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에 대한 생각

[서평] 어슐러 K. 르 귄 <빼앗긴 자들>

등록 2010.10.11 15:12수정 2010.10.1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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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의 겉그림. ⓒ 황금가지

<빼앗긴 자들>의 겉그림. ⓒ 황금가지

극도로 복잡한 몇 개의 개념이 머릿속을 맴돈다. 자유와 자유의지, 의무와 자발성, 동의와 복종, 사랑과 지배, 합의와 규율, 가난과 풍요, 절제와 욕망, 국가와 공동체, 사회와 개인…. 이 어휘들이 서로 대조되거나 상반된 개념들만은 아니지만, 서로의 가치를 경쟁해야 하는 개념이 된다면 어떨까.

 

예컨대 자유와 자발성의 경우를 보자. 자명할 것처럼 생각된 개념이지만, 구체적인 정황에 대고 이 개념을 물어보면 자명함의 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빼앗긴 자들>에서 아나레스의 거주민은 누구나 열흘에 하루씩은 중노동을 한다. 강제가 아닌, 그렇다면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일까, '자발적'인 수행일까. 이 중노동은 합의된 것일까 공동체가 정해놓은 규율일까.

 

결혼제도가 없는 아나레스에서 결혼제도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반려라는 어휘는, 사랑이라는 자발적 장치가 아니면 지속되지 못한다. 그러나 몇 십 년을 두고 반려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랑때문일까 상호소유와 지배의 개념이 은밀히 개입하는 걸까.

 

소설 속에서 아레나스를 지배하는 이념의 창시자 오도는 이를 자유에 기초한 약속과 그 약속의 성실한 이행으로 보았다. 무서울 정도의 인간적 깊이를 요구하는 개념이다. 이를 강제에 의거한 구속과 이익을 박탈하는 징벌의 두려움으로 무장한 사회의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 늘 입던 옷처럼 익숙해서 반성한 적이 없던 언어와 사건과 정황들이, 하나하나씩 낯설고 서툰 것으로 변한다. 

 

국가주의 '북한'과 무정부주의 사회 '아나레스'

 

아마 그럴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낯선 풍경들이 펼쳐지는 아나레스는, 자본주의 사회, 르 귄식 신조어로 소유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머릿속의 북한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과학적으로 북한은 국가주의에 가깝고 아나레스는 무정부주의적 사회라는 차이가 있으나, 낯설고, 쉬이 다다가기엔 내가 지닌 언어들이 서툴고, 내 인식틀이 엉성해서 잘 이해되지 않는 것. 주인공 쉐벡이 우라스로 가기 위해 올라탄 우주선 안에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생생하게 묘사된 '소통불가능한 상황'일 것이다.

 

SF(에스에프)라는 소설적 장치가 주는 미덕은, 먼 우주 어느 곳에선가, 라는 메타포가 이 낯섦을 쉬이 받아들이게끔 유도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규정에 의하면 테라인이고, 아나레스와 우라스 어느쪽과도 특별히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일 이유가 없으며 심지어 우라스의 두 제국 이오와 츄 사이에서도 등거리를 유지하는 위치다.

 

물론 내가 이런 시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르 귄이 처음부터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르 귄은 철저하게 아나레스인 쉐벡의 왼쪽 귀 뒤편 어디쯤에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장치해놓고 독자를 끌고 다닌다. 독자는 쉐벡의 경험과 사유가 발전하는 경로를 따라 아나레스의 삶을 살고 회의하고 분노하며 탈출을 경험한다.

 

우라스에 '온' 쉐벡과 함께 우라스의 풍요를 맛보고 감탄하며, 의심하고 다시 분노한다. 그리하여 귀환한다. 심리적으로 독자는 아나레스인이다. 아나레스를 현존하는 사회주의사회라 생각하고 우라스를 자본주의 사회라 가정한다면, 한국의 2010년에 살고 있는 독자나 미국의 1974년에 살고 있는 독자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리라. 그래서 독자는 알고 보면 테라인, 척박한 달 아나레스의, 지닌 것이라고는 자기 지성밖에 없는 쉐벡을 의심할 바 없는 선의를 가지고 도와주는 테라인이다.

