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전국정당이 되는 진정한 길

김영춘은 제2의 노무현이 될 수 없다

검토 완료

노혜경(madraine)등록 2010.10.09 15:19
손학규 대표가 아직 당적조차 지니지 않은 김영춘 전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지명하면서, 부산출마를 거론하고 그것을 제2의 노무현이 되는 길이라 치켜세웠다. 김영춘 지명의 무리함을 민주당의 오랜 숙원인 영남권 공략의 가능성으로 덮어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처방은, 시작부터 본질이 어긋난다. 어긋날 뿐 아니라, 매우 모욕적이다.

노무현이 부산에서 어떤 정치를 했길래?
그리고 손학규, 김영춘이 노무현의 정치의 무엇을 알길래?

근원을 더듬어보자.
노무현은 왜 부산에서 배척당했나? 그가 영남당 한나라당 대통령이 아니라 호남당 민주당 대통령이어서 그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3당야합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노무현의, 김정길의 죄목이었다. "배신자", 이것이 노무현과 김정길을 따라다닌 꼬리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신'이란 꼬리표는 희미해졌을지라도, 사람은 좋은데 당이, 라는 식으로 부산의 정치의식은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었다. 흡사 인질범에게 잡힌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질범을 옹호하게 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부산의 정치의식은 마비되고 왜곡되었던 것이다.

3당야합이라는 상처를 되짚어보지 않고 단순히 민주당이 부산에서 승리하면 지역감정은 해소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부산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 도전해서 마침내 대통령이 되면 제2의 노무현이 되는 걸까? 노무현이 왜 부산에서 도전했는지 그 이유와 정신을 모르면서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대선까지를 포함해서 단 한 번의 선거에서도 부산에서 이겨본 일이 없다. 심지어 대통령이 된 다음 모든 선거에서도 그랬다. 36.7%, 이것이 노무현이 부산에서 얻은 최대의 표다. 탄핵직후 있었던 총선에서도 부산은 평균 37~8%의 표만을 열린우리당에 주었을 뿐이다. 87년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합쳐 60%가 넘는 표를 주었던 부산이, 부산사람 노무현에게 대선에서 준 표는 불과 29.7%였다. 대통령 당선 발표가 나던 순간 전국에서 환호하고 있을 때, 부산노사모는 한 구석에 숨어 울었다. 이 상처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노무현을, 김정길을, 부산의 개혁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부산출신이 서울의 '당선가능한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출마를 한다 해서 노무현의 길이 되는 건 아니다. 노무현이 하고 싶었던 건, 그리고 김정길이 지금도 하고 있는 건, 단지 선거에서 이기고 당선되고 하는 일이 아니다. 승리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부산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우리'를 받아들여주고, 그 받아들임을 통해 과거가, 역사가 부산에 남긴 상처를 치유하여 대한민국의 진보를 묶어두고 있던 '망국적 지역주의'를 극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말을 줄이면 전국정당, 그리고 국민통합이 된다. 그러나, 상층 엘리트적인 정치시각으로는 무슨 표현을 쓰더라도, 노무현은, 김정길은, 그들과 함께 '아직도!!!' 부산에서 헤매고 있는 '자생적 개혁세력'들,은 '3당야합'이 야기한 정치적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고 싶을 뿐이다.

(대선 직후 쓴 제 글 「증오의 재생산을 넘어설 수 있을까?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hadream.com/zb40pl3/zboard.php?id=seoul&no=1576 )

과거 이야기가 아닌 과거 이야기를 하겠다. 부산은 왜, 노무현에게 29.7%밖에 주지 않았나. 그리고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5년간, 단 한 번의 선거에서도 승리를 안겨주지 않았나.

그것은, 부산의 뿌리깊은 정치적 무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의 연원은 어떤 지워짐, 기억의 어떤 부분에 대한 강제적 삭제라는 상처를 통해 구성된 것이어서, 치유가 결코 쉽지 않다.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상처---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 상처란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증명을 통해 보여드릴 수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이 상처를, 수많은 야유와 비난을 무릅쓰고 바이블을 인용해 말할 수밖에는 없음에 비애를 느낀다. 이는 다만 내가 자라면서 접한 이야기의 원천이 바이블이었다는 데 기인할 뿐이니, 한 인간의 형성기의 문화 그 자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올바르다고 믿는 자들이나 재미있다고 느끼는 자들은 마음껏 비난하셔도 좋다.

나는 많은 오해를 무릅쓰고 부산사람들의 내면에 배신자 가롯 유다의 자괴감이 있다고 말하려 한다. 똑같이 스승을 부정한 자이지만 베드로와 유다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다르다. 유다는 적극적으로 스승을 팔았고 베드로는 소극적으로 부인했을 뿐이다. 유다는 스승을 팔았다는 죄책감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한다. 베드로는 배신의 죄책감을 적극적인 사도활동으로 이겨냈다. 나는 이 두 사례를 부산 사람들의 심리에 적용해 보고 그 유사성에 놀랐다.

