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많은 사람이 빚 없는 사람보다 신용이 좋다?

[가정경제119] 합리적인 재무관리 방해하는 신용관리 시스템

등록 2010.06.14 12:35수정 2010.06.1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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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제사회학자 로버트 메닝(Robert D. Manning)은 2차 대전 이후 발생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건을 소비자 신용사회(Consumer Credit Society)의 등장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신용사회란 신용을 매개로 소비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 우리는 신용을 돈처럼 사용하는 경제구조에서 살아가고 있다.

신용은 그 자체로 금전적 가치를 지녔다. 구매력과 자금 동원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용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무형자본이다. 신용점수가 높은 사람은 시장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신용이 나쁘면 상대적 불이익을 받는 구조. 사람에게 상품처럼 일정한 등급(grade)이 매겨지는 환경. 그것이 신용사회의 얼굴이다.

신용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믿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상대방이 일정 기간 후 상환 또는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인정함으로써 물건, 돈을 빌려주거나 지불을 연기하여 주는 일'.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이란 '빌린 돈을 제대로 갚을 수 있는가에 대한 평가 척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당신이 백만장자라면, 신용 등급이니 신용 평가니 하는 것들에 대해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할 필요 없이 당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보유한 자산을 효과적으로 소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그런 '운 좋은 소수'가 아니라면, 경제적 평가 잣대로서의 신용이라는 이 화두를 쉽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이 단순한 게임에서 규칙을 만드는 자는 돈을 빌려주는 자이고, 당신은 그 질서에 따라야 하는 빌리는 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는 그 무엇, 신용등급은 어떻게 결정되나

그렇다면, 신용등급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개인 신용등급은 신용정보를 다루는 전문기관에 의해 만들어진다. 전문기관이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과 신용정보회사를 말한다. (소비자) 신용정보란 금융 거래자에 대한 식별, 신용도, 신영거래 능력을 판단할 때 사용되는 정보를 말한다. CB(Credit Bureau: 신용조회업 인가 회사)에서 평가하는 기준을 특별히 CB등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상 금융기관들은 신용정보회사를 통해 수집한 정보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수신(受信) 및 거래 데이터(자동이체, 신용카드 정보)를 종합하여 최종적인 신용등급을 판정하고, 자체 축적된 정보나 정교한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은 대부업체나 신생 금융기관들은 CB회사에서 제공하는 신용정보에 의존한다고 보면 된다.

과거 금융기관의 개인신용 평가는 몇 개의 평가항목으로 이루어진 신용평가표(Score table)에 의해 등급을 판정했으나, 카드대란 이후 CSS(Credit scoring system)라는 개인신용 평가시스템을 통해 개인평점을 산정하고, 이를 기초로 신용등급을 매기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렇게 신용평가 시스템의 '신용평점모형'을 통해 계량화된 평가점수는 신용등급으로 나타나며 총 10개의 등급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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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등급표 신용등급표 (한국신용정보 마이크래딧) ⓒ 한국신용정보


그렇다면, 개인신용평가 및 등급 산정 기준은 얼마나 객관적일까? 신용정보를 다루는 회사들마다 취급하는 정보의 내용도 다르고, 등급판정기준 역시 제 각각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정보 표준(standard)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보의 신뢰성(credibility)도 문제다. 신용정보 시장이 소수의 회사에 의해 독과점 상태(monopoly market)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국내 신용정보시장은 한국신용정보(NICE), 한국신용평가(KIS) 등 25개 회사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나이스 그룹(NICE Group)과 시중은행 등 대형 금융기관들의 공동 출자 형식으로 만들어진 코리아크래딧뷰로(KCB)가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특히 NICE그룹의 시장지배력은 비교기업이 없을 만큼 막강하다.

한편 KCB는 시중은행들이 실질적인 주인(owner)인 만큼, 우량정보들을 독점하고 있다. 전자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면, 후자는 부가가치 높은 고객정보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우리나라 개인신용정보 시장은 소수의 독과점업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정보를 '요리할 수 있는' 개연성이 상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기관들은 금융소비자를 위해 일하는 조직이라기 보다는 정보를 팔고 돈을 버는 상인(商人)이기 때문이다.

CB회사들은 고객의 신용정보를 객관적으로 제공한다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이력(history) 등을 포함하여 새롭게 가공된 정보에 대한 판단은 오직 CB회사들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근거로 평가가 이루어지는가를 소비자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결과적으로, 국내 신용정보시장은 지독한 정보불균형 속에서 실질적 정보주체인 소비자들의 참여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된 채 일방적으로 등급을 부여 받는 상황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널 뛰는 신용등급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보의 판단 기준(standard)과 질(quality)이다. 개인 CB등급이란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함께 고려되어 산출되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현재의 신용평가 시스템은 거의 완전한 네거티브(negative)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여신기관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은행들은 자체 전산망을 갖추고 독자적으로 고객의 신용을 평가한다. 은행이 보유한 정보 중에는 신용평점에 (+)가 되는 '좋은' 정보도 있고 (-)가 되는 '나쁜' 정보도 있다. 그런데 은행은 CB회사에 정보를 제공할 때, (고객 정보보호를 이유로) 좋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결국 고객의 신용평가에 긍정적인 정보는 사라지고 부정적인 정보만으로 신용점수가 산정되는 정보왜곡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신용평점 상의 저평가(devaluation)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 재론의 여지 없이, 신용을 이용하는 고객, 특히 저신용자들에게 높은 금리부담을 야기한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신용 1등과 10등급의 금리 차이는 무려 16%가 넘는다. 은행에서 1000만원을 빌린다고 할 때, 연간 이자금액이 160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만일 당신이 금융업자라면 신용평가 점수를 높게 하는 것이 유리하겠는가, 아니면 최대한 평가기준을 낮추어 점수를 낮게 만드는 것이 유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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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등급과 이자율 신용등급 및 신용대출이율 (KCB / 2010.2월 기준) ⓒ 문진수


