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이기는 책 아닌, 세월을 담는 책

[헌책방 나들이 225] 서울 수유역(화계사) <신일서점>

등록 2010.03.22 14:58수정 2010.03.2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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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유리에서 찾아가는 헌책방

땅밑으로 다니는 지하철 4호선 수유역 5번 나들목으로 나와 화계사 가는 길을 찬찬히 걸어가다 보면, 자동차 오가는 큰길가 오른쪽 한켠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헌책방을 하나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느 헌책방을 찾아가든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몰아서 찾아갑니다. 운전면허조차 없고 자동차란 없는 살림이니 마땅히 두 다리나 자전거로만 헌책방 마실을 갑니다. 그렇지만 저한테 자동차가 있다 하더라도 두 다리나 자전거로만 헌책방 마실을 갈 생각이며, 앞으로도 자동차란 장만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동차를 장만할 만한 돈이 있으면 제 마음을 사로잡는 온누리 좋은 책을 신나게 장만할 수 있으며, 자동차를 굴릴 만한 돈이 있다면 제 가슴을 북돋우는 온누리 아름다운 책을 기쁘게 장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안 타거나 그만 타거나 멀리할 수 있다면, 나라에서도 새로운 찻길 닦기를 멈출 수 있을 뿐 아니라 찻길 닦던 데에 쓰던 돈을 문화와 교육과 복지에 들이도록 바꿀 수 있지 않겠냐는 꿈을 꿉니다. 우리 스스로 문화와 교육과 복지에서 자꾸자꾸 멀어지고 있는 탓에 누가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공무원이 되든 끝없는 개발주의 정책만 쏟아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찾는 손길이 아름다운 삶을 꾸리려는 손길로 이어지고, 사랑스러운 책을 바라는 눈길이 사랑스러운 넋을 바라보는 눈길로 이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찌 하다 보니까 지하철을 탑니다.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다가 '오늘은 한번 조금 먼 나들이를 하면서 책을 둘러보고 나서 집으로 갈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옆지기가 혼자서 아이를 보느라 고달플 텐데, 두 시간쯤 더 애써 주기를 비손하면서, 오늘 저녁과 이듬날부터는 옆지기를 쉬도록 하고 아빠가 아이를 보면 어떻겠느냐고 생각하며 집으로 쪽글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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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모습 ⓒ 최종규


4호선 줄기를 타고 수유역에서 내립니다. 언제까지였더라 가물가물한데, 2003년 가을까지는 4호선 줄기를 타고 수유역에서 내릴 때에는, 또는 이 둘레에 볼일이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가람서점>이라고 하는 헌책방을 찾아갔습니다. 먼저 <가람서점>에 들러 책을 살펴본 다음 사람을 만나고 볼일을 보곤 했었지요. 그러나 헌책방 <가람서점>은 2003년 가을에 문을 닫고 맙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노릇이었는데, 헌책방 <가람서점>이 문을 닫고 나서 중곡동에 <가자헌책방>이 문을 열었습니다. 중곡동에 <가자헌책방>을 연 분은 샛장수로 헌책방에 책을 대던 분이었고, <가람서점>이 문을 닫을 때에 책들을 받았다고 합니다. 샛장수라고는 해도 한꺼번에 어마어마한 책을 껴안아야 하다 보니 마땅한 창고를 찾기 어려웠고, 겨우 창고 자리 하나를 찾으면서 '아예 이 책으로 책방을 열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하셨답니다. 한 사람이 떠나며 빈 자리를 새로운 사람이 찾아들면서 채우고 일군다고 할까요.

수유역 둘레에는 <가람서점>과 함께 헌책방 <신일서점>이 있습니다. <가람서점>은 문을 닫았고, 가까운 미아리 쪽 수많은 헌책방들도 거의 모두 사라진 오늘날이지만, <신일서점>은 꿋꿋하고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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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가득 채운 책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을 채울 책을 헤아립니다. ⓒ 최종규


