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놈아, 니가 아는 사랑도는 사랑도가 아녀"

[자전거 주말여행 10] 지독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섬, 사량도

등록 2010.04.18 11:06수정 2010.04.1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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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에 접안하기 직전. 승무원들과 하선을 기다리는 승객들. ⓒ 성낙선


그 섬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20여 년 전의 일이다. 한 조촐한 담소 자리에서 심심풀이 삼아 우리나라 섬 이름 중에 좀 기이하다 싶은 이름들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주워섬기고 있었다. 그 이름들 중에 '욕지도' '매물도' 등의 이름이 들먹여졌고, 그 끝에 '사랑도'라는 이름이 나왔다. 욕지도나 매물도는 한두 차례 들어본 이름이어서 그리 낯설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도 그 섬의 유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도는 그렇지 않았다. 나 역시 듣기에 처음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도라는 섬이 있다는 얘길 들어보질 못했는지, 그런 섬이 정말 있냐는 반응이었다. 그게 무슨 이어도 같은 섬이냐고 비아냥대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섬 이름을 꺼낸 친구는 끝끝내 자신이 그 섬에 직접 갔다 왔다면서 우리나라에 그런 이름을 가진 섬이 경상남도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고 못박았다. 뭐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부득부득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처음 듣는 섬 이름이긴 하지만 실제 그런 섬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서 그 자리에서는 그냥 대충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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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 관광안내도. 1) 내지 선착장, 2) 여객선 터미널. 노란선이 일주도로 ⓒ 통영시

하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바로 지도를 펴들었다. '사랑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코딱지만한 땅덩어리 옆에 깨알 같은 글씨로 사랑도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글자 어딘가 덤이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랑'에 획이 하나 더 그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사랑도라고 했던 그 섬의 제대로 된 이름은 '사량도'였다.
나는 잠시 허탈했다. 지도를 살피기 전까지 우리나라 섬 중에 '사랑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실제 그런 섬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금방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빠져 들었다. 내 마음 한구석에 우리나라에 그 같은 이름을 가진 섬이 존재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쯤 되면 우리나라에 '사랑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 있다고 박박 우겨대던 친구에게 전화라도 걸어 '야 이놈아, 니가 아는 사랑도는 사랑도가 아녀' 따질 만도 한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녀석이 '사랑도'라고 알고 있는 걸 굳이 아니라고 바로잡아주는 게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고 노래하고 다니던 그 시절, 세상에 '사랑도'라는 섬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친구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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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지마을 항구와 지리산 능선. 산세가 수려하다. ⓒ 성낙선


사량도, 과연 내가 사랑할 만한 섬인가?

그 섬이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게 벌써 수 년 전부터의 일이다. 덕분에 오래 전에 잊혔던 그 이름이 다시 내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사량도는 내가 호락호락 만만하게 볼 섬이 아니었다. 칼 같은 바위 능선을 사람들이 네 발로 기어 올라가는 사진 몇 장을 보고 나서,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능선 양 옆은 수직에 가까운 낭떠러지였으며, 그 아래는 시퍼런 바다였다.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이 마치 등판에 거대한 비늘이 돋은 공룡 등줄기에 올라타 쩔쩔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 발 중 한 발만 잘못 디뎌도 그걸로 끝일 것 같은 험한 산세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었다. 그렇게 해서 그때까지 '사랑'과 흡사한 이름 때문에 상당히 부드러운 느낌으로 남아 있던 그 섬의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네 발 짐승 다루듯이 거칠게 대하는 그 섬은 다분히 동물적이었다. 나 같은 식물성 인간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그런 거친 섬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었다.


자연히 궁금증이 일었다. 무엇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섬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섬 속의 산이, 섬 이름도 아닌 산 이름으로 한국 100대 명산 중에 하나라는 유명세를 누리게 된 것일까? '사랑도'처럼 말랑말랑한 이름이 아니고 '사량도' 같이 딱딱한 이름으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넋을 호릴 수 있었던 것일까?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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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 내지 선착장에서 바라본 일주도로. 코앞부터 언덕이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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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 일주도로. 산허리를 휘감아돈다. ⓒ 성낙선


결국 궁금증이 두려움을 이겼다. 지난 9일, 그 섬에 무작정 자전거를 끌고 들어갔다. 뭐가 어떻게 될지는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았다. 그 섬에 해안을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가 있다는 것만 확인했다. 하지만 그 도로가 어떤 지경인지는 알지 못했다. 인터넷에서조차 정보가 부족했다. 우선 그 섬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본 사람이 많지 않고, 그 사람들 대부분 별다른 정보를 남겨놓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긴장했다.

