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착기와 집사람의 닮은 것들

[시랑헌에서 부르는 나와 집사람의 노래 37]

등록 2010.05.17 18:15수정 2010.05.1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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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낭화 황금의 계절인 5월 인지라, 시랑헌 사방에 꽃이 피어 "나 여기 있오!" 하지만 한가하게 들여다볼 겨를이 없다. ⓒ 정부흥


집사람과 굴착기


36년 전에 집사람과 결혼하여 지금까지 숱한 사연을 만들고 엮어가며 살아간다. 집사람은 결혼 초기에는 이성으로, 애들을 기를 때는 동고동락의 동반자로, 나이 든 요즈음은 수행도반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긴 하지만 그 위력은 언제나 절대적이다.

4년 전, 지리산 임야를 남은 여생을 위한 터전으로 잡았다. 야산이 삶터가 될 수 없어 다듬고 가꾸려고 보니 꼭 필요한 것이 덤프트럭과 굴착기이다. 집사람 반대가 심해 굴착기는 내 승용차를 처분하는 조건으로 동의를 받았다.

집사람은 굴착기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굴착기를 대여하여 사용하라는 것이다. 처음엔 미운 털 박힌 오리새끼였던 굴착기가 상머슴 몇 사람 일을 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집사람 인식이 달라졌다. 특히 뚝딱하고 자갈밭을  밭으로 만들어 농사지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도로 아래 터를 텃밭으로 만들면서 인식이 완전히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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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가 된 텃밭 쇠스랑을 단 굴착기를 믿고 작년에 비해 많은 종류와 많은 량의 농사를 지을 계획을 세웠지만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많은 장해가 있었다. ⓒ 정부흥


야산과 밭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밭은 흙이고 야산은 굵은 호박돌과 자갈이 대부분이라는 것. 경운기를 갖고 있는 이웃에게 도로 아래 터를 경운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돌이 많은 야산을 경운하면 삽 날이 모두 망가지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밭으로 사용하고 싶으면 먼저 돌을 골라내고 퇴비나 쇠똥을 수 십 차례 지표면에 뿌려 우선 밭의 기본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집사람은 일손을 빌리는 일을 싫어한다. 우리가 시랑헌에서 하고 있는 농사일은 경제적인 면만 고려한다면 성립 자체가 불가하다. 일을 즐기며 쉬엄쉬엄 하며 건강을 지키자는 목적에 반하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품삯을 지불하고 같이 일하면, 나도 집사람도 이웃들과 같이 쉬고, 같이 일해야 한다. 농사일을 해본 경험이 적은 우리들에게는 무리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시골은 모두 아는 사람들이고 사소한 사건도 본말이 전도되어 와전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들의 한계이고 딜레마이다.

쇠스랑 굴착기

굴착기를 프랑스 회사에서 개발할 때 용도는 땅을 파고, 고르는 것이었을 것이다. 내 장비는 모두 집 짓는 전동공구나 산을 가꾸는 임업 장비다. 굴착기와 1톤 덤프트럭이 농사 장비로 효율성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밭의 돌을 골라내고 갈아 엎는 용도로 사용할 만한 장비는 굴착기와 트럭뿐이다.

경운기는 나이 든 사람에게 위험하고 트랙터는 너무 비싸 200여 평 밭 농사를 짓기 위해 구입한다면 너무 큰 낭비라는 생각이다. 철공소에 가서 밭을 파 엎고 돌 고를 수 있는 쇠스랑을 설계하여 주문 제작하였다. 제작에 드는 비용이 중고 경운기 구입가격 정도의 경비가 들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굴착기가 불평 없이 일만 하는 상머슴이 되었다. 밭 일의 진도가 척척 나아간다. 밭에 널린 숱한 자갈들을 굴착기에 부착한 쇠스랑으로 두 번 골라내고 작년에 만들었던 유기질 퇴비와 농협에서 구입한 퇴비를 섞어 뿌리고 다시 한번 터를 고르면서 도랑을 만들었더니 작물을 심을 만한 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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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스랑 굴착기 공사판에 있어야 할 굴착기가 농사일을 거들어야 할 입장이 되다보니 쇠스랑을 달고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고 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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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착기 쇠스랑 굴착기 운전 기술 중 땅을 평탄하게 고르는 일이다. 굴착기 쇠스랑 작업은 이 작업을 위한 훌륭한 훈련이 되었다. ⓒ 정부흥


농사의 신의 경지에 올라야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멀칭의 비법도 집사람과 낑낑대면서 몇 번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두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가장자리를 흙으로 덮고 나니 만족스럽다.