차갑기는 하지만 볕살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고운 기운을 받으면서 자동차 소리로 시끄럽고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습니다. 화계사 쪽하고 가까워질수록 사람물결은 줄어들고, 헌책방을 코앞에 두니 이 둘레를 오가는 사람은 드문드문입니다. 헌책방 문을 당기고 들어섭니다. 여러 해 만에 찾아왔어도 <신일서점> 사장님은 얼굴을 알아봐 주십니다. 그동안 책방 바닥에 장판을 하나 새로 깔아 놓으셨고 책꽂이를 새로 들여놓으셨습니다. <신일서점>은 벽 책꽂이만 있을 뿐 책방 복판에는 책을 그냥 쌓아 놓고 있었는데, 쌓인 무더기를 치우고 책꽂이를 들이셨습니다. "아무래도 달라져야지요." 하고 짧게 한 마디 하셨지만, 책더미를 들어내어 바닥을 새로 하고 책꽂이를 마련하는 일이란 참으로 만만하지 않은 일입니다. 책손 한 사람한테 조금 더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 주고, 책 하나하나 더 손질을 해서 정갈하게 꽂아 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헌책방 일꾼 손품이 들어야 했을까요.

<김현승-고독과 시>(지식산업사,1977)라는 낡은 책을 책시렁에서 끄집어내어 펼칩니다. 제 나이보다 두 살이 어린 책이지만, 제가 이 책을 알아채고 읽을 수 있던 나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이 책은 새책방 책꽂이에 없었습니다. 더없이 마땅한 소리일까요? 우리 나라 도서관 가운데 <고독과 시>를 1977년에 처음 나오던 모습 그대로 정갈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은 몇 군데쯤 될까요? 앞으로 열 해쯤 지나고 나면 <고독과 시> 같은 책들은 '옛책' 대접을 받으면서 여느 도서관에서는 '손으로 만질 수 없도록 깊숙한 데에 숨겨 놓고' 있지는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아니, 깊숙한 데에 숨길 수 있게끔 이 책을 건사하고 있는 데가 남아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 사실을 취급하는 신문 기사나 역사적 기술 속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주관을 삽입하지 않으면 그만큼 기술의 진가는 발휘될 수 있지만, 문학적 표현은 그와는 반대로 반드시 주관을 여과하여야만 된다. 주관을 넣으면 넣을수록 진실미는 그 가치를 발휘할 기회를 더욱더 갖게 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이 원하는 궁극의 소득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 다시 말하면 그 사실은 우리의 생활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어떠한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없느냐를 알기를 원한다. 이러한 관계, 이러한 의미를 알려면 우리는 그 사실을 해부하고 분석하여 사실의 전모를 샅샅이 뒤지고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 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은 작자의 주관과 개성에 있다 ..  (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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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최종규

<오연호-살아나는 임진강>(돌베개,1992)이라는 소설책 하나를 바라봅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를 세운 오연호 님이 <월간 말> 기자로 있을 무렵에 써낸 소설입니다. 오연호 님은 1964년에 태어나 1988년부터 <월간 말> 기자로 일했으며, 1989년에 <식민지의 아들에게>라는 책을 내고, 1992년에는 <살아나는 임진강>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살아나는 임진강>이라는 소설책 하나를 세상에 내놓은 때는 당신 나이 스물여덟입니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는 책을 두 권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나이이면서, 수많은 한국사람으로서는 아직 대학생 자리에 머물 수 있는 나이요, 고등학교만 마친 채 제 일터에서 '열 해째 몸담은' 일꾼으로 지낼 수 있는 나이입니다. 누군가는 이 나이에 아이를 둘이나 셋 낳아 기를 수 있을 테고, 누군가는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떠돌고 갈팡질팡할 수 있습니다.

(2) 책을 생각하고 즐기는 삶이란

<강주헌,권남희,김춘미,송병선,이종인,최정수-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2006)이라는 책을 봅니다. 2006년에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 되돌아봅니다. 그때에는 충북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타고 오가면서 책방마실을 하며 지냈습니다. 때로는 충주에서 대구로 자전거를 달렸고, 하동으로 달리거나 전주로 달렸습니다.

자전거를 달리는 만큼 책읽기는 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찾아간 곳은 책방이었습니다. 책방에서 다리쉼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 자전거를 달렸고, 자전거 달리기를 멈춘 다음에 나자빠졌을 때에 몸을 쉬면서 다시금 책을 붙잡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 여덟 시간 일할 때에 저는 하루 여덟 시간을 자전거에 앉아서 보냈습니다.

