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고 빨래하고 책읽는 마음

[책이 있는 삶 132] 지식 아닌 삶으로 받아들일 책읽기

등록 2010.05.03 12:16수정 2010.05.0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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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글을 쓰는 마음

 

제 아무리 훌륭한 책을 읽었다 할지라도 이 책 하나를 이야기하는 글은 곧바로 써낼 수 없습니다. 고작 쓴다는 글이라고 해 봐야 '이 책 참 대단히 훌륭합니다'쯤입니다. 참으로 훌륭하다고 하는 책을 이야기하려는 글이라 한다면 '이 책 참 훌륭하다'라고 밝히지 않으면서 넌지시 아름다움이 무엇이요 훌륭함이 무엇이며 참됨이 무엇인가를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 하나로 내 삶부터 어떻게 거듭나거나 달라지고 있는지를 낱낱이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온누리에 가득한 숱한 책느낌글을 읽거나 살피면서 내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일이 퍽 드뭅니다. 낯이 간지러운 부추김글은 널렸어도, 낯이 환해지는 보살핌글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을 읽은 넋이라면 좋은 삶을 가꾸는 좋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서 좋은 글을 써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좋은 책을 읽고도 좋은 글을 일구지 못한다면, 이이는 좋은 책을 읽지 못한 셈입니다. 좋은 책에 깃든 좋은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노릇입니다. 좋은 책이 왜 얼마나 어떻게 좋은가를 느끼지 못한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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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증조 할아버지 앞에서 볼펜을 다부쥐게 쥐고는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를 빼놓고는 무엇을 그리는지 알아채지 못하지만, 아이가 증조 할아버지 앞에서 볼펜을 쥐고 끄적거리는 모습 하나로 둘레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베풉니다. 글쓰기란 글에 담긴 줄거리뿐 아니라 글을 쓰는 매무새 모두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최종규

아이는 증조 할아버지 앞에서 볼펜을 다부쥐게 쥐고는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를 빼놓고는 무엇을 그리는지 알아채지 못하지만, 아이가 증조 할아버지 앞에서 볼펜을 쥐고 끄적거리는 모습 하나로 둘레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베풉니다. 글쓰기란 글에 담긴 줄거리뿐 아니라 글을 쓰는 매무새 모두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최종규

책느낌글을 쓸 때마다 저 스스로 지나온 내 모습을 모두 내려놓습니다. 백 꼭지에 이르는 책느낌글을 썼다면 백 꼭지째 책느낌글은 첫 꼭지째 책느낌글하고 견줄 수 없는 제 알찬 삶입니다. 왜냐하면 첫 꼭지부터 백 꼭지까지 모두 백 차례에 이르도록 거듭나고 탈바꿈을 해 왔으니까요. 오백 꼭지째 글을 썼다면 오백 차례 새로 태어난 셈이요, 즈믄 꼭지째 글을 썼으면 즈믄 차례 다시 태어난 셈입니다.

 

그런데 이냥저냥 대충대충 얼렁뚱땅 글을 쓴다 해서 늘 거듭 태어나는 셈이 아닙니다. 참되고 착하고 곱게 살아가며 글을 써야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셈입니다. 다 읽은 책이라 할지라도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와 제 손가락이 홀가분하게 움직이며 글을 쓸 때까지 기다리고 견디고 삭입니다. 두 번 읽어야 하는지 세 번 읽어야 하는지, 다 읽고 곰곰이 되씹으며 한 해를 보내야 할는지 두 해를 지내야 할는지 가만히 기다리고 참으며 녹입니다.

 

자랑하려고 읽는 책이 아닌 만큼, 자랑하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내세우려고 사들이는 책이 아니듯이, 내세우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우쭐거리고자 들먹이는 책이 아니라, 우쭐거리고자 들먹이는 글이 아닙니다. 제 모두를 쏟아 읽으면서 제 모두를 씻어 보듬으려는 책이면서 글입니다. 제 발걸음을 디뎌 생각하면서 제 삶자락을 추슬러 살아내려는 책이면서 글입니다.

