이 있고, 쪼들리는 살림에 걱정 많아 보이는 고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넉넉한 살림이라지만 마음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며, 괴로운 살림이라지만 마음은 괴롭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화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하고 <한낮에 뜬 달>에 나오는 세 자매와 어린 동생 넷이 꾸리고 있는 집에서 세 자매는 모두 '어른'이지만 어릴 때부터 어린이다움을 잃고 자라 어른이 된 아직 '어린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세 자매와 함께 살아가는 배다른 동생은 '어린이'이지만 세 자매와 마찬가지로 어린 날부터 어린이다움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생채기를 받았으나 생채기를 받을 무렵 이 생채기가 생채기임을 깨닫기 어려운 나이였다고 할까요. 아니, 너무도 큰 생채기였기 때문에 차마 생채기라고는 여기기 힘들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어린이다운 어린 나날을 보내지 못한 네 사람을 낳아서 길렀다고 하는 어버이들 또한 당신들이 어린이였을 무렵에는 당신들이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서 저질렀던 잘못과 마찬가지로 당신들 어버이가 당신들한테 생채기를 남겼을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사랑을 나눌 줄 모르는 법이지는 않습니다. 어버이한테서 사랑스러운 손길과 품을 느껴 보지 못했다고 내 아이한테까지 사랑스러운 손길과 품을 나누어 주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네 사람을 낳아 키운(만화 줄거리로 따지고 보면 '키우'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버지 하나와 세 어머니 되는 분은 늘 언저리에서 맴돌기만 합니다. 어버이 되는 당신들한테만 즐거운 삶을 찾아서 아이들을 버렸고, 아이들이 어찌저찌 지내는가에는 눈길이든 마음길이든 쏟지 않습니다. 아니, 당신들 마음으로는 생각하고 그리워 했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당신들이 낳았던 아이들이 살갗으로 느끼거나 목소리로 듣거나 눈으로 보거나 곁에서 부대끼도록 해 주는 사랑은 아무것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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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속그림 가운데. ⓒ 애니북스/요시다 아키미

1권 속그림 가운데. ⓒ 애니북스/요시다 아키미

.. '유야는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다구! 대체 뭘 노력하라는 거야. 너희들한테 그런 말 듣고 있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계속 노력하고 있다구! 나쁜 뜻은 없다고? 그래서? 나쁜 뜻만 없으면 그렇게 막 떠들어도 돼?' … "쉽게 누군가를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진짜 짜증 나!" "그렇지? 어쩐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 자기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로 그거야!" '유야랑 스즈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소중한 걸 잃어 본 두 사람만이 아는 무언가가, 두 사람이라면 아무 말 하지 않고도 바로 알 수 있는 무언가가.' ..  (2권 113, 128∼129쪽)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고 우리 어머니를 헤아려 봅니다. 갓 대학교에 들어간 해에는 학교에서만 노느라 집에서 부모님 얼굴을 본 횟수도 적었으나 얼굴을 보았어도 이야기 몇 마디 나누어 본 일이 드뭅니다. 이듬해에는 군대에 갔고 곧바로 대학교를 때려치운 다음 부모님 집을 떠나 혼자서 살았기에 명절에나 얼굴을 뵙고 짤막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중학생 때부터 밤 열 시까지 붙잡히는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시달려야 했기에 중고등학생 때에 아버지 어머니하고 어울리던 겨를이란 여섯 해 동안 며칠 안 된다고 할 만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하고 어울리던 나날이라면 국민학생일 때하고 아주 꼬맹이였을 때인데, 이때에 아버지는 인천집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경기도권 국민학교 교사로 일할 무렵이라 하루 내내 어머니하고 어울리던 일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담배와 신문 사 오라는 심부름하고, 형과 제가 다투었을 때(늘 제가 형한테 얻어맞았지만) 몽둥이를 들고 두들겨패던 일 아니고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날마다 아버지 다리와 등허리 주무르도록 한 일하고.