 

이 장치를 통해 비로소, 무정부·무소유의 땅 아나레스에 세운 170년짜리 '사회? 공동체? 나라!'의 본질이 두려움없이 다가온다. 이 지구상에는 없는 나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아레나스를 들여다보자.

 

르 귄은 왜 가뭄으로 척박해진 땅을 무대로 삼았나

 

아나레스를 읽어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의문은, 오도니안의 삶이 가능하게 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서 르 귄이 하필이면 왜 수천년간의 가뭄으로 극도로 척박해진 땅을 무대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흡사 오늘의 북한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듯하다.

 

아레나스는 이미 물이 부족한 달나라였지만 쉐벡의 청년기에 또다시 끔찍한 가뭄이 찾아든다. 서로를 부양하는 것이 공동체적 결속의 가장 중요한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배급된 식량을 나그네들에게 나눠주지 않기 위해 적대감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생겨난다. 공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의 최소한이 무너지면 사적 소유의 욕망이 머리를 들 수밖에 없다는 주장일까. 아니면, 아레나스의 이상은 그런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 만큼 견고하고 위대하다는 이야기일까.

 

어떻든 황량한 달나라 아나레스라는 설정 자체가 지닌 함의가 현실사회주의의 낙후된 경제현실과 겹쳐질 때 르 귄이 주장하는 바가 보다 선명해진다. 사적 소유의 욕망이나 풍요를 누리는 즐거움보다 인간결속의 경험이 더 즐겁고 위대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결핍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

 

실제로, 모든 것이 풍요롭고 그야말로 나무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는 나라를 상상할 때 무소유의 공동체보다 각자의 곳간에 가능한 한 많이 끌어모아두고 문 앞에 큼직한 자물쇠를 채워두거나 보초를 세워두는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진실이지 않은가.

 

물론, 현실사회주의의 경우 아나레스에서 일종의 사회적 필요에 의한 자발적 조직으로 가정된 PDC 대신 당-국가 체제가 있고, PDC의 보이지 않는 권력대신 명백한 국가권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소유가 철폐된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었을 뿐이다.

 

르 귄이 상상한 아나레스는 심지어 햇볕을 쬘 권리까지도 공유해야 하는 사회다. 그러나 아나레스가 우라스의 풍요를 포기하고 선택한 장소는 테라인들에게는 자신들의 탐욕이 망가뜨린 장소와 같은 곳이었다. 달리 말해 아나레스는 테라의 미래였던 것이다. 테라인들이 여러 가지 체제를 통해 지구를 실험하고 망가뜨린 연후에 발견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오도니안들은 우라스와 아나레스에서 동시에 실험하고, 우라스가 아니라 아나레스에서만이 이 실험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풍요와, 그 이면을 지배하는 소유의식은 인간결속이 성숙함을 이루기엔 충분히 고통스럽지 않다.

 

르 귄은 아나레스의 척박함을 오도니안 사회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지만, 고통이 상존하는 땅이야말로 인간성의 고결함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우리를 한데 모으는 것은 고통입니다.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마음먹은 대로 따르지 않으며 강요를 받으면 증오로 돌아섭니다. 우리를 묶는 끈은 선택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것은 형제애예요. 각각이 홀로 고통 받아야하는 고통속에서, 굶주림 속에서, 가난속에서, 희망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애를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만 했기에 그것을 압니다."

 

이는 아나레스를 동경하는 아나키스트들 앞에서 쉐벡이 한 말이다. 불멸의 총서 시리즈에 묘사된 김일성의 고난의 행군 시절의 묘사를 보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자유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들의 자유 말고는 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개인과 개인사이의 상호 협력이라는 하나의 원칙외에는 어떤 법률도 없습니다. 자유로운 유대라는 하나의 원칙외에는 어떤 정부도 없습니다(......) 우리는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라 나누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유복하지 않아요.(......) 그게 당신들이 원하는 아나레스라면 그게 당신들이 추구하는 미래라면 그러면 말하건대 당신들은 빈손으로 그 세계에 와야 합니다. 벌거벗은 채. 과거도 없이. 재산도 없이. 타인에게 온존히 기대어 와야합니다. 혁명은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당신들 스스로가 혁명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혁명은 당신의 영혼에 있거나, 아니면 어디에도 없습니다."

