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은 점점 무거워지고... 저 차를 붙잡을까 말까

[스물한 살, 내일로 가는 칙칙폭폭 전국일주 5] 영월 - 上

등록 2010.07.18 12:26수정 2010.07.3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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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영월에 가기 위해선 무궁화호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조치원에서 한 번, 제천에서 또 한 번. 환승까지 시간이 남아서 기웃댄 제천역 광장에는 MT를 온 듯한 내 또래 학생들이 수십 명 있다. 제천이 MT로 유명하던가? 아니면 이제 어딘가로 떠나려는 건지도 모른다. 제천에서 청량리까지는 기차로 두 시간쯤. 아니면 가까운 동해 바다로 가려는지도. 기타도 메고 있는 걸로 보아, 무슨 교회 모임이거나 한 모양이다.

기차는 삶의 한가운데로 달린다


제천까지 오는 동안에는 커피를 마신 보람도 없이 새록새록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목적지인 영월이 가까워지자 정신이 든다. 창밖의 풍경에 두 눈을 사로잡힌다.

내가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 뻗으면 닿을 듯 느껴지는 삶. 고속버스를 탔을 때 만날 수 있는 방음벽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저렴하고 접근성이 좋은 땅에 지어진 대형 공장이나 물류창고 따위와는 전혀 다르다. 기차는 삶의 한가운데로 달린다. 층층이 지어올린 대형 역사보다 작은 역일수록 더더욱.

"기찻길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여행자가 느끼는 운치와 달리 막상 집 가까이 철로가 놓인다면 좀 피곤할 수도 있겠지. 아기는 기적 소리에 잠을 깨고 오막살이가 철거당하는 게 현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살짝 스친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니까, 비극을 상기하는 관찰은 외면한 채 영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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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느낌으로 꾸며놓은 영월역 역사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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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역 앞 잔디밭에 세워진 김삿갓 석상. 영월군 김삿갓면(구 하동면)은 김삿갓이 살았던 지역으로 김삿갓 계곡, 김삿갓 문학관, 그의 생가 등이 모여있다. ⓒ 박솔희


주말을 집에서 보낸 뒤 새로이 출발한 발걸음이라 기운이 넘쳤다. 영월은 썩 큰 동네가 아니어서 도보여행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차를 탈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역에는 관광안내책자가 없어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역전 래프팅샵의 열린 문 안으로 갖가지 책자가 비치된 걸 보고 몇 가지를 얻었다.


지도를 봐도 타고난 방향치인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장릉이 어느 쪽이냐 물으니 택시 기사인듯한 아저씨가 방향을 일러 준다. 걸어간다니까 택시 타도 삼사천 원도 안 나올거라면서 놀라워했지만 나는 "그냥 걸어가보고 싶어서요"라며 웃었다.

동강은 흐르고, 단종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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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그림자를 초록으로 되비치며 잔잔히 흐르고 있던 동강. ⓒ 박솔희


와본 적도 없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월. 역전에서부터 계속 눈에 띄는 래프팅샵들을 보며 여기에 래프팅으로 유명한 동강이 있다는 걸 상기했다. 걸어서 영월대교를 건너며 아래편으로 동강이 흐르는 걸 보았다. 아직 올 비가 덜 와서인지 강물은 좀 줄어들어 있는 것 같았다. 산 그림자 때문일까. 초록으로 되비치고 있었다.

영월은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이 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유배당해 와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단종은 삼면이 강이고 한쪽은 암벽으로 막힌 청령포에 갇혀 있다가 그곳이 홍수로 물에 잠기자 읍내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사약을 받았다. 청령포와 관풍헌을 비롯해 그의 무덤인 장릉, 단종이 자신의 처지를 빗댄 시를 읊었다는 자규루 등 어린 왕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가 많다.

