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다니다가 뇌종양, 치료받다 죽어야죠"

한혜경씨,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심사청구... '업무 관련성' 인정될까?

등록 2010.04.12 18:42수정 2010.04.12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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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11시 산업재해 심사청구를 위해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을 찾은 한혜경(왼쪽)씨가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의 업무를 설명하고 있다. ⓒ 권박효원

12일 오전 11시 산업재해 심사청구를 위해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을 찾은 한혜경(왼쪽)씨가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의 업무를 설명하고 있다. ⓒ 권박효원

이종란(노무사) : "박지연씨 이름은 아시나요? 문상이라도 오시지 그러셨어요."

오세위(근로복지공단 보험급여국장) : "저희가 바빠서…."

이종란: "산재 승인만 했더라도 가는 길이 그렇게 원통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혜경씨는 아세요?"

오세위: "한혜경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이종란: "삼성전자에서 납을 만지다가 뇌종양에 걸렸습니다."

 

삼성전자에 근무한 뒤 뇌종양(상의세포종)에 걸린 한혜경(33)씨와 어머니 김시녀씨,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노무사가 12일 오전 11시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본사를 방문해 관계자들을 만났다. 요양급여를 불승인한다는 처분을 취소하고 증거를 다시 조사하라는 심사 청구를 내기 위해서다.

 

한혜경씨는 이미 시력·언어·보행에서 장애1급 판정을 받은 상황이다. 이날도 어머니 김씨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했다. 혼자서 숟가락질도 못할 정도로 균형감각을 잃었고, 말도 부자연스러웠다. 사물을 볼 때 초점도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뇌종양의 후유증이다.

 

한씨는 삼성공장 기흥공장에서 납을 사용하면서 이런 병이 생겼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미 문제의 공장은 2001년 폐쇄된 터라 유해물질의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상황.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는 지난 1월 "발병 원인이 작업 환경과 업무 관련성이 있다는 근거가 없다"고 판정했다.

 

이 때문에 한씨를 지원하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은 기흥공장 전현직 전체 노동자의 암 발병 실태조사와 작업과정 배기시스템 재조사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 쪽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김시녀씨가 "삼성 말만 갖고 (역학조사결과를 믿고) 있어야겠냐"고 따졌지만, 공단에선 "담당 기관(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역학조사를 정확하게 했을 것"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날 면담에 나선 오세위 보험급여국장은 "산재를 다 승인해주는 게 아니다, 업무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단 이사장을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도 "이사장님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김씨는 결국 면담 도중 눈물을 흘렸다.

 

근로복지공단 "업무관련성 있어야 산재 인정"

 

한혜경씨는 지난 1995년 10월부터 삼성전자 LCD사업부 기흥공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맡은 일은 각 공정에서 조립한 LCD 패널과 구동회로·백라이트 등을 하나의 모듈로 조립하는 공정이었다.

 

입사 3년째인 1998년부터 한씨는 월경이 끊겼다. 얼굴과 목에도 심한 여드름과 홍반이 생겼다.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잠시 상태가 호전됐지만 일이 밀려 주사를 맞지 못하면 다시 월경이 사라졌다.

 

결국 한씨는 2001년 8월 회사를 그만 뒀지만 그 무렵부터 감기가 그치지 않았고 걸음걸이도 조금씩 부자연스러웠다. 퇴사 후 2~3년째부터는 균형 감각이 없어져 자주 넘어졌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등 상태가 악화됐다. 뒤늦게 종합병원을 찾은 한씨는 2005년 10월 뇌종양을 진단받고 곧바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미 한씨의 종양은 너무 커져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담당 의사는 "종양 깊이로 보아 7~8년 전에 발생한 것 같은데 다 제거하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면서 "대체 어떤 일을 했냐"고 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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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11시 산재 심사청구를 위해 근로복지공단을 찾은 뇌종양 환자 한혜경씨와 어머니 김시녀씨, 이종란 노무사(사진 오른쪽)가 오세위 보험급여국장과 면담하고 있다. ⓒ 권박효원

12일 오전 11시 산재 심사청구를 위해 근로복지공단을 찾은 뇌종양 환자 한혜경씨와 어머니 김시녀씨, 이종란 노무사(사진 오른쪽)가 오세위 보험급여국장과 면담하고 있다. ⓒ 권박효원

한혜경씨는 "납 성분의 솔더크림을 반죽하고 잘 저은 뒤 주걱으로 펴서 (제품 인쇄회로기)판에 발랐다"고 자신의 일을 설명했다. 기흥공장에서는 작업자가 솔더크림을 판에 바른 뒤 기계로 부품을 붙이고 판을 통째로 구워서 땜질하는 방식으로 LCD를 조립한다고 한다.

 

한씨는 "솔더크림이 위험하다는 말이나 (안전) 교육은 없었다"고 전했다. 다만 선임자가 그에게 "크림 냄새를 직접 맡지 말고 손에 묻었을 경우에는 IPA(유기용제)로 닦으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업무환경은 고됐다. 주로 3조 3교대 8시간 근무로 휴식이 거의 없었고, 물량이 많아 12시간씩 야간 근무를 할 때도 있었다. 한씨는 맨손으로 크림을 바르기도 했고 손에 크림이 묻는 일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회로기판에 크림이 너무 많이 묻으면 유기용제로 닦아냈다.