부산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가지는 부산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노무현 살아생전에는 아직 개별화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물중심의 정치적 사고--라고 단순화시켜 말하지만 결국 이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정치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근대적 정치의식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부산은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면서 가꾸어오던 정체성을 배반당했다는 사실이다. 3당야합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

나는 인물 중심의, 다른 말로 하면 한 공동체가 정체성을 특정 개인에게 위임하는 정치행동이 반드시 불행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우리 사회가 이미 선택했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정치적 결정과정에 인물중심의 사고가 들어맞지 않고, 그래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산의 상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부여된 물적 토대와 정치행위의 습관이 서로 맞지 않다는 것.

("나쁘다/잘못되었다/불합리하다/불리하다"등등의 어휘가 아니라 "불행"이라 쓴 데 유의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부산이 배반해버린 것은 무엇이며, 그 배반이 왜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인가. 

부산은 역사적으로는 개항과 함께 시작된 도시다. 근대로의 이행시기가 바로 부산의 출발이었다. 한 도시의 역사가 그 도시 거주자들의 무의식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는 전적으로 그 도시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교육하는가에 달려 있다. 농경사회가 어디나 비슷한 모양과 문화를 지니고 있다면, 도시들은 서로 많이 다르다. 그것은 도시가 근대적 분화의 흐름을 타고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 사람들은 항구도시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내면화하면서 자라났고, 항쟁의 도시, 야당도시("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거부자"로서의 "야당"입니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정체성을 성숙의 동력으로 삼아왔다. 속되게 표현해서 "부산이 일어나면 나라가 뒤비진다", 이것이 적어도 3당야합 이전까지의 부산의 자부심이었다. 부산의 예수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도시라는 자부심 그 자체였다. 백산 안희제로 대표되는 일제하의 저항에서부터, 임시수도시절을 거쳐  4.19에서 부마항쟁으로,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시절동안 부산은 물적 토대에 걸맞는 사회적 자아를 발달시켜 왔다. 지금은 다른 신문이지만, 80년에 폐간되기 전까지 부산의 국제신문은 한강 이남의 가장 큰 신문이자 대표적인 비판적 정론지였다. 부산 사람들은 박정희의 소유가 된 부산일보가 아니라 국제신문을 선택하는 성숙한 정치의식을 보여주었다.  

다만, 김영삼이라는 정치적 거목에게 부산의 정치적 자아가 집단적으로 의탁되고 있었다는 것--또는 언론에 의하여 그렇게 간주되어 버렸다는 것이 충분히 근대적 도시가 되지 못한 당시의 문제였을 뿐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도시 부산의 내면성은 이런 색깔과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삼당야합은 이 자부심을 무참히 파괴해 버렸다. 

나는 부산사람이지만 3당야합이 감행되던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 그 충격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88년 서울로 이사와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다음 95년에 부산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는 97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었다.(당시 권영길에게 한 표 주려고 투표함 들어가서까지 고민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산이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어떻게 분열하고 파괴되고 있는지 잘 느끼지 못했다. 외지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으로서의 시간적 지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이 자기가 떠난 시절의 추억에 고착되는 것처럼, 나역시 한동안 부산의 87년의 추억에 매몰되어 있었던 셈이었다.   

3당 합당이 야기한 상처를 서서히 느끼게 된 것은 97년 대선 이후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뜻밖의 사실을 깨달아갔다.
부산의 정체성에 대한 밥상머리 교육이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광주의 어떤 가정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갈 것이다.

-- 오늘 한글날이란다. 한글날 일제시대에 조선어학회라는 단체가 있었어. 한글날이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만을 기리는 날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이분들이 목숨걸고 한글을 지킨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좋은 우리말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야. 5월 18일날에도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어. 독재자들은 그분들이 폭도라 했지만, 이제 역사는 그분들이 순국선열이라는 것을 기념하게 될 거란다.

꼭 이런 식은 아니어도, 민족과 지역의 역사에 아로새겨진 슬픔과 자랑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레 추측하건대 지난 십여년간 부산의 밥상머리에서는 부모자식간에 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정치는 더러운 것이고 항상 지들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라는 대화나 오갔을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해서 돈 벌어야 한다는 대화가 오갔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런 것을 대화라 하기는 어렵다. 부산이 민주화의 성지였고 그 오랜 세월동안 억압과 불의에 항거한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교사들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이든 교사들은 잊어버렸거나 무력해졌고 젊은 교사들은 모르거나 왕따가 두려워서 이야기하지 않기 일쑤가 아니었을까.

부산의 언론들도 부마와 6월 항쟁의 정신을 발전시키지 않는다. 그냥 특정기념일로서 형식적으로 이야기할 뿐.

