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간다...다사다난한 8개월이 간다

[詩가 있는 풍경 45] 오세영 시인의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등록 2010.08.31 13:55수정 2010.08.3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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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시원한 물소리 뒤편으로 녹음이 진다. 여름날이 간다. ⓒ 박상건


8월은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온 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달이다.


발 아래 까마득히 도시가,
도시엔 인간이,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있을 터인데
보이는 것은 다만 파아란 대지,
하늘을 향해 굽이도는 강과
꿈꾸는 들이 있을 뿐이다.

정상은 아직도 먼데
참으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벼랑을 끼고 계곡을 넘어서
가까스로 발을 디딘 난코스,

8월은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달이다.

오르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땅만 보고 살아온 반평생,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아, 나는 지금 어디메쯤 서 있는가,

어디서나 항상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우러르면

별들의 마을에서 보내 오는 손짓,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오늘도 손으로
지폐를 세고 있구나.


8월은
가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케 하는 달이다.

- (오세영,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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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여러 갈래 길로 나뉘는 숲길을 걸으며 속절없는 무심한 세월을 읽는다. ⓒ 박상건


8월이 간다.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산등성 마루턱에 앉아/한번쯤 온 길을 뒤돌아보게" 한다. 걸어온 길보다 가야할 길이 짧은 길모퉁이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이거나 구름을 바라본다. 붙잡아도, 붙잡지 않아도,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의 바람이 나그네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8개월을 거닐었다.

세밑 오기 전에 너무나 다사다난했다. 가는 길 허물기도 하고, 허물어지다 만 길에서 되돌아서기도 하고, 저마다 먼저 건너려다 함께 넘어지기도 하고, 그 길 가장자리에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빗줄기에 질퍽이는 길 걷고 걸으면서 8월,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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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가을은 타오르는 단풍숲으로 절정을 맞는다 ⓒ 박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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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은 감을 따는 할머니의 풍경에서 세월과 추억과 향수를 읽는다. ⓒ 박상건


8월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너와 나는 어디메쯤 와 있는가.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지금 이 길목에 서 있는가. 그래도 가을하늘은 마냥 푸를 것이고,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구름을 손짓하며 남은 4개월에 희망을 품을 것인지, 달려온 8개월 쓰라림과 아픔을 잊기 위해 배려와 버림으로 살아갈 것인지... "8월은/가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달이다."

8월은 간다. 멈출 수 없는 구름결에 가을로 간다.

꽃 지고 단풍 붉게 타오르고 귀뚜라미 울어예며 야단법석을 떨 산천의 가을은 푸르름 혹은 녹슬어 가는 낙엽소리로 가득할 것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질 터이다. 다시 눈 내리고 모든 것들이 산천초목의 밑거름이 되어 썩어 흙이 되는 모습 앞에서 너무나 경건하게 눈물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박상건 기자는 시인이고 성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이다. 저서로 시집 <포구의 아침>, 시인 창작실을 탐방한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여행 에세이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 여행> 등 다수가 있다.


덧붙이는 글 박상건 기자는 시인이고 성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이다. 저서로 시집 <포구의 아침>, 시인 창작실을 탐방한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여행 에세이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 여행> 등 다수가 있다.
#8월 #오세영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박상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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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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