.. 번역도 정확하고 충실도도 높은데, 문장이 딱딱해서 영 읽혀지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이 저믄 옮겨진 언어로 자연스러운가, 읽힘새가 좋은가에 관계되는 부분인데, 이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번역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원어의 쓰임새에 물들어 무의식적으로 1차 언어적인 표현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일본어의 경우, 술어의 90%가 수동형 표현이 가능하다. 그래서 일본어를 번역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되어지다', '죽임을 당했다'는 등의 표현을 쓰게 된다. '-에게 있어서' 등의 표현도 마찬가지다. 일본어로는 극히 자연스러운 표현이 한국어로 직역하면 금방 딱딱하고 고풍스러운 말투가 된다 … 번역을 하면서 절감하는 일이지만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음식이든 하여튼 많이 알아야 한다 ..  (107∼109쪽)

번역을 당신 삶으로 받아들인 분들조차 번역을 하면서 당신 스스로도 모르게 번역 말투에 젖어든다고 밝힙니다. 이렇게 밝히는 글에서마저 '입음꼴 말투'인 "언어적인 표현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적습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일 테지요. "말을 하기 때문이다"처럼 적기란 더없이 힘들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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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책들 사이에서 반가울 책을 헤아립니다. ⓒ 최종규

<미우라 아야꼬/임종석 옮김-철길에 핀 꽃>(대한기독교서회,1991)이라는 소설책을 고릅니다. <김정란-거품 아래로 깊이>(생각의나무,1998)라는 산문책 하나를 쥡니다. 1998년에 펴낸 김정란 님 산문책은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습니다. 제가 헌책방에서 만난 <거품 아래로 깊이> 안쪽에는 김정란 님이 ㅊ선배한테 선물로 준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김정란 님한테 선배인 ㅊ님 이 책을 얼마나 알뜰히 읽은 다음 내놓았을까 궁금합니다. 아무튼, ㅊ님이 이 책을 기꺼이 헌책방에 내놓았기 때문에, 판이 끊어져 더는 찾아볼 길이 없는 책을 아주 반갑게 만났습니다. 김정란 님한테는 서운할는지 모르나, 당신이 선물해 준 책은 한 사람을 돌고 두 사람을 거치고 세 사람을 스쳤다가 어느 결엔가 고이 보금자리를 틉니다.

..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담? 1점이라도 더 받아야지. 점수 올려서 대학만 잘 들어가서 안정된 직장만 가지면 그게 전부다 … 청소년들은 청소년들대로 대학입시에 매여 책을 안 읽고, 어른들은 또 어른들대로 당장 먹기 편한 영상매체에 얼이 빠져 있다. 이유인즉슨, 아주 간단하다. 생각하기 싫은 것이다 ..  (63쪽)

예나 이제나 책읽기를 놓고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책읽기를 놓고 오가는 말은 으레 '책을 읽는 사람한테'만 들리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읽기하고 담을 쌓는 사람들한테 울릴 수 있는 말이란, 책읽기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한테 다가설 수 있는 말이란, 책읽기에 이제 막 접어들고자 하는 사람들한테 스며들 수 있는 말이란, 뜻밖에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책읽기를 한다 하여 더 '생각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요, 책읽기를 안 한다 하여 '생각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아닙니다.

.. 아무리 공익적인 메시지를 표방하는 광고라 하더라도, 광고의 최종 목표는 파는 것이다 … 훈 할머니를 이미지로 만들기 위해서 훈 할머니의 실재가, 그리고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았던 무수한 다른 소녀들의 삶이 막 뒤로 사라지고 있다 ..  (112쪽)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어 당신한테 좋은 일이 많기 때문이리라 봅니다.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어 당신한테 무엇이 좋은지 모르거나 책보다 좋은 놀잇감과 일거리가 많기 때문이리라 봅니다. 당신들이 만난 책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면 책 읽기에 깊이 빠져들 테고, 당신들이 만난 책이 한결같이 따분하거나 지루했다면 책 읽기라면 손사래를 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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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찾고 살피는 만큼 좋은 책을 만납니다. ⓒ 최종규


글을 쓰고 책을 엮고 책을 말하는 사람들은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한테 얼마나 더 깊고 너르고 즐겁고 살가운 '책나라'를 들려주고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책 읽기를 안 즐기는' 사람들한테 얼마나 애틋하고 신나고 멋지고 아름다운 책누리를 보여주고 있을까 곱씹어 봅니다.

.. 한가하게 거닐며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가만히, 삶을 칭칭 얽어매고 있는 모든 누더기들을 벗어놓고 정갈하고 맑은 모습의 삶 그 자체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곳. '문화'라는 이름의 자유 공간.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 차 타고 가서 주차시키고 법석 떨고 하지 말고, 그냥 일상의 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오는 문화의 공간이. 그냥 슬슬 걸어다니다가 문득 들어가 쉴 수 있는 곳. 적어도 산책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건 먹고사는 일만큼 중요하다 ..  (224쪽)

(3) 새살이 돋고 새힘을 얻는 책

<허재-허재의 천재농구>(미스터리하우스,1994)라는 책이 보입니다. 어어, 이런 책이 다 있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예전에 이 책을 보았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농구선수로 아주 이름을 날리고 있을 무렵에 나온 책이었으니까요.

