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풍자는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연극 <비언소>를 읽는 암울한 시선

등록 2010.05.04 15:52수정 2010.05.0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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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풍자극의 혁명가 두로프 서커스 공연에서 고양이와 함께 있는 두로프 ⓒ TIME


S#1 두로프의 돼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연극이론의 역사는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희생제의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극에서 최근의 상황극까지 극의 원류와 서사의 방식을 묻자면, 깊이와 넓이가 방대해진다. 1988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제목에 끌려 한 권의 책을 샀다.


<어릿광대의 정치학-두로프의 돼지>란 책이었다. 저자 조엘 쉐흐터는 예일대학교 연극원 교수로서 당대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연극'의 역사를 연구했다. 책에는 근대에 들어, 독재자에 저항하는 어릿광대, 두로프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의 마지막 전제군주 빌헬름 2세가 황제로서 위세를 떨치던 1907년 블라디미르 레오니도비치 두로프라는 러시아인 광대가 독일에서 반역죄를 선고받고 추방되었다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는 돼지를 길들여 연극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영어 이야기를 잠깐 하면 영어에도 시어 중에 'helm'이란 단어가 있다. 황금투구를 뜻하는 단어인데, 어의 변용을 통해 지금은 배를 운전하는 조타장치란 뜻이 있고, 나아가 지배권, 지배적 권리란 뜻이 있다. 러시아 출신의 광대 두로프는 서커스 링 위에 독일 장교의 모자-그가 헬름이라고 부르던-를 올려놓았고, 훈련받은 돼지는 그것을 가지러 달려갔다.

두로프는 복화술을 이용하여 마치 돼지가 'Ich will helm' 즉 '나는 군모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Ich Wilhelm' 즉 '나는 빌헬름 2세이다'라고도 해설될 수 있었다. 돼지가 당시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된 것이었다. 두로프. 그는 연극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인물이다. 그는 '나는 어릿광대의 왕이다, 결코 왕의 어릿광대가 아니다'란 말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왕은 노발대발했다. 왕의 즐거움을 위해 유희와 공연을 벌어야 할 서커스단의 광대가, 투쟁의 목소리를 낸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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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언소> 중 예술을 둘러싼 권력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장면 ⓒ 극단 차이무


그의 연극적 비전은 광대의 몸짓을 통해 시대의 주류에 저항하고, 약자를 돌보는 메시지를 담는 것이었다. 이런 정신은 이후 브레히트나 피스카토르, 남미를 중심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연극' 이론을 정립한 아우구스또 보알까지 이어진다. 연극은 항상 시대의 거울로서, 당대를 반영한다.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작품은 대부분 황제를 위해 재상연되는 작품들이었다는 점이다. 궁정은 광대들에게 국고를 통해 재정지원을 했고, 이에 대한 보응으로 '현실적 인식'이나 약자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데 옹색했다. 요즘같이 정치풍자가 관철되기 어려운 시절이 있을까? 오죽하면 개그 프로그램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작은 멘트 조차도 문제시 삼는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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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언소>중 한 장면 ⓒ 극단 차이무


S#2 B언소-비언소의 전통을 이어가는 우리시대의 정치극

96년. 영화배우가 된 송강호가 등장한 연극 <비언소>. 고 박광정씨가 연출을 맡았다. 초연할 때, 이 작품을 봤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B언소>로 제목까지 변경했다. 내가 보기엔 B란 단어가 B급 문화나, 혹은 플랜 B(대안)이란 뜻으로 느껴져서, 새로운 느낌이다. 비언소. 빨리 읽으면 변소다. 무대 전면에는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변소칸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들락거리며 시대에 대한 회환을 쏟아낸다.

삶이 힘겨운 월급쟁이며, 그를 다독여 주는 듯, '욕심없어요'를 강조하는 기득권 층의 작가, 허경영을 닮은 남자, 화장실 청소부 등, 많은 인원이 들락날락 거리는 비언소. 내복을 입으면 실내온도가 올라가 에너지 절약에 도움이 된다며 확성기를 들고 쉴새 없이 떠드는 남자도 있다. 소속은 행정안전부다. 4개의 화장실을 중심으로 '권력'을 향한 예술의 자리를 논하는 이들이 나온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의 입장은 바뀌고 서로를 헐뜯는 자들. 바로 예술이란 담론을 통해, 권력을 행사해온 그 '누군가'의 집단과 개인을 지칭하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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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비언소>중 허경영 후보를 연상시키는 이가 나와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 극단 차이무


관객을 향해 말을 내뱉고, 화장실의 물을 내리면, 한번의 에피소드가 끝난다. 비언(蜚言)이란 무엇인가? '이리저리 퍼뜨려 세상을 현혹하게 만들거나 아무 근거 없이 떠도는 말'이다. 그렇다면 '비언소(蜚言所)'라는 조어에는 비언이 종횡무진 교차하는 장소란 뜻일 터. 화장실의 저급낙서를 본 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마치 이 연극이 '말의 연극'이면서도 그 말들이 정제되지 못한 채 일부러 허공을 떠돌게 연출된 것. 그 자체가 바로 이 작품의 특징이다.

