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자, 살려고 노력하지 말고

등록 2010.03.26 17:00수정 2010.03.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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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날것으로의 삶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생의 두려움 속으로 거침없이 정진해 들어간 실존 인물 조르바의 삶에 관한 관찰기다. 주인공인 나는 생각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은 엘리트 지식인. 논리도 뛰어나고 통찰력도 풍만한 나는, 그러나 삶의 언저리에서만 맴돌면서 매번 망설이고 주저한다. 그런 나에게 거칠고 투박한 조르바는 일갈한다.

 

"나는 사느라 시간이 없어 글을 쓸 수 없고, 두목은 쓰는 데 시간을 뺏겨 살지 못하는 겁니다… 두목, 당신은 믿으시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말? 어릴 적에 할머니는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나는 한 마디도 믿지 않았어요.그러나, 지금, 나이를 먹은 지금 나이 먹으면 대가리가 물렁물렁해지는 걸까요,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다시 믿기 시작했어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지난 수요일, 벼르고 벼르다가 졸업한 제자와 저녁을 함께 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철기(가명)를 아는 모든 선생님의 칭찬이 자자한 아이. 학교 다닐 때 많이 아프거나 자주 다치지도 않아서 보건실에도 잘 오지 않는 학생이었는데, 어쩌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기라도 할라치면, 90도 인사는 기본일 정도로 인사성이 밝은 철기. 크리스마스, 설, 추석, 스승의 날… 아니, 무슨 날이 아니어도 꼬박 안부 문자를 보냈다. 철기 이야기가 나오면 선생님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너무 성실해서 걱정이다, 저렇게 착해서 혹시나 사회에서 상처나 안 받을까 싶을 정도. 

 

먹고 싶은 것은 뭐든 사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는데, 정작 본인은 감자탕을 먹고 싶다고 해 철기의 단골집이라는 감자탕 집을 찾아 갔다. 주인 할아버지는 학교 잘 다니느냐며 철기를 먼저 챙기셨다. 음식이 나오고 보니, 산더미처럼 쌓인 2인분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여름방학에 하던 아르바이트는 지금도 계속하느냐고 운을 뗐더니, 어머니 병원비 대느라 했었는데, 지금은 학교 수업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로 바꿨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후 8시부터 4시간씩 마트에서 짐정리를 하는데,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받는 급여가 50만원. 30만원은 부모님을 드리고, 매달 3만원씩 올해 고3이 된 여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나머지는 자기 용돈이라면서 씨익 웃는다.

 

한 학기 등록금이 300여만원. 장학금 경쟁이 치열해서 이번에는 장학금을 많이 못 받아서 걱정이라며, 빨리 돈 벌어 갚아야 부모님 짐을 덜어드린다며 어른스런 답변도 덧붙인다. 피곤하겠구나, 한 마디 했더니, 아르바이트 가기 전 잠깐 저녁 시간에 헬스장에 가서 운동도 한다며, 팔만 굵어진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철기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바로 직업 군인이 되겠다며, 진학도 2년제 군사학과로 했다. 요즘은 부사관 시험 공부도 틈틈이 하고 있다는데, 왜 이렇게 대견스러운지.

 

예뻐 죽겠는 내 시선은 아랑곳 않고 조르바처럼 웅얼거린다.

 

'선생님. 요즘 학교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워서 감사합니다. 어른들이 물으시면 두 번 질문하지 않게 답변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배우고 나니, 말씀에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제가 성실하다고 칭찬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은 꼭 지켜야해요.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고, 혹시라도 못 지키면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더니, 친구들이 정말 해본 것 맞느냐고 놀리기까지 하는데, 이제는 저를 많이 신뢰해요. 학교 수업 시간표 바뀐 것도 저에게 묻더라구요. 아, 다음에는 화훼 농원에서 봉사활동을 할 것 같습니다. 장학금이 지급 되는데, 주말에 하루 8시간 정도 일하게 될 것 같아요. 피곤해서 안 하고 싶기도 한데, 저보고 아예 총무를 하라고 맡기셔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몸은 힘들겠지만, 믿고 맡기셨으니 열심히 해야죠.'

 

그날, 나는 감자탕 한 그릇에, 제자에게서 오히려 삶을 배운 것 같은 감동에 휩싸였다. 공부를 잘하고, 재능이 많아야 하고, 스펙이 좋아야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우성을 뚫고, 성실과 감사를 무기삼아 뚜벅뚜벅 직진하는 우직한 철기를 보면서, 그 허튼 논리들을 과감하게 쳐내는 살아있는 몸짓을 마주한 것 같은 전율마저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식료품 상점 주인의 논리로 삶을 대하고, 피상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는 것은 절대 관념화할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3.26 17:00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보건실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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