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놀며 읽는 책

[책이 있는 삶 138] 길을 거닐며 새기는 책

등록 2010.06.10 15:06수정 2010.06.1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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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길을 거닐며 새기는 책

 

스물석 달째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아이가 낮잠을 다문 십 분이든 삼십 분이든 자 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물석 달 동안 이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아점을 먹고 살살 졸릴 무렵 그예 잠들어 주면 낮에 한결 기운차고 신나게 놀 수 있으며 밤에 깊이 잠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밤에 깊이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금 싱그러우며 기운차게 놀 수 있고, 하루하루 이런 나날을 되풀이하면서 튼튼하고 씩씩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습니다.

 

우리 딸아이는 도무지 낮잠을 자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밤잠이 길지 않습니다. 새벽 여섯 시 무렵에 어김없이 깨어나려 하는데, 요사이 하루하루 낮이 길어지고 새벽이 일찍 찾아오니 벌써 다섯 시 무렵부터 깰려고 옴쭐옴쭐합니다. 바깥이 하얗게 밝아 오면 저도 잠에서 깨려고 부시럭거립니다. 애 아빠로서는 아이가 잠들어 있는 새벽녘이 조용히 일할 애틋한 때이기 때문에 으레 새벽 너덧 시에 홀로 살며시 일어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글조각 하나 겨우 끄적일 무렵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아빠!" 하고 부르며 찾으면 "아이구!" 소리가 절로 터져나옵니다.

 

오늘도 우리 아이는 어김없이 낮잠을 건너뜁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어 아이를 데리고 바깥마실을 나옵니다. 졸릴락 말락 하니까 한 시간쯤 걸리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아이는 아빠 품에만 안기려 하고 걷지를 않습니다. 이 녀석 졸리기는 무척 졸린가 보네. 그러나 잠들지도 않습니다. 자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이렇게 두 시간 반쯤 낑낑거리며 땀 뻘뻘 흘리는 골목마실을 하노라니 비로소 곯아떨어집니다. 아이가 곯아떨어지고서야 집으로 가자고 생각합니다. 이제 아빠도 아빠 일을 해 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곯아떨어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힘들며 더딥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가까스로 집에 닿습니다. 애 아빠는 더없이 고단하여 찬물로 한 차례 씻은 다음 아이 옆에서 잠들지도 못하고 딱히 아빠 일을 하지도 못합니다. 멍하니 앉아 책조차 못 펼칩니다.

 

며칠 앞서 우리 친형이 산티아고로 떠났습니다. 쉰 날 남짓을 다니는 나들이길이라고 하며 떠났습니다. 떠나는 길에 우리 식구한테 살림돈을 두둑히 보태 주었습니다. 한 달 반치 달삯에 이르는 돈을 주었습니다. 요사이 '산티아고 순례자'가 많이 늘었고 '산티아고 순례기' 책이 꽤 많이 나온다는데, 우리 형은 어떤 마음과 뜻으로 먼 나들이길을 떠나는지 궁금합니다. 먼 나라에서 낯과 물이 선 사람들 사이를 뚜벅뚜벅 거닐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받아먹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형은 형한테 주어진 삶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으며, 형한테 주어진 길을 어떤 매무새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형으로서는 곧 마흔 줄 나이에 접어듭니다.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라든지 <중년 이후>라는 책을 쓴 소노 아야코 님은 나이가 젊을 때에는 젊은 대로 좋고, 나이가 들 때에는 나이가 드는 대로 좋다고 밝힙니다. "사람도 물건도 살아 있는 생물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든가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그러한 존재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소중한 의무인 것이다(92쪽)" 하고 <중년 이후>에서 밝힙니다. 먼길을 땀흘려 걷노라면 형은 형대로 저는 저대로 우리 삶을 알뜰히 사랑할 몸짓 하나 익힐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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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하고 책을 읽으면서 그림을 하나하나 짚고 무엇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나중에 혼자서 책을 넘기면서 스스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빠한테서 배운 말을 웃으며 따라합니다. ⓒ 최종규

