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읽을 책을 장만하는가

[책이 있는 삶 130] 경주에 살고 있으면 책방마실은 어떻게?

등록 2010.03.24 13:31수정 2010.03.2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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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경주에 살고 있으면

 

일 때문에 서울로 마실을 나오면서 헌책방 한 군데쯤은 들를까 헤아립니다. 애써 한 번 나오는 길인데 어디로 가 볼까 어림어림 하다가는 독립문 쪽으로 갈까 신촌으로 갈까 하다가 신촌으로 갑니다. 제 살림집이 서울에 있다면 이곳으로 갈는지 저곳으로 갈는지 망설이지 않습니다. 서울에서는 이곳으로든 저곳으로든 내키는 때에 언제라도 갈 수 있으니까요. 한 주나 두 주에 한 번쯤 서울마실을 하기 때문에 한 번에 찾아갈 수 있는 헌책방은 몇 군데 되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찾아가는 헌책방을 떠올려 봅니다. 인천에도 괜찮은 헌책방이 있습니다. 배다리에 예닐곱 책방이 모여 있고, 부개동에 한 곳이 있습니다. 인천하고 맞닿은 부천 중동역에 또 한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천 부천 헌책방은 인천 부천에서 새로운 헌책을 맞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서울에서 책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서울사람은 서울에서 나오는 새로운 헌책을 맞아들이는 헌책방으로 즐겁고 신나게 마실을 떠나지만, 인천사람이 인천에서 찾아보는 헌책이란 으레 서울에서 들어온 헌책이기 일쑤입니다. 동네에서 새책으로 먼저 팔린 다음 헌책으로 돌고 도는 흐름이 무척 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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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작은 책방이 한 군데라도 있다는 대목은 더없이 고마운 일입니다. ⓒ 최종규

동네에 작은 책방이 한 군데라도 있다는 대목은 더없이 고마운 일입니다. ⓒ 최종규

인천이라는 곳은 공무원과 건설업자가 손을 맞잡고 아파트 아닌 골목동네는 모조리 아파트로 갈아치우는 재개발과 도시재생사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깃들 보금자리는 송두리째 사라져야 합니다. 어쩌는 수 없이 고향을 등져야 하는 판입니다. 아예 잘된 노릇이라고, 이 김에 도시를 훌쩍 벗어나자고 생각하며 춘천으로 갈는지 음성으로 갈는지 경주로 갈는지 고흥으로 갈는지, 방바닥에 지도를 쫙 펼쳐 놓고 꿈을 꿉니다. 꿈을 꾸다가 문득문득 '우리 식구가 경주에 살고 있으면 경주에서는 어느 헌책방을 찾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음성에 살고 있다면 헌책방마실을 바랄 수 있겠느냐 궁금합니다. 고흥에 살고 있다면 헌책방 아닌 새책방조차 만나기 어려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새삼 인천이라는 곳만 해도 서울과 대면 퍽 모자란 헌책방살림이지만, 이만큼 되어도 더없이 고마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서울이야 천만이 넘는 사람이 우글거리고, 둘레에 천만을 웃도는 사람이 바글거리니까, 아주 마땅하게도 커다란 새책방이나 훌륭한 헌책방이 많을 테지요. 인천이야 가까스로 이백만을 넘는 사람이지만, 하나같이 서울에 일자리를 얻어 새벽바람으로 지옥철을 탔다가 깊은 밤에 다시금 지옥철에 낑기며 집으로 돌아올 뿐, 문화나 삶이 오롯이 뿌리내리기 어려우니까, 이러한 판에 책이고 영화고 뭐고 싱그럽거나 튼튼하게 뿌리내리기 힘들 테지요.

 

1983년에 일곱 권으로 옮겨진 <빙점>(미우라 아야코 글,맹사빈 옮김,양우당 펴냄)을 어제부터 읽고 있습니다. <빙점>은 헌책방에서 아니면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는 헌책방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 꽤 많습니다. 도서관에서 갖추지 않고, 도서관에서는 맞춤법이 옛것이라며 버리고, 동네에 가까이 찾아갈 만한 도서관이 없으니, 전국 골골샅샅 헌책방을 누비며 애틋하고 고운 좋은 책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하기야, 유미리님 소설 <가족 시네마>도 진작부터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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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집> 아홉 권 꽂힌 모습을 보면서 지나칠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후줄근해지더라도 장만해야지요. ⓒ 최종규