 

쉐벡이 이 연설을 끝맺기도 전에 우라스의 군대가 아나키스트들을 사살했다. 170년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다. 쉐벡의 연설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성의 드높은 부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뜻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이 소유주의자들에겐 소멸시켜야 할 위협이 된다는 것을 르 귄은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소유주의자들의 위협이 되지 않는 땅은 오직 아무것도 착취할 거리가 없는 척박한 달나라 아나레스--사실 알고 보면 혹독한 노동이 필요한 광산이 있는 곳--뿐이라는 것일까.

 

소유주의자들의 정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의 존재는 위협이고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욕망이 부정당하는 것을 존재의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소유주의 사회의 하층부에 속하 군인들까지도 서슴없이 이들을 적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 고통이 인간결속의 요건이라면, 북한이 90년대 초반의 대홍수와 이어지는 기근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했던 고난의 행군을 통해 결속이 강화되었는가, 아니면 체제가 느슨해 졌는가. 또는 쉐벡과 같은 깨달음에 이르렀는가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좀더 공부가 필요한 일이겠다.

 

쉐벡이 우라스에서 경험한 부자유와 불평등

 

이제 주인공 쉐벡을 통해 체제를 평가해볼 차례다. 쉐벡은 복잡하고 민감한 인물이다. 어릴 때 그는 햇볕 한 줌 때문에 소유를 박탈당한다는 것의 고통을 절절히 배운다. 자라면서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한 두뇌와 실력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소외되고 고립되는 경험을 하며, 열두 살 때는 친구인 카타그브를 감옥에 가두는 놀이를 통해 자신의 자유뿐 아니라 남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끔찍한 일임을 알게 된다.

 

쉐벡의 성장과정은 아나레스가 지상낙원이 아니며 오히려 개인의 창조력과 자유를 보장하기엔 턱없이 척박하고 협량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쉐벡만이 아니다. 공동체적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는 모든 개인에게 그 개인이 탁월하든 열등하든 상관없이 일정한 수준의 부자유와 자발적 의무를 가장한 규율을 강요한다. 다만, 탁월한 개인만이 그 경계를 뚫고 다른 세계로 탈출을 감행할 수 있다. 쉐벡은 처음에는 이 탈출을 우라스를 향해 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라스에서의 삶에 내표된 근본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차츰차츰 경험하며, 아나키스트들의 집회를 살상으로 진압하는, 즉 정신의 자유를 요구하면 물질의 폭력으로 맞선다는 소유주의 사회의 참상을 목도하며 진정한 자유는 내면에 있는 것임을 발견한다.

 

쉐벡의 정신이 아레나스의 현실과 만나며 그리는 궤적은 묘하게도 이 소설의 제목이 주는 뉘앙스의 변화와 겹쳐진다. 'The dispossessed'를 번역자는 '빼앗긴 자들'로 번역했지만, 이 제목은 원소설의 부제로 달렸다는 '애매모호한 유토피아' 만큼이나 애매모호하다. 관용적으로 the dispossessed는 추방자들을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dispossessed는 possess의 dis와 possessed의 dis를 다 포함하는 것 같다.

 

제목의 '빼앗겼다'라는 피동태는 소유를 '빼앗겼다'라고 해석해야 옳은 것일까. 그런데 달리 읽으면 dispossessed는 사로잡힘으로부터의 해방, 즉 욕망으로부터의 탈출로도 읽힌다. 스스로를 포획하고 있는 소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자기로부터의 추방'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지만, 진정한 자유란 자발적으로 고통을 감수하면서 dis-possess-ed 하는 일 아닐까.