연극 <비언소>는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을 콜라주로 묶어 제시한다. 27개의 상황이 등장한다. 문제는 극 속 상황이 에피소드식으로 나열되면서,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균열된 틈을 메워가며 독해해야 할 의무를 관객에게 '툭' 던진다는 거다. 그래서 어지럽다. 촌철살인 대신 현란한 말의 만화경만 보일 뿐. 비언소는 언어가 비 언어가 되는 곳이며, 언어의 소통이 차단된 곳이다.  말 그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사회의 단면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화장실이란 배경을 통해 이를 배설하고 토해냄으로써, 다시 한번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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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언소>중 화장실 청소부의 코믹한 연기 ⓒ 극단 차이무


시인 박상우의 <상소리 해부도>가 극중에 나온다.

개 같은 새끼에 대하여 개 같은 새끼는 개새끼 까지는 안되고 개와 비슷한 사람 새끼이고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새끼이고 또 개같은 새끼는 개새끼的인 너무나 개새끼的인 사람새끼고 개새끼가 개새끼化된 사람새끼이고 개새끼와 이란성 쌍생아인 사람 탈만 쓴 사람새끼이다

참 시인의 그럴듯한 말장난도, 이제는 다소 힘이 부쳐보인다. 감각적 언어와 강한 욕설이 난무하는 시대, 무대 속 언어는 정제의 수준을 거치며, 오히려 지배자의 손아귀에 쥐어진 '설득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연극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우리에게 '부끄러워해야 할' 지점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 부끄러움은 반드시 일회성 행사나 일시적 감정의 쏠림으로 끝나선 안된다.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연극이란 제의의 화목제는 끝이 난다. 분명 친숙한 상황이건만, 연극무대에 오른 사회적 상황들은 왠지 낯설다. 낯설기에 더욱 빠져들기도 하고, 심드렁한 태도를 취하며 무대 위 상황을 즐길 수도 있다. 어떤 쪽을 택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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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언소>중 한 장면 ⓒ 극단 차이무


극장을 '관객을 교화시키는 무대'라고 보았던 브레히트. 그 기저에는 저항의 복화술을 보여준 두로프의 땀방울이 맺혀있다. 여기에는 국가의 지원없이, 관객에게 관람료를 징수, 자립할 수 있었던 연극의 방향성도 한몫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은 정부의 재정지원이 없이는 살림이 어렵다. 이런 시대에, 정부를 향해, 자신들에게 밥과 국거리를 던져주는 손을 물기란 쉽지 않다.

두로프가 꿈꾸었던 건 바로 '상황의 민주화' 즉 권력의 일시적 재분배다. 그 상황을 통해 관객들은 비로소 자신의 나라의 왕이되며, 고쳐야 할 사회적 모순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상황극 <비언소>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꿈꾸는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돼지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요즘은 구제역 때문에 소들이 고생이라지) 문제는 상황 속에 놓여진 우리들의 삶은 여전히 암울하다는 것이다.

화장실 물 내리듯, 그렇게 해결될 수 있는 사회적 상황들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날이 올까? 지금같이 서울문화재단과 문광부의 재정지원이 없이는 연극 한편 올리는 게 불가능 할 정도로, 정극의 관객들이 줄어든 세대에, 연극은 과연 무엇으로 이 시대의 아프고 병든 속살을 찟고, 새살의 꿈을 꿀 수 있을까? 이 모든 건 결국 관객들의 자발성과 동참이란 교조적인 답 이외엔 나 또한 내놓지 못하겠다. 미안하다. 시대가 너무 유감이다.

ps. 연극<비언소>는 혜화동의 아트원 차이무 극장에서 2월 5일 공연을 시작 5월 2일자로 끝을 마쳤습니다. 때늦은 감은 잊지만 이렇게 리뷰를 올린 것은 우리시대, 여전히 정치풍자의 칼끝을 벼리기 힘든, 시대의 면모들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뷰에도 송고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뷰에도 송고하였습니다.
#비언소 #정치풍자 #두로프의 돼지 #박상우 #상소리해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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