 

덜 읽었으면 마저 읽어야 하고, 덜 삭였으면 다시금 삭여야 하며, 덜 느꼈으면 더 느끼도록 애써야 합니다. 쌀을 씻어 알맞게 불 때까지 기다리고, 불린 쌀이 알맞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잘 지은 뜨거운 밥이 알맞게 식을 때까지 기다리며 밥술을 듭니다. 한 번 더 마음을 쏟을 줄 안다면, 내 손아귀에 쌀알이 들어오는 길을 돌아볼 터이고, 두 번 더 마음을 쏟을 줄 안다면, 내 손에 낫자루와 괭이자루를 쥐어 땅을 일구어 나락을 얻으려 할 터이며, 세 번 더 마음을 쏟을 줄 안다면, 내 목숨을 이어 주는 고마운 바람과 물과 흙과 해 모두를 사랑하며 엎드려 절을 할 테지요. 책읽기란 삶읽기이고, 삶읽기는 삶쓰기인 글쓰기로 이어집니다.

 

 

ㄴ. 빨래하는 마음

 

이 옷을 누가 입는가 헤아리며 손빨래를 합니다. 이 옷을 입는 사람이 사는 터전은 어떠해야 좋을까 곱씹으며 비빔질을 합니다. 빨래할 때뿐 아니라 밥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밥을 누가 먹는가 생각합니다. 이 밥을 먹는 사람은 어떻게 기운을 얻으며 살아가면 좋은가 돌아봅니다. 내가 쓰는 글은 누가 읽으라고 쓰는 글인가를 되뇌어 봅니다. 내 어줍잖은 글 하나를 읽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어떤 생각으로 펼쳐 나가면 좋은가를 가만히 톺아봅니다. 빨래하는 마음은 밥하는 마음이고, 밥하는 마음은 걸레질하는 마음이며, 걸레질하는 마음은 아이를 안고 동네마실을 하는 마음이요, 아기수레 아닌 어버이 품으로 아이를 보듬는 마음은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으려는 마음입니다.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으려는 마음은 애써 글 한 줄 쓰려는 마음이고, 애써 글 한 줄 쓰려는 마음은 호미질 하는 마음입니다. 호미질 하는 마음은 바느질 하는 마음이고, 바느질 하는 마음은 설거지를 하고 내 어버이 등과 허리를 부드러이 주무르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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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돌보며 책을 읽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아이는 제 엄마 아빠가 책을 읽지 말고 저랑 놀아 주기를 바라니까요. ⓒ 최종규

아이를 돌보며 책을 읽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아이는 제 엄마 아빠가 책을 읽지 말고 저랑 놀아 주기를 바라니까요. ⓒ 최종규

 

ㄷ. 책을 읽는 마음

 

잘난 사람이 쓴 잘난 책을 읽으면 잘난 마음이 어떤 모양새인가를 느낍니다. 못난 사람이 쓴 못난 책을 읽으면 못난 마음으로 어줍잖게 우쭐거리는 얼굴이 어떤 빛인가를 느낍니다. 고운 사람이 쓴 고운 책을 읽으면 고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느낍니다. 착한 사람이 쓴 착한 책을 읽으면 내 낯이 붉어지기보다 내가 걸어갈 착한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느낍니다. 큰소리치는 겉치레 사람이 쓴 큰소리에 물든 겉치레 책을 읽으면 이런 겉치레와 큰소리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느낍니다. 수수하고 투박하게 살아가며 수수하고 투박하게 엮은 책을 읽으면 내 삶이 어느 만큼 수수하거나 투박한가를 돌아보며 내가 가꿀 내 삶이 어떤 결일 때에 즐거울까 하고 곱새깁니다.