그 외에도 영월에는 사진박물관, 곤충박물관, 종교미술박물관 등 다양한 주제의 박물관이 많아 '박물관 고을'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으며 <1박 2일>에 나와 유명해진 한반도지형, 삿갓을 쓰고 유랑하며 평생을 살아간 난고 김병연의 고향마을 김삿갓면도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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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자규새를 자신의 처지에 빗대 애끓는 시를 읊었다는 자규루.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어서인지 문이 잠겨 있어 담장 밖으로만 훔쳐볼 수 있었다. ⓒ 박솔희


一自怨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공중에서 나온 뒤로
孤身雙影碧山中 (고신쌍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限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 부리엔 달빛만 희고
血淚春谷落花紅 (혈루춘곡락화홍)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何柰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역에서부터 이십 분쯤이나 걸었을까. 영월대교를 건너고 중앙시장을 지나면 바로 맞은편에 자규루와 관풍헌이 보인다. 자규새는 피를 토하며 운다지. 두견새라고도 하며 고전 시가에 심심찮게 등장하여 애끓는 화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새다. 유배당한 어린 왕은 이 자규루에 올라 피를 토하듯 애달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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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헌의 단청이 너무나 화려해서 어린 왕의 단명이 새삼 더 서글프다. ⓒ 박솔희


지금은 '보덕사 포교당'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관풍헌. 단종이 죽기 전까지 머무르던 집이다. 포교당이라 함은, 지금은 절이라는 뜻인가? 열려 있는 쪽문으로 살짝 들어가본다. 입구 께의 작은 건물에는 사람이 사는 듯 집기가 펼쳐져 있고 관풍헌의 문은 굳게 잠겨있다. 딱 유배지다 싶게 작은 마당 안에 쓸쓸하게 선 독채 건물이다.

폐가 될까 싶어 얼른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어디선가 맑은 음악소리가 들린다. 두리번두리번했더니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산사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게 풍경이지만 이렇게 맑은 소리를 내는 건 또 처음 듣는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리듬감 있게 흔들리며 풍경은 "찌링~ 찌링~" 하며 고운 노래를 부른다. 바람이 참 좋다, 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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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헌 처마에 매달린 풍경. 풍경소리가 너무 좋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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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읍내에 있는 '청록다방'. 영화 <라디오스타>를 찍은 장소라고. ⓒ 박솔희


영월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까 의외로 떠오르는 구석이 있다. 재미있게 본 영화 <라디오스타>를 여기서 찍었단다. 영월읍 곳곳에 라디오스타 촬영지가 있다. 관풍헌을 지나 얼마 가지 않은 곳에 있는 '청록다방' 역시 영화 촬영 장소임을 알리는 표시를 크게 해 놓았다.

어디가 목적지라고 할 것도 없이 한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동강사진박물관이나 청령포, 장릉이 모두 비슷한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지도를 들춰보며 한적한 읍내를 구경하며, 천 원에 다섯 개를 주는 '왕눈이도넛츠'도 사먹으며 걸었더니 어느새 사진박물관에 다 온듯 싶다.

'박물관 고을' 영월, '사진마을'이라고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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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책례계병 중 왕세자책봉도 부분. 원본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단종은 1450년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 박솔희


동강사진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공립사진박물관이다. 2005년 영월읍은 이 박물관을 열면서 국내 최초로 사진마을 선언이라는 것을 하며 사진의 고장으로 거듭나고자 했단다. 사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사진체험실 등을 운영하며 국내 사진 문화 발전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월읍에서는 여름마다 동강사진축제도 개최하고 있다. (관람시간 오전9시~오후6시, 입장료 1000원, 영월군민은 할인)

슬슬 배낭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해 입구에 가방을 맡기고 박물관을 둘러봤다. 기획전시실에서는 <기록화, 사진기록으로의 재현 - 궁중기록화로 유추한 단종의 삶>이라는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44회 단종문화제를 기념하는 전시로 공식 전시기간은 4월 21일부터 6월 13일까지인 모양이나 내가 방문한 7월 초까지도 열려 있었다. 궁중기록화를 사진으로 재현한 것이라는데 순서대로 둘러보자 단종 생애의 맥이 짚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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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체험실에서 찍은 보름달 배경의 사진. 이외에 일출 등을 배경으로 찍을 수도 있다. ⓒ 박솔희


위층 사진체험실에서는 다양한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볼 수 있었다. 인화하는데 따로 비용이 들기는 했지만(2000원) 언제 보름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보겠나 싶어 셔터를 눌렀다.