쇠스랑을 장착한 듬직한 일꾼 굴착기가 상머슴으로 나섰고, 어려워 불가능 해 보였던 멀칭을 우리의 손으로 하고 나자 '이제 우리도 농부다'라는 자만이 고개를 든다. 도로 아래 밭에 토란 두 고랑, 감자 세 고랑, 땅콩 세 고랑, 고구마 아홉 고랑, 옥수수 네 고랑을 심었고 호박도 네 구덩이 심었다. 시랑헌 본 집터 텃밭에도 토마토와 고추를 몇 고랑씩 심었다.

농사에 대한 경험이 없거나 극히 적다. 인터넷 기사 한 두 편 읽거나 이웃으로부터 얻어들은 귀동냥 지식이 전부다. 주말에만 돌볼 수 있다는 시간의 한계 때문에 농작물을 최선을 다해 심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것으로 여겼다. 수확량이 많고 적음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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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 텃밭 오래 전부터 텃밭으로 사용해 온 곳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오다보니 실제로 수확 기회가 짦아 항상 손해 본 듯한 농사가 됬다. ⓒ 정부흥


기염을 토해가며 심긴 심었지만 다음날에는 대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농작물을 강한 햇볕에 일 주일간 생존 시키는 문제가 무겁게 밀려온다. 더구나 다음주는 친구 딸 결혼식이 있다.

오후 6시가 지났다. 앞으로 한 두 시간 안에 이 넓은 밭에 그늘막을 만들 수 없다. 땅속 깊이 말뚝으로 구멍을 뚫고 주전자로 줄 수 있는 최대량의 물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조명장치를 동원하여 물 주는 작업을 시작했고 마치고 나자 저녁 12시가 넘었다.

고구마를 비롯한 농작물을 심는 일은 내가 선택할 수 있으나 심어 논 작물에게 물을 주지 못해 볕에 고사시키는 일은 내 임의로 결정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농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다. 집사람은 허리 통증 때문에 밭고랑을 기어 다니면서 구멍을 내고 물을 줬고, 나도 허리가 끊어질듯한 통증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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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 인동초는 하얀꽃이 많지만 시랑헌 인동초는 붉은 색을 띄고있다. 꽃은 피기 전이 아름답고 지고나면 아름다운 만큼 추하다. 인생역정의 축소판이다. ⓒ 정부흥


결국 3일 후, 대전에서 150 km 길을 되돌아와 절반 정도 말라 비틀어진 고구마 밭에 새벽 해뜨기 전과 오후 늦은 시간을 이용하여 물을 줬다. 믿었던 굴착기는 시랑헌에서 트럭에 싣고 온 물통을 옮기는 일을 거들었다.

작년에는 고구마를 세 고랑 심었다. 3일 간 매일 물을 줘 겨우 활착시키고 여섯 상자 수확했다. 지인들과 친척들에게 선물하고 우리는 상처 났거나 쥐꼬리보다 가는 자투리 고구마 한 상자를 먹어야 하는 조금은 슬픈 경험을 했다. 올해는 두 줄씩 아홉 고랑이니 18줄이다. 50상자는 수확해야 한다는 조급한 생각이 빚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어둠을 손전등으로 물리치며 주전자로 물을 줘야 했던 나는

'농사는 도(道)며 상식이다.'

라는 말을 수 백 번 읊조려야 했다.
#귀촌 #쇠스랑 #굴착기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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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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