신용정보회사와 여신 금융기관은 마치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서로 공생하는 조직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다면 신용 소비자는? 단지 대상화된 객체일 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신용등급은 고정된 상태로 유지되지 않는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널뛰기를 할 수 있다.

예컨대, 과거 수년 동안 우량 등급을 유지하던 사람도 약간의 부주의로 (단돈 100원이라도) 통신요금을 미납하게 되면, 채무불이행자로 등록되어 신용등급이 떨어진다. 바쁘게 살아가는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가 장기간의 해외출장으로 신용카드 결제일을 잘 챙기지 못해 연체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등급을 판정하는 심판관들은 당신의 '작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용등급은 떨어지기는 쉬우나 다시 올리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신용정보회사들의 정보 판단기준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일례로 현행 신용평가기준은 현금이나 체크카드 사용자들보다 신용카드 사용자들에게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현금 사용자는 경제활동 이력과 패턴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결국 남보다 더 많이 소비하고, 더 큰 빚을 져야만 좋은 신용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빚 많은 사람이 빚 없는 사람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다니, 이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과다한 부채를 가지고 있고 과소비를 하는 사람보다 빚도 없고 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하는 사람이 재무적으로 훨씬 건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신용질서는 소비와 부채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사람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화폐신용을 매개하는 금융기관들에게 '신뢰'라는 말은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되었다. 신용업자 사무실 벽에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놓은 평가기준과 점수가 걸려 있을 뿐이다. 원칙은 단순하다. 높은 담보가치를 지니고 있으면, 높은 신용을 제공받을 것이고, 담보가치가 빈약하면 신용 제공의 대가를 가혹하게 요구 받을 것이다.

결국 좋은 신용등급을 유지하려면 현존하는 신용 질서 메커니즘에 조용히 항복(?)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신용카드 대금은 물론 통신요금 심지어 각종 공과금 고지서를 빈틈없이 챙기고, 어떠한 경우라도 연체를 해서는 안되며, 본인 신용상태에 이상이 없는가를 수시로 점검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신용장사꾼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와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야만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왜 이 질서에 무조건 순응해야 하는가? 신용은 목적인가 수단인가? 신용이란 인간의 경제적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도구다. 따라서 신용이란 개별 경제주체의 재정적 안정을 위해 활용되어야 마땅하다. 행복한 경제생활이 목적이고 신용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있는 것 같다.

신용정보를 가지고 돈을 버는 자들(신용정보회사와 금융기관)과 더 높은 신용점수를 얻기 위해 맹렬히 신용카드를 긁어대는 이들(소비자)이 마치 주인과 노예의 관계처럼, 자연스러운 공생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객체가 주체로, 갑이 을로, 도구가 목적으로 뒤바뀐 소비자 금융의 기본 질서를 우리는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결국 이 게임에서 돈을 버는 자들은 신용을 매개로 장사를 하는 회사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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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정보회사의 재무현황 신용정보회사의 2009년 (잠정) 영업현황 (금융감독원 / 2010.3.8) ⓒ 문진수


누가 이들에게 평가 권한을 부여했는가? 국민 대다수의 신용정보를 임의대로 평가할 수 있는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도록 방임한 자들은 누구인가? 평가기관을 '평가하는' 기관은 왜 존재하지 않는가? 어째서 신용평가 기준에는 긍정적(positive) 요소보다 부정적(negative)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누가 우리에게 바코드를 붙였나

이제 이러한 질문에 일정한 '해답'을 구할 때가 되었다. 신용정보회사의 정보독점과 시장의 불완전 경쟁구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금융감독원에 접수되는 신용정보업체 관련 민원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용 정보(평가)기관들에 대한 감독규정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신용 정보기관이 아닌 신용 소비자의 관점에서 보다 공정한 심사 기준을 수립하고, 합리적인 평가 방식을 통해 신용정보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소비자들을 위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시장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신용)민주주의 질서를 새롭게 형성시켜 나가야 한다.

애초에 정상적인 소득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임의대로 등급을 매기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다. 합리적인 재무관리를 통해 안정적인 경제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습관적으로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사람보다 신용등급이 낮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빚 없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듯 삐뚤어진 신용관리 시스템에 끌려 다닐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빚과 신용이라는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가여운 벌레가 되지 않으려면, 돈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빚에 의존해 살아가는 '채무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스스로 재무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독립된 주체가 되어야 한다. 대관절 누가 우리에게 허락 없이 바코드(bar code)를 붙이고, 그 질서에 복종하라고 강요한단 말인가?


#신용정보 #신용평가 #신용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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