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일곱, 사형 선고를 받다

[김효석 젊은 날의 비망록①] 내 몸을 하얗게 장악한 결핵균

등록 2010.09.08 14:48수정 2010.09.0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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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광주제일고에 입학했다. 광주제일고는 당시 광주 전남지역 최고의 명문고였다. 광주일고 출신들이 해마다 서울대에 100여명씩 입학했으니 그 명성이 자자할 만도 했다. 당시에도 부잣집 아이들은 개인선생을 두거나 학원을 끊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과외와 학원은 고사하고 있을 곳도 여의치 않아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있었다. 기차통학을 하기도 하고, 고모집에도 갔다가, 고3 때는 다시 큰 누나집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맘 편히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었다. 방과 후 공부를 위해 학교 부근의 독서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는 나와 처지가 엇비슷한 친구들이 꽤 있었다. 시골출신들은 서로 통하는 게 있어 친구와 선배가 더 많이 생겼다. 비록 춥고 더웠으며 먼지가 풀풀 나는 좁은 책상 밑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하지만 먹는 게 문제였다. 금방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고, 돌이라도 삭일 한창의 나이에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먹기도 버거웠다. 몸이 점점 야위어 갔다. 볼 살이 홀쭉해지고 얼굴은 파리해질 정도로 창백하게 변해갔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고 어지러워 한참을 쉬어야만 했다. 몸이 약해지니 감기도 자주 걸렸다. 열이 올라 몸을 가누기도 힘들 때가 많았지만 미련하게도 약 한 첩 사서 먹을 줄 모르고 버텼다. 너무 견디기 힘들 때면 약국에서 파는 진통제로 때우곤 했다.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고 공부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코피가 쏟아져 책을 더럽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결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찬바람이 불자 기침이 시작되었다. 바튼 기침으로 시작하더니 가슴이 쩍 갈라질 정도로 깊어졌다. 한 번 기침을 시작하면 배 가죽이 아플 정도로 그칠 줄 몰랐다. 어떤 날은 기침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얼굴은 점점 핏기가 사라지고 몸은 마른 명태처럼 야위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침을 하다 뜨겁고 비릿한 것이 목젖을 울컥 치밀며 올라왔다. 시뻘건 핏덩이, 각혈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병원에 갈 여유가 없었다. 혼자 객지생활을 하는 형편에 누가 데려다 줄 사람도 없었고 혼자 버텨야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서도 서울대학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도서관에서 구부리고 공부에 전념한다고 하였으나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몸이 너무 허약해진 탓이다.

내가 서울대를 고집한 가장 큰 이유는 학비 때문이었다. 그 당시 서울대학은 일반사립대에 비해 학비가 훨씬 쌌다. 서울대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은 1만 6500원이었지만 B학점 이상만 되면 기성회비 6500원 감면 받아 1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 사립대인 연 ․ 고대의 등록금 5만원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 되는 금액이었다. 9남매를 둔 집안 형편에서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울대에 진학하는 길 밖에 없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책 보따리를 싸서 고향에 돌아 왔다. 심한 기침을 잡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동네 병원을 갔다. 당시에는 엑스레이가 귀해 시골 병원에서는 정확한 진단을 하기 어려웠다. 결국 감기로 진단 받고 한 달 이상 감기약만 먹였다. 그러나 기침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제서 동네 병원 의사는 빨리 광주 제중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엑스레이를 통해 본 내 폐는 이미 하얗게 구름이 낀 것처럼 결핵균이 온 폐를 먹어가고 있었다. 난 폐병을 진단 받았다. 당시 폐병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불치의 병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강조하신 신외무물. 난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불효자가 되어버렸다.

학교를 휴학했다. 교실을 나서는데 내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핑 돌았다.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최선을 다해 살리라 다짐했다. 아버지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차속에서 한사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결코 이 귀한 목숨을 빼앗길 수 없다 다짐하고 계신지도 몰랐다.

이윽고 황룡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열차는 장성역에 다다를 것이다. 그렇게 간절하게 소망했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붉게 충혈 되었지만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강하지만 여리고 여린 만큼 자식 사랑은 단단하고 옹골찼다. 어머니가 한 숨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툭 내 뱉었다.

"금년 농사는 풍년 들것시야~"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맑은 물을 보면 빨래가 생각나고 비가 오면 논두렁의 물꼬를 걱정했으며 눈이 오면 보리농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철저하게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생명이었으며 당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문뜩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난 어머니가 지으신 햅쌀밥을 먹을 수 있을까?