한 공동체가 자기 역사를 말하지 않을 때 그 도시의 지역성은 파괴되고 장소만 남는다. 부산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차마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이런 변화가 3당야합의 가장 큰 후유증이라 생각한다. 3당야합은, 부산의 민중에게 사랑받아 정치적 생명을 얻은 정치세력이, 그 민중을 배반하고, 민중이 저항해온 군부독재 본류 세력에게 투항해버린 사건이다. 이로써 부산의 그 길고 찬란했던 자부심 넘치는 저항도시로서의 역사가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김영삼과 그 패거리들의 배반인 3당야합이 부산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배반의 낙인이 되고 만 일이 된다. 부산은 그 배반을 이겨내지 못했다. 보도연맹 시절로부터 비롯된 "빨갱이"에 대한 이율배반적 두려움, 박정희 전두환 정권 내내 자행된 호남차별의 저급한 본능적 쾌감, 이런 것들이 김영삼에 대한 애증과 결합하여 부산을 점령하였고, 그리하여 부산은 반성하고 새로 시작하는 베드로보다 정치적 자살을 한 유다를 택하고 말았다. 

나는 87항쟁 직후 외지로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이라 그 차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주욱 살아온 사람들은 너무나 서서히 변화한 탓에 부산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밥상머리 교육의 부재가 반드시 부산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전반적 문제점은 국민 전체를 향한 주체에 대한 교육, 다른 말로 정치교육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민주시민을 위한 학교에서의 정치교육이 없다. 성인들을 상대로 한 재교육 역시 없다. 이런 공백을 타고 족벌언론들이 정치적 아젠다의 창출을 주도하며 성인들의 정치의식을 반죽해 왔다.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떤 사회도 그 구성원들을 위한 정치교육이 없었던 사회는 없었다. 모든 신화가 정치교육이며, 모든 정당활동이 정치교육이었다. 정치란 공동체의 일을 합의에 의해 추진하는 과정이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 일을 추진할 합의된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랬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합의에 이르기 위한 정당한 절차에 대한 합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의 기준이 파괴되어 있다. 지성적 사고가 실종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어휘가 우롱당하고 있다. 군사독재가 저지른 문화적 테러의 지독한 후유증이다.

(그 후유증으로 이명박 정부까지 탄생했다!!!) 

나라 전체는 지적 영양이 결핍할 때 자구책을 스스로 마련하기도 한다. [안티조선 우리모두]나 [서프라이즈]의 성공은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정치교육 영양 실조의 반증이라 볼 수도 있다. 이런 치유의 흐름을 타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다시, 반동의 물결이 휩쓸고 간 2008년 촛불이 나타나 주었다.

그러나 부산은 좀더 심각하다. 좀더 공동체적이라 지식사회와 민중이 밀착해서 움직이는 충청권이나, 개별화가 잘 진행되고 있는 수도권, 80년대의 상처와 오랜 왕따로 말미암아 정치의식이 각성된 호남, 반면에 집권세력의 본산으로서 왜곡된 자부심을 지닌 대구경북 등과는 달리, 부산은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셈이니까.

지난 부산 시장 선거는, 이러한 부산의 상처를 근원에서부터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나는 처음부터 김정길을 후보로 밀었고, 왜 문재인이 아니라 김정길인가 하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노무현이 가고 없는 지금, 노무현의 상처와 노무현의 부산에 대한 사랑과 노무현의 정치를 똑같이 견디어낸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민주당적으로 출마했느냐는 질문과, 심지어 비난을 수도 없이 받았다. 상대후보는 텔레비전 토론때마다 "민주당 후보 김정길"을 또박또박 수십번도 더 불렀다. 그러나 정면돌파, 민주당 이름으로 이긴다! 이 명제가 어떤 의미인지를 뼛속까지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그가 김정길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계기로, 부산의 무의식은 조금씩 아물고 있다. 역사가 낳은 상처는 그냥 아무는 법이 없다. 과거사 진상규명이 필요한 이유다. 부산 사람들에게 노무현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말았지만, 그의 정치적 샴쌍둥이 김정길이라면 조금은 해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손학규 대표가, 김영춘 전의원이 부산을 어떻게 생각하고 부산의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건, 김영춘이 부산출마를 결심했다면서 전국정당화의 적임자 운운하며 치켜세우는 건 그 고독과 고난 속에서도 부산을 지켜온 부산개혁세력들을 모욕하는 일이고, 그 일이 제 2의 노무현이 되는 길이라는 주장은 노무현의 도전이 지닌 사랑과 상처에 대한 심각한 몰지각이다.

마무리하겠다. 손학규 대표가 자신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으로 김영춘 전의원을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지명할 수 있다. 아직 당적도 없는 사람을 들여오는 데 따른 대가도 알아서 치르면 된다. 한나라당-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창조한국당이라는 기묘한 정치이동경로를 지닌 김영춘을 지명한 대가도 두 사람이 치르면 된다.

그러나 그 명분이 '부산공략을 통한 전국정당화'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김영춘은, 3당야합 이후의 한나라당에서 김영삼과 함께 정치를 한 김영춘은, 출마를 해서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표를 좀 얻어와서 당선이 될지라도, 노무현이 이루고자 했던 일을 결코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해낼 수 잇는 사람은 오로지 김정길과, 척박한 부산의 고통과 상처를 감내한 부산의 개혁세력, 바로 그 사람들 뿐이다.

그래서 나는 김영춘 최고위원 지명에 반대하고, 노엽고 슬프다. 부산 때문에!!!

덧붙이는 글 서프라이즈에도 동시송고합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