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도 안 먹고 접대도 안 받고

청백리와 의적 두루 만나는 장성 '박수량 백비'와 '홍길동 테마파크'

등록 2010.05.07 14:23수정 2010.05.0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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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 선생 백비. 청백리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 있다. ⓒ 이돈삼

박수량 선생 백비. 청백리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 있다. ⓒ 이돈삼

 

6월 2일 실시될 지방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선거분위기도 달아오르고 있다. 후보등록도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선거 입후보 예정자들은 누구보다 깨끗한 사람이고, 또 청렴하게 봉사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도 당선이 되면 부패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일쑤다.

 

공직자들의 부패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요즘 언론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는 '스폰서검사' 사건은 부패의 연결고리가 얼마나 질긴지 잘 보여주고 있다. 뇌물 수수, 공사나 인사 비리 등으로 옷을 벗는 공직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각종 비리로 옷을 벗은 지방자치단체장도 부지기수다. 지방의원도 수십 명에 이른다.

 

모두가 유권자들이 단추를 잘못 꿴 결과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모든 선의 원천이며, 모든 덕의 근본'이라고 했다.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노릇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나서려는 후보자는 물론 선거운동원 그리고 유권자들까지도 한번쯤은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전라남도 장성에 있는 '박수량 선생 백비'가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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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 선생 백비를 만나러 가는 길.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백비가 서 있다. ⓒ 이돈삼

박수량 선생 백비를 만나러 가는 길.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백비가 서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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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는 일반적인 비석과 크기가 비슷하다. 단지 글자만 없다. 동행한 예슬이가 백비를 살펴보고 있다. ⓒ 이돈삼

백비는 일반적인 비석과 크기가 비슷하다. 단지 글자만 없다. 동행한 예슬이가 백비를 살펴보고 있다. ⓒ 이돈삼

 

'백비(白碑)'는 말 그대로 흰 비석이다. 일반적으로 비석에는 그 사람의 이름과 직위, 업적 등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다르다. 글자라고는 한 자도 없이 온통 하얗게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고 대충 세워놓은 것도 아니다. 잘 다듬어져 있다. 비석의 크기는 대략 높이 130∼140㎝, 폭 40∼50㎝ 정도 된다. 보통의 비석과 비슷한 크기인데 단지 글자만 없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범상치 않은 비석이다.

 

이 백비는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한 박수량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나라에서 내린 것이다. 직사각형의 대리석 위에 호패 형태의 비신을 올리고 비문의 내용을 새기지 않았다. 그래서 '백비'라 이름 붙었다. 전라남도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돼 있다.

 

비석의 주인인 박수량 선생은 요즘 말로 오랜 세월 고위 공직에 몸을 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접대도 안 받고, 뇌물도 안 받았다. 물론 부정한 뒷거래도 없었다고 한다. 무려 39년 동안 고위공직자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생은 죽는 순간에도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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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 선생 묘지 풍경. 앞으로 펼쳐진 들 끝자락에 홍길동테마파크가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박수량 선생 묘지 풍경. 앞으로 펼쳐진 들 끝자락에 홍길동테마파크가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청빈한 삶을 살았던 박수량 선생은 조선 중기인 1491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서 태어났다. 23세에 진사, 35세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한성판윤, 전라감사, 좌찬성지중추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렇게 고위 공직을 거치면서도 사사로이 재물을 취하지 않았다.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살았다.

 

그가 죽은 후 남긴 유품이 당시 명종 임금이 하사했다는 술잔과 갓끈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얼마나 청빈한 삶을 살았는지 그에 얽힌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나라에는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를 다하는 그의 고매한 인품이 어쩌다 임금의 귀에까지 전해졌단다. 명종 임금은 사실 확인을 위해 암행어사를 두 차례나 보냈는데, 돌아온 대답은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얘기가 전부였다고.