 

솔더크림을 바르는 일은 하루에 1~2회였지만, 부품이 잘못 올려진 제품을 바로잡거나 불량품을 식별해 골라내는 것도 한씨의 업무였다. 이를 위해 제품을 가까이 들여다봐야 했는데 그 때마다 납 냄새가 심하게 났다는 주장이다.

 

반올림에 따르면 한씨는 방진의복과 천 마스크, 비닐장갑 차림으로 작업을 했을 뿐이고 근처에 국소배기장치는 없었다고 한다. 공장 내 배기장치가 있었다고 해도 작업자와 납 사이에 설치된 게 아니라면 무용지물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는 전혀 다르다. 한씨가 유해요인에 노출됐으나 지속적이지는 않았고, 설비에 국소배기장치도 설치돼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원은 "뇌종양의 발암요인도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면서, 일부 연관성이 인정되는 납의 경우 암을 일으킬 정도로 노출이 많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날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은 "공장도 없어졌는데 어떤 회사가 발암물질을 인정하겠냐, 이럴 때마다 회사 주장만 믿고 산재를 불승인할 거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근로복지공단 측에 "어떻게 재조사할지 답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공단 측은 "산재심사위에서 판단할 일"이라고 책임을 미뤘다.

 

공장은 이미 사라져... "어떤 회사가 발암물질 인정하겠냐"

 

이미 해당 사업장이 폐쇄된 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어느 쪽이 조사에 나서도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연구원 역시 보고서에서 "실제 작업장을 조사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결국 근로복지공단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어느 쪽의 주장을 더 큰 증거로 보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법적으로도 이렇게 '업무관련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산재를 인정받을 방법이 없지는 않다.

 

그동안의 여러 차례 판례에서 대법원은 "(산재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판결하면서 노동자들이 주장하는 '상당 인과관계'에 손을 들어줬다.

 

지난 2008년에는 백혈병 사망 산재와 관련, "중금속인 납과 유기용제 등이 병을 발생 시킨다는 점이 의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으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화학물질 노출 외의) 다른 원인에 의해 발병했다고 볼 자료도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또한 지난 1995년 대법원은 "뇌종양이 발생한 시점 및 원인은 분명하지 아니하나 무리한 출장근무와 시간외 근무를 거듭해 과로가 누적되고 면역기능이 감소했다"면서 산재 사망을 인정했다. 연구원이 이번 역학조사에서 "뇌종양 발암요인이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 논리다.

 

그동안 한혜경씨는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고 입사 전까지는 어떤 질병도 앓은 적이 없다. 한씨의 가족 중에서도 암 환자는 없었다. 따라서 가장 유력한 뇌종양 발암요인은 삼성전자에서의 화학물질이라는 것이 한씨와 반올림 측 주장이다.

 

김경일 의정부병원 신경외과 전문의와 손미아 강원대 의과대학 교수(산업의학 전문의) 역시 지난번 산재신청 과정에서 "한씨는 19살 어린 나이에 유해 화학물질과 발암물질에 많이 노출되었다"면서 "이로 인해 말초신경장해·중추신경계 기능저하가 초래됐고 결국 소뇌암 발병이 촉진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밝힌 바 있다.

 

"급여도 좋고 환경도 좋다고 해서 삼성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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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11시 딸 한혜경씨의 산업재해 심사청구를 위해 근로복지공단을 찾은 김시녀씨(오른쬭)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박효원

12일 오전 11시 딸 한혜경씨의 산업재해 심사청구를 위해 근로복지공단을 찾은 김시녀씨(오른쬭)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박효원

이날 한혜경씨와 반올림 활동가들의 방문은 "다음에 다시 책임있는 담당자들과 면담 날짜를 다시 잡자"고 합의하는 수준으로 약 1시간 30분 만에 끝났다. 일단 심사청구는 마쳤지만 이들은 여전히 근로복지공단을 믿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 김씨는 "'한혜경을 잘 모르겠다'는 근로복지공단은 지금 뭐하는 거냐"면서 "치료는 하다가 죽어야 하지 않겠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애들 아빠와 이혼하고 둘이 살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얘가 상고 다니다가 삼성에 들어갔다"면서 "엊그제는 얘랑 막다른 생각까지 해봤다"고 말했다.

 

아직도 한혜경씨의 뇌종양은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지난해 12월 이후에는 그나마 재활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 수입이 끊긴 상태에서 한 달에 20만~30만 원 하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한 한씨는 요양급여도 받을 수 없다.

 

한혜경씨는 "급여도 좋고 환경도 좋다고 생각해서 삼성에 입사했다"면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안 갔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해도 갈 사람은 가겠지만 말은 해야죠, 나 같은 사람 생기면 안 돼요"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한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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