 

어머니하고는 하루 내내 함께 지냈으나 어머니는 말수가 몹시 적었고, 집 안팎에서 부업을 하느라 바빠 거의 언제나 어머니 곁에서 부업을 도왔습니다. 신문배달은 어머니가 집 바깥에서 하던 부업이라 어머니 일을 거들며 저절로 익혔고, 뒷날 제금나서 서울에서 혼자 살 때에 신문사지국으로 들어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바느질을 하든 우산을 꿰매든 옆에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도맡으면서 일감을 받아 오고 다 마친 일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걸레질하기나 빨래하기나 밥하기를 따로 가르쳐 주신 적은 없지만, 하루 내내 집에서 들여다보고 쳐다보고 곁에 앉아 있으면서 어깨너머로 바라본 대로 제 몸에 차근차근 배어들고 스며들었습니다. 뭐랄까, 늘 바쁜 어머니 곁에서 자잘한 집일을 함께 배우고 거들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쉴 겨를이 없던 어머니 손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 손을 덥석 잡으며 "어머니 손은 쉬지 않나요?" 하고 여쭈던 일이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의외로 순식간이거든요. 애들은 순식간에 커 버리잖아요." '보호자로서 당연한 거겠지. 그런 건 생각도 안 해 봤어. 나 보호자였구나.' … "그래도, 야마가타에 있을 때가 훨씬 쓸쓸했어요. 지금은 전혀 쓸쓸하지 않아요. 여학생 기숙사에 막내로 들어온 기분이에요." ..  (2권 149,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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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속그림. ⓒ 애니북스

2권 속그림. ⓒ 애니북스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을 보면, 세 자매와 함께 살아가는 어린 동생(중학생)이 다시 축구부원이 되어 또래 동무와 어울리면서 "아니. 우린 아빠는 같은데 엄마가 달라. 그래서 그동안 따로따로 살았어. 이번 여름에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난 엄마도 이미 예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언니들이 같이 살자고 했어(157쪽)." 하는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여느 낯빛으로 들려줍니다. 마음앓이를 숱하게 겪은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움을 잃었으나 그만큼 씩씩하고 다부지며 튼튼한 한 사람으로 여물어 갑니다.

 

<한낮에 뜬 달>을 보면, 세 자매에서 맏언니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세 자매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아주 오랜만에 불쑥 찾아왔을 때에 함께 할머니 성묘를 하고 나서 기차역에서 배웅을 하며 홀로 '내가 엄마를 찾아가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엄마가 다시 카마쿠라를 찾아오는 것도 먼 훗날의 일이겠지 …… 그래, 뭐 이젠 됐어 …… 서로 건강하게 지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하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다움을 진작 잃고 홀로 씩씩하고 튼튼해야 했던 맏언니는 어느새 곧고 다부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만, 당신 마음을 너무 바짝 죄느라 이제껏 놓치고 있던 너그러움을 조용히 되찾으면서 한 사람이 고운 목숨으로 살아고자 할 때에 함께 건사해야 할 마음밭이란 무엇인가를 살며시 느낍니다.

 

고단하고 힘에 겨우며 쓸쓸한 삶을 꾸려야 했던 사람들은 고단함을 느끼며 깊은생각을 기울이고 깊은생각을 돌보며 깊은생각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고단하고 힘에 겨우며 쓸쓸한 사람만 깊은생각을 보듬지 않습니다. 홀가분하고 기쁘며 아름다운 삶을 꾸리는 사람도 얼마든지 깊은생각을 보듬을 수 있어요.

 

다만, 스스로는 깊다고 여길는지 모르나 나중이 되어 돌아보면 깊다고 여겼던 생각이 얼마나 얕거나 어설펐는가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아니, 얕고 어설픈 생각이었음을 못 느끼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고단하고 힘에 겨운 삶이기 때문에 깊은생각을 아예 접어 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홀가분하고 기쁘며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에 내 사랑과 믿음을 한껏 널리 나누고 싶어서 깊은생각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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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속그림. ⓒ 애니북스

2권 속그림. ⓒ 애니북스

 