아이하고 책을 읽으면서 그림을 하나하나 짚고 무엇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나중에 혼자서 책을 넘기면서 스스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빠한테서 배운 말을 웃으며 따라합니다. ⓒ 최종규

 

 ㄴ. 아이와 놀며 읽는 책

 

애 아빠가 글 몇 줄 끄적이고 싶으면 새벽 서너 시쯤에 조용히 일어나 옆방에서 소리를 죽이며 자판을 또닥거려야 합니다. 오늘은 다섯 시에 느지막히 일어나 살며시 글을 씁니다. 두 식구 고요히 잠든 나절에라야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어 글쪼가리 한둘 가까스로 일굽니다. 새벽에 물 한 모금 마시며 글을 쓰고 있으면 한 시간쯤 뒤 배에서 똥을 내보내야겠다는 꼬르르 하는 소리를 냅니다. 이제 책 하나 들고 뒷간으로 갑니다. 다문 몇 쪽이라도 책을 읽습니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청어람미디어,2007)이라는 책을 쥡니다. 글과 사진이 참으로 좋은 책이지만 책이름만큼은 영 어설픕니다. 이 어설픈 책이름 때문에 지난 세 해 동안 이 책을 안 거들떠보고 있었습니다. 글과 사진을 일군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일본에서 당신 책을 낼 적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따위 낯부끄러운 꾸밈말을 붙이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곱고 맑은 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책마을 일꾼들은 낯부끄러운 꾸밈말을 낯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며 버젓이 달아 놓고 있을까요. 들짐승과 멧짐승과 날짐승을 돌보는 다케타쓰 미노루 님한테는 그저 '훗카이도 동물병원'이요 '북쪽나라 짐승쉼터'였을 텐데요.

 

"훗카이도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생활이 바빠지자 덩달아 차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동물도 늘어났고요(17쪽)"라는 대목을 읽다가, 이 사진이야기를 아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읽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 아빠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 책을 읽어 주면서 이런 대목에서는 요모조모 살을 붙일 테지요. "참말 그렇지? 빠방이가 너무 많아 우리는 골목을 느긋하게 걷기 힘들잖아. 사람들 모두 빠방이를 안 타고 걸어다니면 조용하고 깨끗하며 서로서로 좋을 텐데."

 

일본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유미리 님이 쓴 <생명>(문학사상사,2000)이라는 책을 어제 막 장만해서 조금씩 읽습니다. 깊이 사랑하던 사람이 유미리 님 몸에서 새 목숨이 자라나는 줄 알면서 등을 돌리며 시리디시린 생채기를 남겼다는데, 유미리 님은 당신을 저버린 사람이 남긴 씨앗으로 자란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고이 안고 있다가 모진 아픔을 겪으며 낳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슬픈 집식구한테 둘러싸여 죽음만 생각하던 유미리 님이 죽음이 아닌 삶이라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유미리 님은 조산원에서 배앓이를 하면서 "나는 늘 나를 보호해 줄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평생 지켜 주겠다는 그의 말을 나는 믿었다. 하지만 믿었기에 배신당했다. 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보호받고 싶은 나 자신의 소원에 배신당한 것이었다(218쪽)"하고 생각합니다. 배앓이가 그지없이 모질어 진통제와 촉진제를 놓아 달라고 빌지만, 조산원 일꾼은 '조산원에서는 그런 주사 안 쓴다'고 대꾸합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한국과 달리 애 엄마한테 주사를 함부로 안 놓습니다.

 

배앓이를 하는 유미리 님은 그동안 당신이 몸속 목숨을 제대로 돌보거나 헤아리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며 얼른 새누리를 볼 수 있도록 하려고 힘씁니다. 사랑에다가 보금자리까지 잃었으나 유미리 님은 새 목숨을 맞이하며 새 삶을 찾습니다. 그러면, 유미리 님을 등진 남자는 짝꿍과 아이를 버리며 무슨 새 삶을 찾았을까요. 유미리 님만이 아이랑 놀며 책을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2010.06.10 15:06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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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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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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