이 책에 담긴 글과 이야기를 농구선수 허재 님이 손수 다 썼는지 안 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책끝에 붙은 '허재가 돌아보는 내 삶' 이야기만큼은 허재 님이 손수 쓰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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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는 헌책방에 깃든 책을 살핍니다. ⓒ 최종규

벌써 열여섯 해가 훌쩍 지나간 이야기이니, 허재 님을 선수로 알았을 때와 감독으로 알 때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2010년에 허재 님이 감독으로서 <허재의 천재농구> 고침판을 펴낸다면 어떤 이야기를 덧달아 놓을까 궁금하게 여기면서 당신 지나온 삶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못된 성깔 때문인지 나는 유난히도 매스컴을 많이 탔다. 나를 두고 칭찬도 많은 반면 그 이상으로 비판도 많은 편이다. 경기 스타일에서부터 사생활까지, 매스컴을 거치면 나는 어느새 이상한 인간이 되어 있다. 그동안 애 이름 앞에 붙어 왔던 많은 수식어들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농구천재, 농구의 귀재, 올라운드 플레이어, 농구 9단, 전천후 폭격기 같은 칭찬들 외에도 트러블 메이커, 코트의 불량배란 과히 달갑지 않은 별명들이 나를 따라다닌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국 농수선수는 코트에서 플레이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농구선수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농구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갈 것이고 나는 농구로 내 인생을 승부할 것이다. 나의 변화에는 미수와 웅이의 힘이 크다 … 결혼하고 나서 많이 어른스러워졌다는 소릴 자주 듣는다.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이 사랑하는 아내가 해 주는 밥으로 바뀐 것 외에도 결혼이 가져다준 변화는 상당히 크다. 막상 결혼을 하자 천재라는 수식어에 따라다니던 망나니, 악동의 오명이 부담스러워졌고, 그러한 지적들이 무서운 매로써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농구천재라는 찬사와 코트의 불량배라는 오명을 함께 짊어진 채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괜히 나 때문에 아내까지 욕먹이게 될까 봐 두렵고, 무엇보다 웅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 어느 신문인가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요즘 들어 농구의 참맛은 도움주기에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농구공을 잡은 지 20년 만에 이런 농구의 참맛을 느끼게 된 것 역시도 결혼과 무관하지 않다 ..  (182∼183쪽)

<당진중학교 5회> 졸업사진책(1954)이 보입니다. 충남 당진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태어난 곳입니다. 어릴 때에 당진에 자주 찾아갔고, 책방이든 다른 데에서는 '당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으레 고개가 그쪽으로 갑니다.

해묵은 졸업사진책을 펼칩니다. 잘리고 없는 사진이 많습니다. 졸업반은 모두 세 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졸업사진책을 갖고 있던 분은 당신이 찍은 사진을 따로 붙여서 여미어 놓았습니다. 당진중학교는 지금도 당진에 있겠지요. 지금은 몇 학급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더 늘어났을까요. 세 학급에서 둘이나 하나로 줄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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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나 가슴에 얹는 마음을. ⓒ 최종규

<김용훈-사진의 예술(작가로 되는 길)>(서울신문학원,1959)이라는 책을 봅니다. 글쓴이 김용훈 님은 '리아리즘, 포토몬타쥬, 부루죠아, 리아리티, 구루배, 테레비, 알후렛트 슈데이그릿스, 우이루핼므 와이마, 모티부, 유제느 아드제, 뽀이, 포-트레이트, 보륨, 스타이갱, 루넷싼스' 같은 말을 쓰고 있습니다. 뭔가 좀 얄딱구리하다 싶습니다. 일본책을 고스란히 오려붙인 책이 아닌가 싶은데, 책끝을 보니 "아루스, 最新寫眞大講座, 寫眞의리아리즘, 눈으로보는寫眞史, 寫眞歷史, 寫眞百年史, 世界寫眞史, 빛과 그 諧調, 寫眞의 名作鑑想, 寫眞技術講座" 같은 책이름을 들고 있습니다. 이 책들이 <사진의 예술>을 펴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아무렴.