섬은 원래 산이다. 오죽하면 바다 위로 머리를 불쑥 밀어 올렸겠나? 그러니 대부분 산이 가진 특성을 다 가졌다고 봐야 한다. 그런 까닭에 사량도의 일주도로 역시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산이 험하기로 이름이 나 있어, 그 섬을 이리저리 에돌아가는 도로 역시 그만큼 험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절반 정도는 적중했다. 하지만 그 도로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그렇게까지 아름다울 줄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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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왼쪽)와 하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지점. 양 쪽에 통영에서 떠난 배가 닿는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 성낙선


바다도 절경, 산도 절경, 절경 아닌 곳이 없네

삼천포항에서 떠난 배는 사량도 상도의 내지 선착장에 닿았다. 사량도는 크게 상도와 하도로 나뉜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상도로 향한다. 면사무소도 상도에 있다. 사량도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통영에서 배를 탄다. 사량도 자체가 지역상 통영에 속해 있다. 그러니까 나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배편을 택한 셈이다. 그 큰 배에 관광객으로는, 등산복 차림의 승객 6명과 정체불명의 복장을 한 나를 포함해 모두 7명이었다. 통영에서 사량도로 들어가는 관광객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덕분에 배 안을 내 집처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사량도 일주도로는 90%가 시멘트 포장이다. 길이는 17km. 포장도로라고는 하지만 산길로는 제법 긴 거리다. 경사도 만만치 않다. 당연히 평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게 더 속편할지도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속도를 내기 어렵다. 보통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오르막에서 잃은 속도를 내리막에서 되찾으려고 하는 보상심리가 있는데, 이 섬에서는 그것마저 포기해야 한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다 보니, 내리막에서조차 속도를 즐기기 어렵다. 최소한 이런 점은 미리 알고 떠나야 한다. 급경사가 몇 군데 있다. 하지만 숨이 넘어갈 정도는 아니다. 속도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천천히 끝까지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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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도로 위에서 내려다본 섬과 바위. 올챙이 모양, 거북이 모양. ⓒ 성낙선


사실 사량도에서는 도로 위에서 바라다보는 경치 때문에도 속도를 내기가 어렵다. 오로지 달리는 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중간 중간 도로 위에서 멈춰 서야 할 일이 많다. 사량도는 사방이 절경이다. 산 중턱 도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섬들이 절경이고, 그 위에서 다시 뒤돌아 올려다보는 산 능선이 또한 절경이다. 바다도 절경, 산도 절경, 눈을 들어 바라다보는 곳마다 절경 아닌 곳이 없다. '아~' 하는 높고 긴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이렇게 발길을 붙잡는 경치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거대한 바위가 부채 모양으로 겹겹이 펼쳐져 있는 산세가 매우 수려하다. 이 산의 이름은 지리산이다. 이 산의 정상에서 육지의 지리산이 바라다 보인다 해서 '지리망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그 이름에서 '망'자를 빼고 그냥 지리산이라 부른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지리산이라 부르는 것 같지는 않다.

사량도의 지리산은 육지의 지리산 이상으로 장엄한 느낌을 주는 산이다. 충분히 또 하나의 지리산으로 불릴 만하다. 다만 육지의 지리산이 어머니 같은 푸근한 느낌을 준다면, 사량도의 지리산은 아버지 같이 근엄한 느낌을 주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사량도의 부속섬인 우수도에는 '금강산'이라는 산 이름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사량도 주민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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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 돈지마을 항구. 배를 수선하는 장면. '키(파란색)'가 썪고 낡아 새로 만들고 있다. ⓒ 성낙선


나 역시 이 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침 해가 맑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이다. 바다가 유난히 조용하다. 그 위로 가느다란 물살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통통배마저 없다면, 이곳이 바다라는 걸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고요한 수면 위로 섬 하나가 계속 따라온다. 올챙이 형상을 한 바위섬이다. 둥그런 머리 뒤로 길게 늘어진 꼬리가, 마치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천천히 헤엄을 치고 있는 것 같다.

그 앞에 몸통이 좀 더 커진 섬 하나가 앞서 가고 있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그 섬들이 모두 섬이 아니라, 무슨 고대 생물체 같이 생겼다. 원시성이 살아 있는 섬, 모두 사량도의 부속섬이다. 그 섬들을 벗 삼아 계속 달린다. 인적이 드문 이 거대한 섬에 오로지 나 혼자 도로 위를 달리는데 쓸쓸하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객쩍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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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지마을 언덕 위 밭에 심어진 마늘과 유채꽃.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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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도로 위에서 내려다 본 한 어촌 마을. 그림 같은 풍경. ⓒ 성낙선


섬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내지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데 2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언덕이 많았던 것치고, 그리고 바다와 섬 여기 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한참 시간을 지체한 것치고는 꽤 빨리 돌아왔다. 이 섬을 찾는 등산객들은 보통 아침 7시경 첫 배를 타고 들어와 저녁 6시경 마지막 배를 타고 떠난다. 꼬박 한나절을 걸어야 등산을 마칠 수 있다는 얘기다.

그에 비하면 자전거는 거의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여행을 마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무언가 허전한 감이 남는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동안 쌓인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떠나는 느낌이다. 삼천포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사량도를 바라다보았다.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사량도,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섬이다. 나 역시, 이제 이 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섬 이름으로 '사량도'라는 이름에 붙게 된 것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섬 모양이 뱀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섬의 어디가 어떻게 뱀 모양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힘들다. 그리고 상도와 하도 사이를 빠져 나가는 물길 모양이 뱀을 닮았다는 설도 있고, 심지어는 지리산 옥녀봉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져 처음엔 '사랑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가 나중에 음이 변화해 '사량도'로 굳어졌다는, 그냥 웃어 버리기엔 너무 진지한 이야기도 있다. 다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다. 그러니 너무 지명이 생긴 유래에 골몰하지 않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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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 되돌아가는 배 위에서 바라다 본 모습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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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를 떠난 배 위에서. 와룡산 아래 삼천포항으로 들어가는 배 ⓒ 성낙선


#사량도 #지리산 #지리망산 #자전거여행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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