 

우라스로 '오'고 아나레스로 돌아'간'다

 

이 소설을 쓸 당시 르 귄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나 드골로 표상되는 아버지의 나라가 몰락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이 끝났고, 미국은 2차대전 후 새로운 패권국으로서 소련과 냉전적 경쟁의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냉전은 소설 속에서는 벽으로 형상화된다. 베를린장벽의 벽, 철의 커튼이라는 벽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쌓인 벽.

 

<빼앗긴 자들>은 시작하는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각종 벽의 메타포를 보여준다. 우라스와 이어진 유일한 우주공항을 둘러싸고 있는 아나레스의 벽을 비롯해서, 12살 소년시절 만들었던 감옥의 벽을 지나 우주선의 선실에 '갇혔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를 분노하게 했던 벽들. 벽들, 벽들.

 

그러나 진정으로 그를 힘겹게 하는 벽은 물질세계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 내부에 있었다. 쉐벡은 우라스에서 그를 안내하고 도와주는 젊은 과학자 파에에게서 벽을 느낀다.

 

'벽'이다. 쉐벡은 지금 그가 부딪친 벽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젊은이의 매력과 정중함, 그리고 무관심이었다.

 

이러한 벽은 서로 다른 생활습관을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데 따른 것일 수도 있고 파에의 마음 속에 내재한 우월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쉐벡을 진정으로 좌절시킨 것은 쉐벡을 우라스로 오게 만든 바로 그 동시성의 원리에 대한, 동시성의 원리에 입각한 엔서블이라는 장치에 대한 우라스 사람들의 몰이해가 아니었을까.

 

앤서블은 시간의 가역성 원리로부터 발전시킨 동시성의 원리를 응용한 순간통신기구다. 쉐벡이 우라스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앤서블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우라스인의 기대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쉐벡 역시 이를 완성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엔서블에 대한 우라스인과 쉐벡의 꿈은 달랐다. 쉐벡은 이 기구를 전우주를 통틀어 동시적인 사유의 나눔과 공존을 이루어줄 수단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우라스인들은 이를 순간이동장치, 즉 일종의 수송수단으로 본 것이다. 자신의 연구가 우주의 평화와 공존이 아니라 소유주의자들의 탐욕에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쉐벡은 위기감을 느낀다. 가장 큰 벽은, 우주를 바라보는 가치관의 차이이다. 결국 진정한 자유는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인간결속을 이루려는 아나레스에만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며, 쉐벡은 스스로를 둘러친 벽 너머의 고향으로 귀향하고자 한다. 빈손으로.

 

소설 <빼앗긴 자들>이 전개되는 소우주에는 세 종류의 나라가 있다. 우라스에 있는 국가주의 나라와 소유주의 나라, 그리고 아레나스에 있는 무정부·무소유주의 나라. 주인공 쉐벡이 성장하고 의문을 품으며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독자는 아레나스의 사회구조와 사상적 토대를 배우고, 함께 의문을 품으며, 우라스로 탈출하고 되돌아간다. 그 귀환은, 소설의 앞부분에서 18세의 쉐벡이 더스트 지대에서 연구소로 돌아오며 생각한 그대로다. 즉, 같은 강을 두 번 내려갈 수 없으며, 똑같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귀환을 내포하지 않은 항해는 없다. 오도의 묘비명처럼 전체가 된다는 것은 부분이 되는 것. 진정한 여행은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항해는, 많은 정신적 가치를 얻고 시간을 쌓았지만,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이것이 오도니안의 나라라면, 이 나라는 아무데도 없는 나라이다. 현실에서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모두 일정한 물질적 성취 위에 구성되어 있고, 그 성취가 국가의 목적이 되는 한, 언제나 불완전하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라스로 '오'고 아나레스로 돌아'간'다고 쓴다. 우라스가 보다 나의 나라에 가깝다는 듯이.

2010.10.11 15:12 ⓒ 2010 OhmyNews

빼앗긴 자들 (초판 표지)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2002


#어슬라 르귄 #빼앗긴 자들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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