김용훈 님이 들고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일본에서 나온 책입니다. 글쓴이는 이 일본책에 실린 사진을 오려서 이 책에 붙이고, 이 일본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우리 말로 옮겼구나 싶습니다.

1950년대 우리 사진밭에서는 어찌할 길 없는 노릇이라 할 터인데, 아무리 우리 사진밭이 가난하다 하더라도 우리 깜냥껏 우리 이야기를 북돋우면서 우리 눈길을 갈고닦을 수 없었나 싶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2010년대 오늘날 우리 사진밭을 돌아본다 하여도 아직까지 우리 깜냥껏 우리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거의 언제나 나라밖 사진 이론만 들먹이거나 들춥니다. 지난날에는 일본책을 고스란히 베꼈다면 오늘날에는 미국책이나 유럽책을 고스란히 흉내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힘을 내지 않으니 우리 두 손에 굳은살이 박히기 어렵고, 우리 두 손에 굳은살이 박히지 않으니 우리 깜냥껏 우리 사진문화이든 책문화이든 발돋움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the american sportsman>(A Ridge Press & Amerian Broadcasting Company Publication) 3권 4호(1970)를 봅니다. '아메리칸 스포트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줄여 'as'라고도 하기에 무슨 사진책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사냥꾼 정보지'입니다.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사진을 겉에 쓰고 '스포츠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사냥꾼한테 사냥 정보를 알려주는 잡지가 되는가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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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진책. ⓒ 최종규

책값을 셈하고 책방을 나설 무렵, <金丸重嶺-寫眞藝術>(朝日新聞社,1979)이라는 도톰한 책이 보입니다. 한글판이 아닌 책이지만 '사진예술'이라는 이름이 끌립니다. 무슨 책일까 하고 집어서 들여다보는데 글쓴이 이름이 낯익습니다. '누구였지? 설마?' 하면서 간기를 들춥니다. 카나마루 시게네. 그렇구나. <사진예술개론>을 써낸 한정식 교수가 일본에서 '사진예술'을 배웠다고 하는 그분이구나. 이분 책은 <예술로서의 사진>(해뜸,1988)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옮겨진 적이 있었지. 집으로 와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들춥니다. <寫眞藝術>이 이 책이 맞습니다. 찬찬히 두 책을 견주어 보니, 적잖은 대목에서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번역은 내 운명>이라는 책에서 여러 번역쟁이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렇게 일본 한자말들은 사진이고 문학이고 예술이고 인문이고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채 들어와서 우리 삶 깊숙하게 또아리를 트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말로 우리 학문을 하지 못하고, 우리 글로 우리 사진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4) 세월을 담는 책

책값을 다 셈했지만, 책방 사진을 찍으려고 한 번 더 골마루를 돌아봅니다. 슬슬 사진을 찍으며 책시렁을 곰곰이 살펴봅니다. <조갑제,정호승-김현희의 하느님>(고시계,1990)이라는 책 하나가 눈에 뜨입니다. 조갑제라는 이름하고 정호승이라는 이름이 안 어울린다고 여기는 분이 많겠지만, 1980년대에 전두환 씨와 노태우 씨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월간 조선> 편집부장이 조갑제 님이었고 편집차장이 정호승 님이었습니다. <김현희의 하느님>이라는 책은 <월간 조선> 편집부장과 편집차장이 함께 일구어 낸 땀방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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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최종규

