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번 읽을 책값 9800원

[책이 있는 삶 135] 책값과 삶값과 사람값

등록 2010.05.22 13:49수정 2010.05.2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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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비싸구려 책이 있고 꽤나 싸구려 책이 있습니다. 비싸구려 책이라 해서 사기 어렵거나 싸구려 책이라 해서 사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둘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먹고살기 넉넉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 둘레에서 먹고살기 넉넉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치고 저보다 벌이가 적거나 저보다 작은 집에서 살거나 저보다 손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머니가 변변하지 못한 주제에 마음을 사로잡는 책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장만합니다. 돈벌이가 시원찮은 주제에 마음을 살찌우는 책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마련합니다. 집하고 도서관 달삯을 낼 때마다 갤갤대는 주제에 마음을 건드리는 책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사들입니다.

 

그림책이든 만화책이든 사진책이든 글책이든, 저한테 좋은 책이기에 기쁘며 좋은 마음으로 사서 읽고 꽂아 놓으며 바지런히 다시 끄집어 내어 읽습니다.

 

장만한 책을 한 번만 읽는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어줍잖은 책이라 할지라도 세 번은 읽습니다. 꽤 괜찮은 책이라면 서른 번은 읽는다 할 만하고, 아주 훌륭한 책이라면 즈믄 번은 읽는다 할 만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성경책을 끼고 살곤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 아저씨 가운데에도 성경책만 되풀이해서 읽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그야말로 얼핏 보면 '골수 예수쟁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며 얘기를 나누면 '살가운 이웃'입니다. 당신들이 성경책을 끼고 사는 까닭은 당신들한테 성경책처럼 수백 수천 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아름답고 훌륭한 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늘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쓰는 글과 책이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거룩하거나 훌륭한 글이나 책이 되리라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글과 책이 나한테 성경책과 같도록 땀을 흘리고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을 바쳐야 한다고 꿈꿉니다. 한 번 글을 쓸 때마다 수없이 깎고 다듬고 고칩니다.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쓰고 손질하고 가다듬습니다. 책으로 내놓는다면 다시 읽고 거듭 읽으며 다듬어 놓습니다. 책으로 찍혀 나오면 옆지기와 나란히 찬찬히 되읽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저 스스로 제 글을 읽으며 웃음을 짓거나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 내 글을 읽을 때에 내 웃음과 내 눈물을 자아내지 못한다면 내 글은 더할 나위 없이 엉터리라고 느낍니다. 나부터 내 글을 애틋하게 여기고 살가이 돌볼 수 있을 때에, 내 둘레 사람들한테 '이 글도 한 번 읽어 주셔요' 하고 내밀 만합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제 글이 성경책처럼 거룩하거나 훌륭하지 못할지라도 성경책과 다름없이, 또는 성경책과는 또다른 테두리에서 거룩하거나 훌륭할 수 있도록 내 삶을 추스르고 다스리면서 글로 엮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어느 애 아버지께서 책값 9800원을 못 쓰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따로 대꾸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생각합니다. '참 아름다운 이런 책을 아이들한테 사서 읽히는 한편, 어버이 또한 함께 읽으면 아주 좋답니다. 책값 9800원을 쓰면 살림살이가 엉망이 되시나요? 책값 9800원이라고 하지만, 이 대단한 그림책은 한 번이 아니라 즈믄 번은 볼 책이에요. 즈믄 번을 보는 책이라 하면, 이 책을 장만한 값은 10원이 안 됩니다.'

 

온누리에 비싼 책이란 없습니다. 온누리 모든 책은 제값을 합니다. 십만 원짜리 책이라 할지라도 백 번을 되읽는 책이라 할 때에는 천 원을 치르고 산 책입니다. 즈믄 번을 되읽는 책이라 하면 고작 백 원을 치르고 산 책일 테지요.

 

우리 식구 가운데 저부터 즈믄 번을 읽고 옆지기가 즈믄 번을 읽으며 아이가 즈믄 번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책값이 얼마나 싼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렇게 온 식구가 즈믄 번씩 읽은 책은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아이한테 사랑스러울 옆지기를 만나 저희네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도 보고, 또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새로운 옆지기를 만나 새로운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도 볼 터이니, 얼마나 값싸고 고마운 책이 될까요.

 

참말 책값처럼 싸디싼 값이 없습니다. 참으로 책값처럼 적은 돈을 들이며 마음을 살찌우고 북돋우며 일구는 빛줄기가 없습니다. 참 책처럼 적은 돈으로 사랑과 믿음을 일깨워 따스하고 넉넉하도록 도와주는 스승이란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2010.05.22 13:49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책읽기 #책값 #책 #책이 있는 삶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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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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