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고부관계, 왕도가 없더라

설거지하면 생각하는 그날의 시어머니

등록 2010.06.19 11:03수정 2010.06.1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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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대에 그릇이 수북이 쌓여 있다. 어제 하도 피곤해 저녁 먹은 설거지를 미뤄 뒀더니 저 지경이 난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설거지통에 달라붙어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덜커덩, 툭탁, 쨍그랑..." 젓가락 짝부터 접시까지 저 생긴 대로 내지르는 소리가 가관이 아니다.

 

성질이 급해서인지 예전부터 조용조용 일을 해내는 법이 없었던 나다. 일을 하면서 혼자 들어도 나는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을까 한심할 정도니. 시끄러운 설거지 소리를 들으니 20년 전 생각이 난다.

 

어머님 모시고 살 때였다. 남편은 감옥에 갇혀 있고 내가 장사를 해서 먹고 살 때였다. 보통 때는 어머님은 살림, 나는 밥벌이 이렇게 역할 분담이 철저했는데 그날은 어머니 손님인지 내 손님인지 하여튼 손님을 치른 뒤끝이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시겠다고 하셨을 텐데 내가 말렸을 것이다. 어쨌든 어머니 대신 내가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반찬 만드는 일보다 설거지를 더 재미있어 했던 터라 별 유감없이 설거지에 몰두했다. 수북이 쌓인 그릇들이 뽀득뽀득 씻겨 착착 정리되는 개운함. 이 재미 때문에 설거지 담당을 맡아도 눈살을 찌푸린 적이 없다.

 

"덜커덩, 툭탁, 쨍그랑..."

 

신나게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누가 들으면 그릇 '아작'낸다고 하겠네, 거친 설거지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아, 어머니... 왜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개수통에 고개 처박고 있다가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 눈과 딱 마주쳤다.

 

어머니 눈길과 마주치자마자 나는 갑자기 "하하하"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설거지 한답시고 '우당탕탕' 난리를 치는 며느리를 보시며 어머니가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하는 민망함이 웃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내 웃음소리에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시던 어머니도 비로소 환하게 웃으셨다. 어머니 웃음에 담긴 느낌은 '안도' 바로 그것이었다. 시끄럽게 설거지를 하는 며느리. 아마도 어머니 생각엔 "저것이 분명 심통이 났구나"하셨을 것이다.

 

돈 벌어 오랴, 남편 옥바라지 하랴, 또 이렇게 힘들게 사는 며느리한테 당신까지 얹혀사신다고 생각하셨을 텐데 어떻게 기를 펴실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든 생각도 이런 어머니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크게 웃을 수가 있었다. 어머니 며느리 원래 덜렁이에 개판이지 않느냐? 어머니도 익히 아시는 바대로 '선머스마' 같이 살림엔 젬병이라 그렇지 저 절대로 화난 것 아니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웃음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그렇게 격의 없이 유쾌 상쾌 통쾌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시어머님과 며느리의 관계. 웃음 하나로 마음과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힘. 구차한 설명이나 설득이 사족처럼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다는 것. 그때 안 사실이었다.

 

고금을 통틀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만큼 복잡하고 미묘하고 피곤한 관계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것도 하기 나름이라는 건방진 생각까지 해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그렇다.

 

시어머니든 며느리든 칼자루를 쥔 강자가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 그 마음이 있어야 따뜻한 고부관계가 정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분명히 어머니보다 내가 더 강자였다.

2010.06.19 11:03 ⓒ 2010 OhmyNews
#고부관계 #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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