<초원의 집> 아홉 권 꽂힌 모습을 보면서 지나칠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후줄근해지더라도 장만해야지요. ⓒ 최종규

 ㄴ. 누가 읽을 책인가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쓴 <초원의 집>이 2005년에 새로운 판으로 모두 아홉 권이 옮겨졌습니다. 미국에서 나온 판은 모두 열한 권인데, 이 가운데 <On the Way Home>(1962)하고 <West from Home>(1974) 두 가지는 우리 말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2005년에 아홉 권이 나온 뒤로 다섯 해 동안 다른 소식이 없으니, 아무래도 이 두 가지는 우리 말로 안 나올 듯합니다. 1980년대 해적판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이 이야기를 남김없이 만날 길은 없으리라 봅니다. "Little house on the prairie", 그러니까 우리 말로는 "초원의 집"으로 적었으나 "큰숲 작은집"인 이 이야기책을 모조리 읽고 싶으면 다른 두 권은 영어판을 장만해야 합니다.

 

책방에 이쁘장하게 꽂힌 2005년판 <초원의 집> 아홉 권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영어로 된 책을 읽자면 읽을 수 있으나, 저로서는 이 책을 한글판으로 읽고 싶습니다. 영어판을 읽는 데에 들일 품이 만만하지 않기도 하나, 아이가 크면 아이와 함께 이 이야기를 즐기고 싶습니다. 아이가 영어판을 읽을 더 큰 나이까지 헤아리며 영어판 책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다만, "큰숲 작은집" 이야기를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곁에 둘 수 있을 때 한결 낫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2005년판 <초원의 집> 아홉 권은 자그마치 9만2천 원입니다. 두꺼운 종이를 대고 퍽 좋은 종이를 쓴 아홉 권짜리 책값이 꽤 셉니다. 더없이 좋다고 느끼는 책임에도 배추잎 열 장 가까이 들어야 하는 책 앞에서는 아무래도 망설이고 갈팡질팡할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2005년이 아닌 2010년에 장만하니까 '다섯 해 앞서와 견주면 그리 안 비싼 셈'이라 여길 만한데, 이렇다 하여도 주머니가 후줄근합니다.

 

요즈음은 안 나오지만 1970∼90년대에 분도출판사에서는 '분도소책'이라는 이름으로 자그마한 책을 꾸준히 펴냈습니다. 100쪽 남짓 되는 책을 주머니에 들어가거나 한손에 쥐기 좋도록 작고 값싸게 여미어 내놓았습니다. 꿈 같은 노릇이지만, <초원의 집> 같은 어린이책이 작고 값싸고 가벼운 판으로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가운 노릇일까 싶습니다. 수수하고 이쁘장하고 조촐하고 어여쁘며 아름답고 정갈하며 가벼웁고 값이 눅어, 돈이 넉넉한 사람들뿐 아니라 돈이 적어 힘겨운 사람들 또한 누구나 즐거이 쥐어들 만한 책일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쁘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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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진, 인형하고 바지런히 노는 아이하고 나중에 함께 읽고자 책을 차근차근 장만합니다. 우리 식구는 적금통장 아닌 책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 최종규

책, 사진, 인형하고 바지런히 노는 아이하고 나중에 함께 읽고자 책을 차근차근 장만합니다. 우리 식구는 적금통장 아닌 책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 최종규

아홉 권을 챙겨 들면 꽤나 무거운 <초원의 집> 책값을 셈합니다. 홀쭉해진 주머니와 달리 넉넉해지는 마음자리입니다. 우리 식구는 자동차를 몰지 않으며 기름값이 들지 않으니 책값으로 배추잎 열 장쯤 쓴다 할지라도 여느 사람들 며칠치 기름값밖에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자동차라 하더라도, 자동차 한 대 값이면 <초원의 집> 수십 질이나 백 질 남짓 장만할 만한 돈이 아닌가 싶습니다.

 

옆지기는 "퍽 비싸다고 해도 책값은 하나도 비싸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삶을 알차게 꾸리면 책이란 없어도 되지만, 흙을 사랑하며 지내면 흙이 바로 책임을 깨달을 테지만, 책 또한 함께 사랑하고 싶기에 목돈을 책한테 바칩니다. 적금통장 모조리 없애고 책을 차곡차곡 갖춥니다. 나부터 읽고 옆지기랑 아이하고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책읽기 #책이 있는 삶 #책이야기 #책마을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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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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