.. 이들(귀순자)을 만나면서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이들도 남한 사회에 사는 다른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그대로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북한에서의 삶이 어쨌건 간에 남한에서의 새로운 삶에 깊게 뿌리를 내리면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키우고 직장생활도 해 나가는 한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었다. 음지적 삶을 살면서 남의 눈에 드러나기를 퍽 꺼릴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이들은 우리 사회에 누구를 만나도 꺼릴 것이 없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김만철 씨와 전철우 씨를 제외하고는 말씨도 서울 말씨와 거의 비슷했으며, 일상어로는 잘 쓰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든가 '우리 대한민국 사회'라는 말을 가끔 쓰기도 했으나 … "어쨌든 당신은 당신의 조국을 배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자신이 진정 조국을 배반했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아홉 명 중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안찬일 씨는 북한에서 귀순자란 곧 변절자를 뜻한다면서, 비무장지대에 근무할 때 남의 월북자를 보고 국군방송에서 "귀순하라, 귀순하라"고 방송하면, 그 말이 "변절하라, 변절하라"는 말로 들려 병사들끼리 서로 웃기조차 했다고 한다 …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애가 어릴 때인데, 하도 장난감 권총을 사 달라고 해서 사 줬더니 아이가 나를 향해 탕탕 하고 총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 아내가 그 애한테 아빠를 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이러더군요. 아니야, 아빠를 쏘는 게 아니고 공산당을 쏘는 거야.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에서 공산당이었는데 싶어, 제가 이 얼마나 비참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안찬일 씨는 또 처가집 조카들이 다니는 국민학교에 반공강연 초청을 받고 교내 VTR방송을 통해 강연을 했다가 크게 후회한 적도 있다. "조카들 말이 이모부가 VTR에 나오는 것을 봤는데, 빨갱이더라는 거예요. 제 생각엔 똑같은 이모부인데, 왜 평소에는 존경을 받다가 북에서 온 이모부다 하니까 무슨 다른 인간처럼 달리 보느냐 싶더군요. 저는 북에서 남한 국군이 인민군을 빨갱이라고 하면 죽이고 싶도록 증오심이 일었는데, 정작 여기 와서 제가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귀에 거슬렸습니다." 안찬일 씨는 "이제 우리만이라도 통일을 위해서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을 안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전에 이북5도청에서 내건 플래카드에 '방심하면 붉은 이리 내려온다'고 써 놓았더군요. 이건 우리 국민에게도 안 좋고 그쪽도 자극하는 백해무익한 말입니다. 예전에 남한에서는 빨갱이들은 머리에 다 뿔이 났다고 했는데, 그러면 북한사람들 머리에 다 뿔이 났습니까. 예전에 북한에서는 배나온 사람이 지주다 하고 교육시켰는데, 그럼 지금 김일성이도 배가 나왔는데 지주입니까." ..  (167∼168, 171쪽, 174∼175쪽/정호승 글)

<김현희의 하느님>이라는 책은 1990년에 나왔습니다. 오늘 <신일서점>에서 함께 만난 <살아나는 임진강>이라는 책은 1992년에 나왔고, 오현호 님이 <식민지의 아들에게>를 써낸 해는 1989년입니다. 비슷한 때에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글을 써서 책을 내는 마음그릇은 사뭇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니 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 다르게 생각한 대로 글을 쓰다가는 다 다른 모양새로 책을 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누가 바르고 누가 틀리다 할 책 또한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다른 삶이요 다른 사람이며 다른 넋이구나 하고 헤아릴 뿐입니다.

오연호 님으로서는 주한미군이 한국땅에서 저지른 범죄를 두 다리로 찾아나서면서 이야기를 적바림하고, 정호승 님으로서는 '귀순용사'를 찾아다니며 이들한테 들은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두 갈래 이야기는 두 갈래 이야기대로 우리한테 여러 가지로 생각하도록 이끌고, 우리 나라를 이루는 여러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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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다 세월 품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 최종규


'도시 빈민선교 현장보고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기독교 대한감리회 선교국,1982)까지 더 고르고 나서 책방을 나섭니다. 집에서 아빠를 기다리는 옆지기가 너무 오래 기다리면 안 되니, 오늘 장만한 책은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서 읽고, 집에서 잠자리맡에 놓고 틈틈이 읽자고 생각합니다. 세월을 이기는 책이 아니라 세월을 담는 책들을 만난 느낌을 제 마음 한켠에 잘 갈무리하고 있다가, 이따 집에 돌아가면 옆지기한테도 이렁저렁 이야기꽃을 피워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는 바로 내가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임을 되새기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듬는 매무새 그대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오랜 세월 꾸준하게 읽힐 책을 간수하는 곳일 수 있으나 '책 하나 처음 세상에 태어날 무렵 이야기'를 소록소록 담아서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도록 쉼터가 되는 곳일 수 있구나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이듯 모든 책은 저마다 아름다운 넋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한테 반갑고 좋고 알맞다 싶은 이야기를 찾아가듯,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책을 반기고 좋아하고 알맞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무엇이 우리를 저마다 즐겁게 하는 아름다움일까요. 무엇으로 우리 삶이 한결 넉넉해지고, 무엇이 있고 없고에 따라 우리 삶은 곱기도 했다가 짓궂기도 했다가 바뀌고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 서울 수유역(화계사) <신일서점> / 02) 908-9552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덧붙이는 글 ― 서울 수유역(화계사) <신일서점> / 02) 908-9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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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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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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