사진박물관에서 나와 지도를 보니, 가장 가까운 데가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다. 박물관에서 물어보니 걸어갈 거면(역시 놀라신다) 20-30분 정도는 잡아야 된단다. 박물관까지도 그만큼은 걸어왔는데, 못 걸어갈 이유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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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물관을 나오며. 이름모를 삼각산 위로 갖가지 모양의 구름이 예쁘게 걸렸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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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가는 길, 31번 국도변에 피어있던 꽃들 ⓒ 박솔희


사진박물관을 구경한 뒤라서일까? 모든 사물이 아름다운 피사체로 보인다. 그러고보니 날씨도 참 맑아 사진이 깨끗하게 나온다. 31번 국도를 따라 청령포 가는 길, 길도 꽃도 구름도 다 예쁘다.

배낭은 점점 무거워지고... 저 차를 붙잡을까 말까

한 30분 걷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신감을 부렸지만 막상 오후의 햇살이 뜨거워지니 조금 지치기 시작한다.

작년 여름에 친구와 강화도 도보여행을 갔을 때는 정말 더운 날 끝도 없는 길을 죽도록 걸었다. 걷다 걷다 힘들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다녔는데 이게 요령이 생기니까 더 이상 걸을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낚시하러 온 아저씨 차를 얻어탔는데 우연히도 바로 우리 동네 같은 골목에 사는 분이어서 반가운 적도 있었고, 한 번은 주말 나들이 나온 아저씨 아주머니 차를 얻어타고 강화도 한 바퀴를 다 돌고 인근 석모도까지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실 내가 걷는 데 자신을 부린 건 정 힘들면 차를 얻어타지, 하는 속셈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차를 타도 같이 타고, 바쁜 차가 멈춰주지 않아도 또다시 다음에 오는 차를 향해 같이 손 흔들 친구가 없으니 쉽게 객기가 부려지지 않는다(여자 혼자 모르는 차를 얻어타는 게 위험하다, 하는 생각은 별로 없다. 위험하기로는 대한민국 서울만한 곳이 없고, 히치하이크가 택시보다 차라리 안전하다는 게 내 지론이니까).

자주 지나가지도 않는 저 차를 향해 손을 흔들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어떤 눈치 빠른 차가 내 앞에 딱 멈춰 주면 얼마나 좋겠나 택도 없는 꿈만 꾸다가, 결국 내가 걸을만 하니까 이렇게 쭈뼛거리고 있지 싶다가 어느새 도착한 청령포.(그래, 난 A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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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까지 100미터. 이 표지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 박솔희


섬은 아니지만 섬인 곳... 창살없는 감옥이었을 청령포

동, 남, 북 삼면의 강과 서편의 암벽으로 둘러싸여 육지 속의 작은 섬으로 불리는 청령포.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이 단종복위운동의 실패 이후 유배된 곳이다. 단종은 이곳에서 2개월 정도 지내다가 홍수로 물이 불어 청령포가 잠기자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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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에서 배를 타야 청령포에 이를 수 있다. 뱃삯은 입장료 2000원에 포함돼 있다. 입장료가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배를 타야 하는 걸 보고 이해가 됐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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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의 눈에는 한없이 평화롭고 잔잔한 남한강 물이, 단종에게는 얼마나 답답한 것이었을까. ⓒ 박솔희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청령포로 건너갔다. 비가 많이 오면 지금은 자갈이 드러나 있는 청령포 기슭까지 물이 차오른다 했다. 청령포가 섬이 아닌 걸 알아도 참말 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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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에 빽빽한 소나무숲. 사육신의 기개라도 보는 듯하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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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어소.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재현했다.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관노들이 살던 행랑채 등이 있는 단촐한 기와집이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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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인형으로 재현한 단종. 어린 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인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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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한양과 두고 온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망향탑. ⓒ 박솔희


단종 어소를 둘러보고 마루에 앉아서 충분히 쉰 뒤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올랐다. 야트막한 산 위에는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쌓아올린 망향탑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웬만한 산에 가면 크고 작은 소원을 담은 돌탑을 흔히 볼 수 있다. 왕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차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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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올라앉아 한양을 그리워했다는 노산대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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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대에서 내려다본 남한강. 폭 십 미터가 채 될까 싶은 이 강물이 단종에게는 감옥 창살과도 같았을 것이다. ⓒ 박솔희

덧붙이는 글 |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더 많은 정보와 사진은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더 많은 정보와 사진은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영월 #영월여행 #단종 #청령포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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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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