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들은 탁월한 재무관리 전문가였다

[가정경제119] '아나바다'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등록 2010.05.20 11:18수정 2010.05.2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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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아버지의 월급날은 온 가족이 손꼽아 기다리던 즐거운 날이었다. 가계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있던 어머니에게는 가족이 다음 한 달을 살아갈 수 있는 금쪽 같은 '봉투'를 받는 날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이튿날 평상시에는 구경하기 힘든 '특별한' 아침상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였던 날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가정이 외벌이 구조였던 시절, 아버지의 월급이 가족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소득원이었던 탓에 어머니들은 꼼꼼하고 빈틈없이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쓸 곳은 많은데 월급은 늘 쥐꼬리였기 때문에,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필요한 용도에 따라 월급을 쪼개서 쓸 수 있는 '효율적 자산배분'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은 탁월한 재무관리 전문가들이었다. 이 여성 재무부장관들은 각각의 쓰임새 별로 '이름표'가 붙은 봉투를 따로 만들어 그 안에 돈을 넣어두었고, 할당된 예산 규모에 맞추어 살림살이를 운영했다(각각의 쓰임새란 식비, 피복비, 교육비, 아버지 용돈, 경조사비, 비상예비자금, 저축(곗돈) 등 가정경제 운영을 위한 사용처 즉, 계정과목을 말한다).

만일 다음 월급을 받기 이전에 봉투 안에 있는 돈이 모자랄 것이 예상되면, 어머니들은 망설임 없이 지출을 줄였다. 먹거리봉투에 돈이 부족하면 반찬 값을 줄였고, 교육비봉투에 돈이 떨어질 것 같으면 몽당연필을 재활용하라는 지침을 아이들에게 하달했다. 또 미리 예상치 못했던 특별지출이 발생했을 경우, 비상예비자금 봉투를 열어 충당하는 등 '합리적인 지출흐름 통제'를 몸소 실천해왔던 것이다.

추정컨대, 우리 어머니들이 갖고 있던 이러한 재무감각은 그 이전 세대들로부터 대물림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농경민족이었던 조상들의 '유전적 형질'과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견뎌야 했던 '절약의 지혜'를 어머니의 어머니 또는 어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수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들 모두는 선조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 터득한 소중한 삶의 지혜들을 재해석하고 복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유전적 형질이란, 농경민족 특유의 라이프사이클(Lifecycle)과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면 다음 추수기까지 최장 1년간을 한정된 자원(수확한 작물)으로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자산할당 계획(Asset Sharing Plan)'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계획하는 삶'의 DNA가 피 안에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절약의 지혜란, 예를 들어 할머니 세대들이 뒤주에서 꺼낸 쌀의 일정 양을 덜어내어 별도의 항아리에 담아둔 다음 밥을 지었던 습관 같은 것을 말한다. 형이 쓰던 물건을 동생이 다시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도회지에 산다 해도) 집에서 직접 콩나물을 재배했으며, 된장 고추장을 만들어 먹었다.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검약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터득한 크고 작은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의 지혜들은 생활 곳곳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상품의 과잉과 탐욕적 소비로 파생된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지구를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는 지금의 현실과 비교해보라. 과거 어머니들의 검소했던 삶은 단지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궁핍한 삶의 흔적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의 효용을 이끌어내기 위한 건강한 재무관리, 낭비 요소를 최대한 없앤 훌륭한 자원 재활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모습은 어떤가? 이제 가족들에게 월급날은 더 이상 기쁜 날이 아니다. 은행계좌에 월급이 입금됨과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빚잔치'가 시작된다. 주택담보대출, 신용카드 결제대금, 자동차 할부금 등 과거에 저질러놨던 소비지출 상환이 끝나고 나면, 통장은 빈털터리가 되기 일쑤다. 많은 사람들이 벌어서 잘 쓰는 삶이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벌어야 하는 전도(顚倒)된 '순환구조' 안에 갇혀 있다. 목적과 수단, 의의와 방법이 뒤바뀐 삶을 산다.

지금 우리는 어머니 아버지가 살았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삶은 그다지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은 미처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한 채, 전자결재 시스템 안에 숫자로 표시되었다가 이내 사라진다. 벌어들인 소득의 규모는 더 이상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얼마를 벌든, 직업이 무엇이든 우리들 중 다수는 계획과 소비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어제 저질러놓은 욕망의 배설물을 오늘 치우는 가불인생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지켜왔던 절약과 검소의 소중한 전통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소비 중심의 사회는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기며, 나아가 욕망 그 자체를 조작함으로써 사람들을 빚의 거미줄로 밀어놓는다(이 과정에 신용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개입된다). 지금 우리들은 '신용과 소비'라는 날줄과 씨줄로 구성된 거대한 소비 네트워크(Network) 안에서, 빚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채무노예'의 신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 여론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물건은 모두 '필요해서' 사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생활필수품'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구입한 물건이 필수품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만일 집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지난 1년간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보면 된다(사용하지도 않는 물건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소유욕에 불과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필요와 욕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소비 그 자체를 삶의 필수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심각한 최면에 걸려있다. 잡동사니와 쓰레기를 쌓아놓고 살지만, 여전히 쇼핑을 즐기고 새로 나온 신상품에 매료되어 지갑 속에 있는 '플라스틱 괴물'을 습관적으로 꺼낸다. 소비의 유혹은 물리치기 어려울 만큼 강하고, 이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의식의 전환과 결단이 필요하다.

소비의 역설이란 '소비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강박성 획득 장애'에서 벗어나 비(菲)소비자로서의 긍지를 되찾는 것. 무소유의 높은 철학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 아님을 깨닫고 필요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는 것을 뜻한다. 강렬한 욕망은 필요와 욕망을 동일시하는 착시(錯視)를 일으키지만, 선택된 소비와 절제된 욕망은 소비의 만족을 극대화한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선택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그 시점에 이르러, 비로서 당신은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생활 속에서 터득한 작고 소박한 실천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위였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절약의 실천이란, 단순히 가난에 대한 소극적 대처가 아니라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자발적 빈곤(Voluntary Simplicity)이며, 상품과 재화의 효용가치를 최대화하기 위한 생태학적 자각(Ecological self-consciousness)이었던 것이다.

적게 소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우월할 수는 없으나, 천박한 물신주의에 빠져 늘 더 많이 소유하지 못해 안달하고, 남보다 덜 가진 자신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바보가 되는 것보다는 천 배쯤 나은 길이다. 누군가로부터 끊임없이 '소비 당하는' 객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소비하는' 주체로 살아갈 것인가? 어쨌든 선택은 당신 몫일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일관성을 버려라. 당신 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니.


#소비 #절약 #필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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