집안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철부지 동생들마저도 내 눈치를 보느라 조용조용 걸어 다녔다. 늦은 밤, 숨 죽여 우는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나지막이 타이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밤을 깨우고 있었다. 베게 잎으로 눈물이 흘러 고였다. 내 나이 열일곱, 세상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난 내 앞에 다가 온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어떻게라도 살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살아 온 그동안의 삶이 간절하게도 고마웠다. 고마운 사람, 미워했던 사람 이 모든 게 부질없는 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찡해지며 가슴 저미듯 눈물이 차올랐다. 북받쳐 오르는 서러운 울음을 이불에 묻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녘 집을 나섰다. 맑은 공기가 더렵혀진 폐를 쓸어버릴 것만 같았다. 눈앞에 황룡강의 물안개가 찬찬히 피어올랐다. 커다란 고니 한 마리가 그림처럼 강을 휘저어 내려앉자 오리들이 푸드덕 떼를 지어 날아올랐다. 멀리서 기적소리가 울려왔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가 강변을 훑고 지나갔다. 이 이른 시각 저 안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 나도 저 기차를 타고 새로운 세상으로 더 큰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문득 내 삶이 너무 고귀하게 생각되었다. 어떻게든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살아야 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내 삶이 얼마만큼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기로 결심했다. 결심이 서자 하루하루가 나에겐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건강을 추스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병마와 싸우려면 체력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탕약을 달이고 아버지는 몸에 좋다는 음식은 무엇이든 구해오셨다. 난 마치 물 빠진 스펀지처럼 영양분을 흡수했다. 그동안 너무 못 먹어 내 몸은 마른 낙엽처럼 시들어 있었다. 점점 난 기력을 찾을 수 있었다. 불과 세 달 만에 볼라 볼 정도로 살이 붙었다. 각혈은 멈추었지만 잔기침은 여전했다. 조금만 심하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것이 황룡강 강변을 한 바퀴 다 돌아도 거뜬했다.

그야말로 약을 한 주먹씩 먹고 독한 주사를 매일 맞아가며 난 폐병과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집에 있던 책들을 야금야금 읽기 시작했다. 집에는 아버지의 고서를 비롯해 형들과 누나들이 주섬주섬 모아 둔 책들이 꽤 있었다. 어머니는 책 읽는 것도 피로하다며 금하셨지만 독서는 유일한 상념의 탈출구였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난 최선을 다했다. 건강을 위해 열심히 먹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살아갈 미래를 생각했다. 난 분명히 병을 이겨내고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6개월이 지난 후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깜짝 놀랐다. 상당히 병세가 호전되었다. 병원에서는 쉽지 않은 일인데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 아들을 살렸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오래 참아 둔 눈물을 기어이 당신의 아들 앞에서 보이셨다. 이제 드디어 한 고비를 넘어섰다.

집안은 다시 활기를 띄고 난 내일을 설계해야 했다. 가슴이 뛰었다. 새롭게 얻은 삶이 너무 고마워 1분 1초가 아까웠다. 1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복학했다. 몸은 몰라볼 정도로 살집이 붙었고 키는 1년 동안 무려 20cm 나 커버렸다. 휴학을 하기 전에는 키가 작아 앞 번호였는데 복학을 하자 뒷 번호로 배당 받을 만큼 훌쩍 자라 있었다.

그렇다고 병이 완쾌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일상생활을 하는데 있어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였을 뿐 여전히 나는 한 주먹에 가까운 약을 먹어야할 정도로 심한 폐결핵 환자였다. 내 약값은 부모님께 큰 부담이었다. 그 시절 폐결핵 약은 무척 비싸 1년 치 약값이면 웬만한 대학교 1년 등록금과 맞먹었다. 나중에는 결혼한 큰 형까지 내 약값을 보태야만 했다. 완치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약을 먹지 않으면 병세가 악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나는 그로부터 폐결핵에서 완전히 벋어나기까지 십 수 년이 걸렸다. 내 젊은 날의 푸른 청춘을 결핵과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주당 블로그와 다음 블로그에도 게재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민주당 블로그와 다음 블로그에도 게재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효석 #뉴민주당플랜 #사형선고 #민주당 대표 #민주당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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