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 유럽모델인가 남미모델인가

유럽과 남미, 사민주의와 사회주의

등록 2010.05.21 17:23수정 2010.05.2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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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필자가 생각하는 답부터 얘기해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진보는 당연히 '우리식'이어야 한다. 우리는 남미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모델과 남미모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우리식' 모델을 찾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사민주의로 일컬어지는 유럽의 진보적 모델과 21세기 사회주의로 얘기되는 남미의 모델은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 진보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민과 경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유럽모델과 남미모델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할 텐데, 사실 유럽의 사민주의 모델도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의 복지정책을 쓰고 있고,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베네수엘라 등의 남미 좌파정부에서도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의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사민주의와 사회주의, 이렇게 용어만 다를 뿐 추진하는 정책은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그러면 그다지 차이가 없는가?

사민주의(유럽)와 사회주의(남미)는 최종목표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는 인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일 것이다. 인민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민이 권력을 가지는 것일 텐데, 권력을 가지는 것이란 구체적으로 국가주권(정치권력)과 생산수단(경제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틀어쥐어야 진정한 사회의 주인이 되는 것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사민주의와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갈리게 된다.

사민주의 세력이 선거를 통해 국가주권(정치권력)을 획득하게 되면 이들의 목표는 가진 자들에게 중과세를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지혜택을 주는 것이다. 이것 자체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목표는 여기까지이다. 소수의 기득권층이 틀어쥐고 있는 생산수단(경제권력)을 인민의 품안으로 가져오는 조치들을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권력은 기득권층의 손아귀에 그대로 존재한다. 이들은 절반의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반격의 시기에 자신들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경제 위기 때 복지가 축소되고 기득권층의 입김이 강해지는 것은 아직 그들에게 절반의 권력이 있고 언제든지 정치권력을 다시 탈환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를 통해 국가주권을 획득하게 되면 이들은 단순히 기득권층으로부터 세금을 더 걷는 정도로 양보를 얻어내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기득권층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인민의 품안으로 가져오는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그것에 바로 남미의 21세기 사회주의 세력이 강하게 추진하고 있는 핵심 산업의 '국유화' 조치들이다. 사회주의 세력의 목표는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온전히 인민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민주의 세력이 자신의 발걸음을 멈춘 그곳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들을 준비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권력의 요소가 모두 인민의 것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기득권 세력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유럽모델과 남미모델, 즉 사민주의 모델과 사회주의 모델의 차이는 최종목표지점을 어디로 보고 있느냐의 차이이다. 유럽이나 남미의 진보적 국가들이 추진하는 복지정책들이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은 그들이 어느 수준까지는 비슷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의 사민주의 모델이 멈춘 지점이 남미 사회주의 모델에서는 더 많은 권력을 인민이 쟁취하기 위한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말하고 싶다. 유럽과 남미의 두 모델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의지가 있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식'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주간 <진보정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주간 <진보정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유럽 #남미 #사민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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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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