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어린이를 안 찍는 한국 사진쟁이

[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52] 마이클 오브라이언, <한국소녀 지훈>

등록 2010.05.09 14:29수정 2010.05.0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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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ael F.O'Brien, < Chi-Hoon, a Korean girl >(Caroline House,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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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최종규

겉그림. ⓒ 최종규

 

지난 1986년에 일본 '가이세이사(偕成社)'에서 서른네 권짜리 묶음책 <世界の子どもたさ>를 낸 적 있습니다. <온누리 어린 동무들>이라는 이름을 붙인 묶음책은 사진으로 온누리 여러 나라 아이들 삶과 학교살이와 마을살림을 보여줍니다.

 

일찍부터 사진 문화가 튼튼히 뿌리내리고 널리 퍼져 있던 일본인 만큼, 백과사전을 사진으로만 엮거나 문화인류학을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동식물도감을 사진으로 선보이는 일은 흔합니다. 일본을 비롯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두루 읽힐 만한 높은 눈높이와 알찬 줄거리와 빛나는 짜임새로 더없이 사랑받곤 합니다.

 

이런 책들은 1980년대 끝무렵까지 한국땅 출판사에서 몰래 사들여 요모조모 자른 다음 몰래 붙여넣기를 하며 '한국판 백과사전'이나 '한국판 문화인류학 책'이나 '한국판 동식물도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나라안에 손꼽히는 출판사뿐 아니라 크고작은 출판사마다 이런 일본 사진책과 도감과 백과사전을 훔쳐서 꽤나 짭짤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ㄷ출판사 자료실에서 갖추고 있다가 오려 쓴 자국이 남은 <世界の子どもたさ> 한 권을 헌책방에서 찾아 보면서, 이 ㄷ출판사가 지난날에 훔쳐먹기로 책을 펴내어 번 돈으로 오늘날에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아찔합니다. 지난날에 일본 사진책을 오려서 훔쳐쓴 출판사치고 오늘날에 알차고 아름다운 길을 걷는 출판사를 만나기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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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 최종규

속 사진. ⓒ 최종규

 

지난 1991년에 한국 웅진출판사에서 <世界の子どもたさ>를 정식계약해서 <세계의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붙인 다음 펴냅니다. 정식계약 번역판이 나온 뒤로는 이 일본 사진책에서 오려붙이기를 하는 일은 사라졌으리라 봅니다. 이러면서 우리 나라에서도 '한국 어린이'뿐 아니라 '나라밖 어린이'가 어떤 삶을 꾸리고 어떻게 학교를 다니며 어떤 이웃 동무하고 어떻게 놀고 있는지를 들여다볼 자리를 얻습니다.

 

<세계의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옮겨진 서른네 권짜리 묶음책은 꽤 사랑받다가 이제는 판이 끊어졌습니다만, 헌책방에 전질로 들어오든 낱권으로 들어오든 오늘날에도 두루 사랑받습니다. 어느덧 스물다섯 해쯤 묵은 예전 책이라 할 터이나, 야무지고 훌륭하게 엮은 책이기 때문이요, 2010년 오늘날 한국땅에서 이보다 '나라밖 어린이'를 찬찬히 살피며 알려주는 책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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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한국 아이를 다룬 사진책을 펴낸 한국 사진쟁이는 얼마나 될까요. ⓒ 최종규

여느 한국 아이를 다룬 사진책을 펴낸 한국 사진쟁이는 얼마나 될까요. ⓒ 최종규

 