(3) 좋은 사랑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이 아이는 이 여름에 여기서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을까.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는 아버지를 줄곧 혼자 감당해 왔을 것이다.' … '하지만 난 안 된다는 거잖아. 저 친구가 떠안고 있는 무거운 짐은 내가 들어 줄 수 없나 보다.' ..  (1권 64, 128∼129쪽)

 

같은 깊은생각일지라도 곱고 맑은 깊은생각이 있습니다. 같은 깊은생각이지만 어둡고 케케묵은 깊은생각이 있습니다. 같은 목숨일지라도 곱고 맑은 목숨이 있고, 같은 목숨인데 어둡고 케케묵은 목숨이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이 내려받고 선물받은 우리 한삶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요. 우리는 한 번 누리고 조용히 떠나 보낼 우리 한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눈물로 보내는 한삶일는지요. 웃음이 넘치는 한삶일는지요. 주름살 가득한 한삶일는지요. 꾸덕살로 지새우는 한삶일는지요. 사랑과 평화로 둘러싸인 한삶일는지요. 미움과 시샘이 흘러넘치는 한삶일는지요. 눈물이라면 나 혼자 흘리는 눈물일는지요 어깨동무하며 흘리는 눈물일는지요. 웃음이라면 나 혼자 키득거리는 웃음일는지요 서로서로 두 손 맞잡으며 활짝 펼치는 웃음일는지요.

 

바닷마을 작은 사람들 삶무늬를 수수하게 보여주는 만화책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이랑 <한낮에 뜬 달>에서는 어디에든 어떻게든 서려 있는 눈물과 웃음이 어떻게 얽히면서 피어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눈물이 어떠한 눈물꽃으로 피어나고 웃음이 어떤 모습 웃음꽃으로 피어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제아무리 큰 아픔일지라도 눈물꽃이란 아름다운 눈물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법입니다. 제아무리 해맑은 기쁨일지라도 허전하거나 속없는 웃음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감싸안거나 붙잡고 있는 눈물꽃과 웃음꽃이란 어떤 무늬요 어떤 결이요 어떤 모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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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속그림. 네 자매가 살아가는 낡고 오래된 집. ⓒ 애니북스

2권 속그림. 네 자매가 살아가는 낡고 오래된 집. ⓒ 애니북스

.. '어쩐지 말도 안 되는 변명처럼 들렸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어느새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 … '우리 엄마지만, 그 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딸이었어.' ..  (2권 180, 188쪽)

 

아픔을 먹고 자랐기에 한결 씩씩하며 사랑스러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픔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한결 어둡고 아픈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쁨을 먹고 자라면서 한결 따숩고 넉넉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쁨을 먹고 자랐으나 한결 답답하고 멍청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삶이란 모르는 법입니다. 삶이란 모르면서 새롭게 꾸리는 법입니다. 삶이란 누구나 다르면서 다 다른 빛깔로 여물어 가는 법입니다. 작은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대로 제 길을 걸으면서 제 빛깔을 찾아갑니다. 누구 뒤를 좇는 법이 없고, 누구 시늉을 내는 법이 없으며, 누구 콧김에 휘둘리는 법이 없습니다. 작니 크니 하는 삶이 아닌, 작니 크니 하는 사람이 아닌, 오롯하며 옹근 한 사람이요 오롯하며 옹근 한 갈래 삶입니다. 좋은 사랑이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엄마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어도 어느새 새롭고 싱그러운 엄마다움이 내 마음속에 움트곤 합니다. 아빠다움을 물려받지 못하고 컸어도 어느 결에 우람하고 산뜻한 아빠다움이 내 마음밭에 자라곤 합니다. 아이다움을 빛내지 못하고 지냈어도 어느 무렵부터 착하고 거룩한 아이다움이 내 마음바탕을 이루곤 합니다. 만화책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이며 <한낮에 뜬 달>이며는, 삶을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자리를 조촐하게 건드립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3권이며 4권이며, 또는 3권으로 끝나든 10권까지 이어지든, 어떠한 실타래를 솔솔 풀어나갈는지 손꼽아 기다립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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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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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2010.03.19 14:31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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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 : 바닷마을 다이어리 1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애니북스, 2009


#만화책 #만화읽기 #책읽기 #책이야기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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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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