 

오죽했으면 선생이 죽은 후 장례비용도 없을 정도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명종 임금이 장례비용을 하사해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서해안 바닷가의 돌을 골라 비를 하사했다. 후손들은 당연히 그 비(碑)에 무엇을 새길 것인가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공적을 나열하기보다 아무 것도 새기지 않고 그냥 묘 앞에 반듯하게 세워놓았다고 한다. 비문(碑文)을 새기는 게 오히려 선생의 생애에 누(累)가 될까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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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 선생 백비를 만나고 내려가는 길. 돌계단 아래가 바로 주차장이다. ⓒ 이돈삼

박수량 선생 백비를 만나고 내려가는 길. 돌계단 아래가 바로 주차장이다. ⓒ 이돈삼

 

하긴 그런 분의 업적을 요약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설픈 글로 찬양하는 것이 오히려 누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선거 입후보자의 홍보물이나 명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보잘것없는 공이나 직위일지라도 크게 치장하는 게 요즘 세태다. 그런데 이름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게 더 귀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이름을 만세에 남긴 셈이 됐다. 그는 청백리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벼슬과 공적은 물론 이름마저 새기지 않은 백비는 또 오늘날 청백리를 상징하는 유물이 됐다. 요즘 공직자와 각종 선거에 나서려는 후보자들이 정말 본받아야 할 삶이다.

 

박수량 선생 백비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다. 금호리는 홍길동생가와 홍길동테마파크가 있는 아치실마을을 지나서 만나는 마을이다. 장성읍에서 황룡면 방면으로 필암서원과 홍길동테마파크를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홍길동테마파크와 박수량백비 이정표도 간간이 세워져 있다. 호남고속국도 장성나들목에서 박수량 백비까지는 자동차로 대략 10∼15분이면 거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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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테마파크 안에 있는 홍길동생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과 부친의 형상이 서 있다. ⓒ 이돈삼

홍길동테마파크 안에 있는 홍길동생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과 부친의 형상이 서 있다. ⓒ 이돈삼

 

박수량 선생 백비를 찾아가는 길에 만나는 홍길동테마파크도 가볼만 하다. 거기에는 홍길동 생가와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전시관엔 홍길동의 실존을 뒷받침해주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활빈당원들이 생활했던 산채도 만들어져 있다. 망루, 의적의 집, 당수의 집 등이 있다.

 

홍길동은 소설의 주인공이다. 장성군의 노력에 의해 발굴된 장성 출신의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홍길동은 역사에서 반역자 또는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을 건설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홍길동축제도 열리고 있다. 7일 시작된 홍길동축제는 9일까지 계속된다. 홍길동테마파크와 유채꽃이 활짝 핀 황룡강변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홍길동 인물 재현극, 홍길동의 산채인 활빈당 체험, 율도국 군사체험, 전통 활쏘기와 홍길동 의상 체험, 목검 무술 등 다채로운 볼거리와 체험프로그램으로 준비된다.

 

가까운 곳에 있는 축령산 편백나무 숲 체험도 빼놓을 수 없음. 축령산자연휴양림은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반듯하게 줄지어 쭉-쭉- 뻗어있는 곳. 가족끼리, 연인끼리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기에 정말 좋다. 방향성 물질인 피톤치드가 가장 왕성하게 뿜어져 나온다는 봄. 피톤치드로 활력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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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필암서원. 입구에 우뚝 선 확연루 풍경이다. ⓒ 이돈삼

장성 필암서원. 입구에 우뚝 선 확연루 풍경이다. ⓒ 이돈삼

 

필암서원도 지척이다. 필암서원은 호남 지방 유학의 거두였던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과 그의 제자인 고암 양자징을 배향하고 있는 곳.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피해를 보지 않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적 제242호로 지정돼 있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고문서와 인종이 하서에게 하사했다는 묵죽도, 하서유묵 등 60여건의 자료가 남아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황룡전적지도 이 고장이었다. 동학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박수량백비와 홍길동테마파크, 동학전적지, 필암서원이 있는 장성 황룡면은 청백리와 의적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고장이다. 먹을거리가 조금 부실한 게 흠이라면 흠. 면단위 시골마을인데다 청백리와 의적이 살았던 곳인 만큼 먹을거리가 부실해도 애교로 넘길 수 있다.

 

홍길동테마파크 앞에 꿩요리 전문점이 있을 뿐이다. 차분히 음식을 즐기려면 축령산자연휴양림 입구 추암마을이나 장성읍으로 나가야 한다. 홍길동테마파크에서 그리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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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탑. 동학농민혁명 당시 치열했던 황룡전투를 기념해 세워졌다. ⓒ 이돈삼

동학혁명탑. 동학농민혁명 당시 치열했던 황룡전투를 기념해 세워졌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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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테마파크 전경. 의적 홍길동이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을 사료로 증명하고 있는 곳이다. ⓒ 이돈삼

홍길동테마파크 전경. 의적 홍길동이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을 사료로 증명하고 있는 곳이다. ⓒ 이돈삼

2010.05.07 14:23 ⓒ 2010 OhmyNews
#백비 #박수량 #청백리 #홍길동테마파크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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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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