 

이름있는 아무개가 쓴 책이라 해서 더 잘나거나 더 못나지 않습니다. 이름없는 저무개가 쓴 책이라 해서 덜 떨어지거나 덜 여물지 않습니다. 이름있는 출판사 책보다는 뜻있는 출판사 책을 고를 때가 한결 아름답지만,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뜻있는 출판사가 품는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읽는 눈이 퍽 얕습니다. 스스로 뜻있게 살림을 꾸리지 않는다면 겉껍데기 뜻인지 속차림 뜻인지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나부터 뜻있게 살아가고 있어야 뜻있는 출판사에서 땀으로 일군 뜻있는 책을 알아보며 기쁘게 장만하겠지요.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사람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옆지기와 짝을 짓습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온누리를 살피고 책을 알아보며 고갱이를 받아먹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결이 한껏 깊다면 한껏 깊은 책에 서린 넋을 읽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결이 몹시 얕다면 몹시 얕은 책에 덧발라 놓은 사탕발림에 속아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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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들 마음은 어떤 지식부스러기를 넣으려는 마음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고루 어우러 놓는 아름다운 마음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 최종규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들 마음은 어떤 지식부스러기를 넣으려는 마음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고루 어우러 놓는 아름다운 마음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 최종규

우리는 신영복 님 책을 읽을 노릇이 아니라 신영복 님 삶을 받아들일 노릇입니다. 법정 스님 책을 찾아 읽으려고 아둥바둥거릴 노릇이 아니라 법정 스님 삶을 살펴 받아안을 노릇이에요. 이 땅에는 신영복 님이나 법정 스님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는 한편, 이분들처럼 이름이 높지 않으면서 거룩하고 훌륭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도록 조용히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이름을 스스로 낮추어 사람들 앞에 잘 뜨이지 않으면서 당신 둘레 삶자리를 아름다이 여미는 몸짓을 제대로 읽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용한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찾자면 우리부터 조용하고 아름다이 살아야 하는데, 우리들은 조금도 조용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가용 제발 버리라고 그토록 외친 권정생 할아버지인데, 권정생 할아버지를 찾아갈 때에 시외버스나 기차로 안동역에 내려서 걸어걸어 고개를 넘어간 이는 몇 사람이었을까요. 당신하고 마음벗이었던 이오덕 할아버지를 빼고 꾸준하게 낮은걸음으로 찾아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북돋운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자가용을 단단히 붙잡을 뿐 아니라 크고 빠르고 비싼 차에다가 아파트 열쇠까지 주렁주렁 매달면서 권정생 할아버지 책, 이를테면 <몽실 언니>이든 <하느님의 눈물>이든 <우리들의 하느님>이든 떠받든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으랴 싶습니다. 덧없는 몸부림이고 돌아오지 않는 산울림입니다.

 

반 고흐 책을 읽으면 반 고흐가 되어야 할 노릇입니다. 미우라 아야코 책을 읽으면 미우라 아야코가 되어야 할 노릇입니다. 류영모를 읽으면 류영모가 되어야 할 노릇입니다. 반 고흐와 미우라 아야코와 류영모를 지식조각으로 머리에 집어넣는다고 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신영복 님 책이든 법정 스님 책이든 그토록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 하지만 이 나라에 아름다운 사람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책을 읽는 마음이 처음부터 그릇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마음을 참되고 착하고 곱게 추스르지 않고, 너무 일찍 책을 장만해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쿠리 영감은 네 주제를 알라고 했다는데,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들 주제를 알고 당신들 주제를 빛낼 길을 걸으며 책을 삼키는 사람은 더없이 드뭅니다. 책을 읽으려면 가난해야 하고, 가난해지면 내 이웃이 보이며, 내 이웃이 보인 다음에는 내가 서 있는 터전과 자연을 알아챕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2010.05.03 12:16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책읽기 #책이야기 #책이 있는 삶 #권정생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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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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