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바꿔 생각하기' 쉽지 않네요

등록 2010.06.20 09:50수정 2010.06.2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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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0년간 해 온 직장 생활을 접고 다음 달이면 자기 일을 시작하게 될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제 생각도 덩달아 달라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피고용인의 처지에서 고용인이 된다는 것, 노랫말에도 있듯이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절로 된다는 뜻입니다.


시쳇말로 전에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챙긴다'는 식의 푸념을 했다면 지금은 '곰이야 재주만 부리면 되지, 지놈이 곡마단 살림 걱정할 일은 없지 않나' 하는 식입니다. 게다가 되놈도 경우에 따라 곰이 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화수분까지는 아니라 해도 돈 걱정 없이 살림을 꾸릴 수 있었던 '월급쟁이 마누라'로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주인이야 굶든 말든 아무런 리스크 없이 꼬박꼬박 품삯을 챙겨갈 수 있는 처지가 갑자기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전에는 살인적인 고세율에 '유리지갑'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인 데다 남편이 하는 일의 '막중한' 책임을 고려할 때 응당 더 높은 보수가 주어져야 한다는 고정불변의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을 써야 하는 지금은 '아직 뭔가 보여주기도 전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봉급을 제안할 수 있을까' 하는 미편한 마음부터 먹어집니다.

남편의 '자기 일' 이전에 입장 바꾸기가 확연했던 경험은 남의 집을 세들어 살던 때와 내 집을 남에게 세 내어 주었을 때였습니다. 렌트생활을 할 때는 자기 이익만 악착같이 챙기려드는 집주인들의 행태가 얄밉고 야박하게 여겨졌는데, 막상 내 집을 세놓으려니 한푼이라도 더 받고 싶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능하면 식구 적고 애들 없는 집, 행여 렌트비 밀릴세라 돈벌이 든든한 세입자를 찾고 싶고, 애완동물은 절대 들여놓을 수 없는 조건 등등 까탈스럽게 굴고 싶어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순악질 여사'까지는 아니라 해도 제게도 결코 만만치 않은 '집주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은 결국 친구 가족에게 빌려주는 바람에 까탈은커녕 기본 조건조차 죄다 양보를 했지만 말입니다.

베이비 붐 세대라면 충분히 공감할 그 옛날 악명 높던 만원버스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사생결단 어떻게든 비집고 올라탄 후 한 정거장만 가면 예외없이 "그만 태워, 그만!" 이란 비명이 터져나왔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면 교복 단추 한두 개쯤 떨어져 나가기는 다반사고, 어떤 때는 책가방이 아직 버스 안에 있는 것도 모르고 가방 고리만 움켜쥔 채 몸만 겨우 빠져나올 때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나마 저는 또래보다 키가 한 뼘은 커서 빼곡이 둘러싼 어른들 틈에서 숨은 쉴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시절이니 '제발 그만 태우라'는 승객들의 절규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또한 버스 타기 전과 타고 난 후의 선명한 입장 바꾸기이니, 자기는 어떻게든 탔으면서 다른 사람은 안 탔으면 하는 심보가 우습지 않습니까.

운전할 때와 보행할 때는 또 어떻습니까. 차를 끌고 나가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치적거리고, 걸어 다닐 때면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차량이 단연 훼방꾼이지요. 역시나 입장이 달라지면 금방 변덕을 부리게 되는 경우입니다.


영어에는 '남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말을 '다른 사람 신에 내 발을 넣어보라'고 표현하지만 고린내 나는 남의 신발에 내 발을 넣는다는 자체부터 껄쩍찌근한데다 애당초 맞지도 않을 남의 신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람, 헌신짝 날려 버리듯 하면 그만입니다.

결국 너와 나의 사이를 좁힐 수 있을 때, 네 신과 내 신의 사이즈 차이를 줄일 수 있을 때,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어 감동을 나눌 수 있을 때, 경험의 공유가 일어나고 정서가 통할 수 있을 때 상대가 곧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일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 편에서 이해할 수 없는 그 얘기가 상대로서는 결코 핑계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래서 내가 지금 너라도, 니가 지금 나라도 웃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또 도무지 잘 안 된단 말입니다. 입장 바뀐 남편을 둔 아내의 입장 바꾸기가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덧붙이는 글 | 호주한국일보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호주한국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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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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