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뀌었으니, 교과서도 바꿔야 한다?"

법원 "교과부, 역사교과서 수정지시 위법"... 교과부 "수용 못해" 반발

등록 2010.09.02 20:47수정 2010.09.0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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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역사교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등 40개 역사ㆍ교육단체로 구성된 '교과서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대표들이 2008년 12월 9일 오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의 교육과학기술부를 항의방문해서 '부당한 역사교과서 수정지시'와 '채택 변경지시' 즉각 중단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 권우성


뉴라이트 등 보수학계로부터 '좌편향' 논란이 제기된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수정하도록 한 교육과학기술부의 명령이 절차를 어겨 위법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교과부의 역사교과서 수정 명령을 취소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과부는 "해당 교과서를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다"며 즉각 항소하겠다고 반발했다.

이에 교과서 저자 측은 교과부의 수정 명령이 부당하다는 법원의 판결을 토대로 법적인 자문을 거쳐 출판사 측에 교과서 재수정을 요구하겠다는 방침이다.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 대표집필자인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정권이 바뀌었으니, 교과서도 바꿔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던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치적 판단으로 교육 내용 좌우하려는 시도 막는 판결"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이진만 부장판사)는 2일 김한종 교수 등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 공동저자 3명이 교과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교과서 수정명령을 취소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교과부의 지시는 오기(誤記)나 기타 명백한 잘못의 정정이나 객관적 학설의 변경에 따른 수정 명령이 아니고 2002년에 이미 합격 결정을 한 책의 내용을 변경하도록 명하는 것이라서 새로운 검정을 실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초·중등교육법 등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는데 교과부장관이 수정 명령에 앞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을 듣고 역사교과전문가협의회의 검토를 거쳤을 뿐 심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자가 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비록 수정명령이라도 실질적으로 검정에 해당한다면 절차를 준수해야 하고 만약 이와 달리 본다면 검정에 앞서 심의를 거치게 해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려는 취지가 손상될 우려가 있다"고 부연했다.


앞서 교과부는 지난 2008년 11월 '분단의 책임을 미국이나 남한 정부 수립으로 돌리는 등 내용이 편향됐다'는 보수단체의 문제제기 등을 바탕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금성출판사의 교과서 일부를 수정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교과서 저자인 김한종 교수 등은 "수정 명령이 법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아 무효"라며 행정소송을 냈고 이와 별도로 "집필자의 의사에 반해 내용을 수정한 것은 저작인격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출판사 등을 상대로 저작인격권 침해 금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김 교수는 이날 법원 판결 직후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교과부가 애초에 정치적 이유로 무리하게 교과서 수정을 요구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제대로 절차를 밟지 않고 수정한 것"이라며 "그런 문제점을 법원 판결에서 잘 짚었다"고 환영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번 문제의 발단은 정권이 바뀐 다음에 관점의 차이나 정치적 이유로 교과서에 대한 수정 지시가 시작된 것"이라며 "이런 판결이 정치적 이유나 판단으로 교육 내용을 좌우하려는 시도를 막아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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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학계, 교육계, 시민사회단체의 공동 기자회견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열렸다. ⓒ 박상규


법원 "수정 절차 위법하다"는데, "문제 없다"고 버티는 교과부

그러나 교과부는 역사교과서 수정 절차가 위법이라는 법원의 판단에도 "해당 교과서를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자세를 고수했다. 교과부는 이날 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즉각 항소하겠다"며 "확정 판결이 나올 때까지 학교 현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 현행 교과서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법원에서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했지만, 교과서 수정명령을 내릴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전문가협의회 등의 객관적인 심사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절차상 문제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교과부가 법원의 판결을 수용하지 않고 상급 법원에서 다투자는 의견인 이상, 이번 교과서 수정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못할 전망이다. 실제 교과서 저자들이 별도의 가처분 신청을 내고, 이것이 법원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상, 당장 내년에도 수정된 교과서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김한종 교수는 "교과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기존의 교과서를 바꾼 게 교과부 아니냐. 그런데 지금 법원에 판결에도 교과서를 다시 바꿀 수 없다면 기존에는 어떻게 바꾸었다는 것이냐"고 항변했다.

김 교수는 이어 "교과부는 항소를 포기해야 한다"며 "교과서 수정이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됐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교육부에서도 이번 판결이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교과부로서는 지금 당장 정권의 눈치가 보이겠지만, 이대로 가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를 바꿔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번 판결을 계기로 그런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지난번에 교과서를 바꾸겠다던 사람들은 '정권이 바뀌었으니, 교과서도 바꿔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며 "말로는 교육이 자주성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행동은 정 반대다. 그런 인식을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출판사는 교과부의 수정 지시가 정당하기 때문에 교과서를 바꾸었다고 했는데, 이제 그 절차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내려졌다"며 "내년부터는 바뀐 교과서가 아니라 원래 교과서로 사용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출판사는 부당한 수정 지시에 따라 임의로 교과서를 고칠 수 없다"며 "따라서 저희 필진들이 의견을 모아서 출판사에 재수정 요구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법원이 수정된 교과서 내용의 적합성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은 것과 관련 김 교수는 "판결문을 보면 애초에 절차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내용의 문제 여부는 판단할 필요조차 없다는 취지였다"며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뉴라이트나 일부 종교단체뿐이고, 역사학계는 기존 교과서에서 강제로 수정할 만한 내용은 없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들도 동의하지 않는 수정교과서, 어떻게 바뀌었나?

앞서 김 교수 등이 출판사를 대상으로 한 민사소송의 경우 지난해 9월 진행된 1심에서는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지난달 진행된 2심 재판에서는 '교과서 수정은 장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므로 출판사를 상대로 저작인격권 침해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취지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에 한국역사연구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전국역사교사모임 등 역사학계와 교육계를 포함한 40여 개 시민단체는 "저자들이 수정하지 않겠다는데 출판사가 마음대로 교과서를 고쳐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이는 검정교과서 제도의 본질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이며, 저자가 동의하지 않은 책이 저자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모순을 낳는다"며 "(검정교과서에 대해) 국정교과서처럼 통제와 검열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교과부는 현재 수정된 교과서 공급 일정을 정상대로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수정된 교과서는 2011년 고2,3과 2012년 고3까지 학교 현장에서 사용하게 된다. 특히 문제가 된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2009년 13만7천55부, 2010년 13만1천560부가 발행됐으며, 올해 일선 학교 채택률은 35%로 같은 과목 검정교과서 6종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좌편향 논란은 2008년 당시 보수학계의 문제제기에서 비롯됐다. 이를 수용한 교과부는 모두 55건에 대해 출판사에 수정권고를 내렸다.

출판사는 교과부의 수정명령에 따라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는 문구에서 '이정표'를 '전환점'으로 바꿨고, 북한 정권 수립에 대해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단독정부 수립의 과정을 밟아 나갔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특히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오는 우리 현대사를 옥죄는 굴레가 됐다'는 부분은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로 표현이 완화됐다. '1980년대 초 잠시 주춤하던 민족 민주 운동은'이라는 대목에서 '민족 민주 운동'은 '민주화 운동'으로 수정되기도 했다.
#역사교과서 #역사교과서 수정 #김한종 교수 #금성출판사 #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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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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