지난 1993년에 마이클 오브라이언이라고 하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미국사람'이 <Chi-Hoon, a Korean girl>이라는 사진책을 펴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아직 초등학교 이름이 아닌)에 다니는 '김지훈'이라는 계집아이 한삶을 다룬 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을 묶은 마이클 오브라이언 님은 한국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요, 바지런히 한국땅과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으며, 지난 1981년에는 <Far-Reaching Fragrance>(용인기획)라는 영어 이름을 붙이고 '멀리 풍기는 내음'이라는 한글 이름을 붙인 사진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인도를 사랑하는 분들이 인도 삶을 다룬 사진책을 내고,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본 골목을 다니며 사진책을 내듯, 마이클 오브라이언 님은 한국사람 '여느 삶'을 사진으로 담아 나누기를 즐겼습니다. <한국소녀 지훈>은 바로 마이클 오브라이언이 '당신과 같은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땅 여느 사람 삶을 알아보고자 할 때에 길잡이가 되게끔 하려는' 사진책이요, 한국땅 서민 삶을 문화인류학으로 보여주는 책이라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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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녀 지훈>에 나오는 아이는 서울에서 제법 잘 사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제법 잘 사는 여느 아이'이든 '가난한 여느 아이'이든 있는 그대로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담아낸 한국 글쟁이 그림쟁이 사진쟁이는 퍽 드뭅니다. ⓒ 최종규

<한국소녀 지훈>에 나오는 아이는 서울에서 제법 잘 사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제법 잘 사는 여느 아이'이든 '가난한 여느 아이'이든 있는 그대로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담아낸 한국 글쟁이 그림쟁이 사진쟁이는 퍽 드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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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 최종규

속 사진. ⓒ 최종규

 

그런데 1993년에 미국사람 마이클 오브라이언 님이 <한국소녀 지훈>을 펴내는 날까지 한국땅 어느 사진쟁이도 '한국땅 여느 어린이 삶'을 통째로 들여다보고 가까이 지내고 찬찬히 마주하면서 사진으로든 글로든 담아내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이원수 님이 애틋한 동시와 동화를 쓰고, 이오덕 님이 어린이 글쓰기 교육을 일구는 눈부신 열매가 있으나, 사진밭에서만큼은 '한국 어린이'를 한국 어린이답게 바라보면서 담은 사진책이 없어요. 더구나 1993년 뒤로 2010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이든 인천이든 부산이든 목포이든 무주이든 이 땅 골골샅샅에서 저마다 다른 터전에 걸맞게 다 다른 말씨와 문화와 삶자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자라나는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안승일 님은 열 해를 송두리째 바쳐 <굴피집>이라는 아름다운 사진책을 엮었으나, 강원도 사진쟁이 가운데 굴피집이든 너와집이든 '여느 사람 여느 살림집'을 기나긴 해에 걸쳐 어깨동무하면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는 예술쟁이가 없습니다. 김기찬 님은 서울 중림동을 둘러싼 골목동네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기는 했어도 '골목동네에 놀러온 사람 눈길'로 사진을 찍었지 '골목동네에 사는 사람 눈길'로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최민식 님은 '인간 군상', 그러니까 '사람들 무리'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만, '한 사람이 흘러가는 발자취'를 톺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멈춘 학교 달리는 아이들>을 내고, 동요에 붙인 사진으로 <노래가 하나 가득>(김녕만)과 <현이네 집>(최시병)이 있고, 산골학교 아이들 사진을 담은 <분교, 들꽃 피는 학교>(강재훈)가 있으나 여느 한 아이 삶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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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 최종규

속 사진.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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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 최종규

속 사진. ⓒ 최종규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진은 참으로 많습니다. 앞으로 퍽 많은 사진쟁이들은 지난날에는 찾아볼 수 없던 놀랍고 새로운 만듦사진을 꾸준히 선보이리라 봅니다. 사진학과 교수님과 사진비평을 하는 분들 또한 이러한 만듦사진 이야기를 잔뜩 쏟아내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가 두 다리를 우뚝 서서 살고 있는 '내 동네 이야기'와 '내 동네 이웃 이야기'와 '우리 아이 이야기'와 '우리 아이 동무 이야기'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살갑게 살며시 마주하고 껴안고 어루만지고 보듬으면서 묶어낼 예술쟁이들 꾸덕살 박힌 땀맺힌 손길이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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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 최종규

속 사진.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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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 최종규

속 사진.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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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 최종규

속 사진.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사진책 #사진 #사진읽기 #책읽기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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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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