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의 종말

등록 2010.10.29 13:54수정 2010.10.2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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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마다 불꽃이 튀었다. 80년대의 마지막 해, <봄우뢰>를 읽었다. 나는 아직 어렸다. 정의를 믿었다. 정의의 원형질을 탐했다. 그것은 현실에는 없었다. 군인이 대통령이었다. 군인은 총칼로 시민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때로 칭송했다. 나중에 커서, 출세해서, 세상을 바꿔보라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어음이 아니다. 어린 내가 믿었던 정의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지불되어야 하는 청구서였다. 그러나 정의를 흔쾌히 결제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시절은 "온건한 사회운동까지 전면 봉쇄하여 가장 극단적 운동이념을 가장 호소력 있게 만든" 때였다. 군사정권은 소련·중국·북한에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했다. 그것이 표지석이었다. 군사정권이 한사코 덮으려는 이론에 군사정권을 기어코 뒤엎을 무기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시절,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전두환·노태우의 반대말이었다. 그러다 <봄우뢰>를 읽었다. 그것은 김일성의 전기였다. 용기를 얻고자 했으나, 책을 읽는 것부터 용기가 필요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이제 그 불꽃만 남았다. 내용은 아련하고 희미하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김일성이 조선인 마을에 직접 잠입했다. 항일운동에 비협조적이었던 주민들은 김일성을 만나 감화 받고 스스로 무장투쟁의 응원군이 된다. 무력이 아닌 감동으로 역사를 바꾼다는, 민중이 스스로 각성할 때까지 지도자는 무한히 인내하며 지도한다는 그 책의 대강은 내가 찾던 정의였다. 무릇 정의로운 정치는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숨죽여 읽던 그 책을 언제부터 외면했는지 기억에 없다. 나이가 들면서 정의가 아닌 과학에 끌렸다. 정의는 곧잘 패배하였으므로, 정의를 구현하려면 지혜가 필요했다. 분석하고 판단하는 힘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레닌과 마르크스와 헤겔과 칸트로 이어지는 지루한 책에 빠졌다. 주체사상을 폐기했다기보다 잊어버렸다. 그것은 정의를 설명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일성과 마르크스 사이를 오가는 거대한 진자운동을 하며, 20대를 보냈다. 20대가 끝날 무렵, 나는 두 혁명가 모두와 멀어졌다.

 

그 이별을 누구처럼 대외적으로 선포한 일은 없다. 사상·이념은 금연하듯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급진 이론의 니코틴은 줄어들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호수의 물결과 같다. 최초의 충격은 사라져도, 잔잔한 파동은 언제까지고 계속 된다. 그래서 나는 전향을 믿지 않는다. 전향했다는 자들의 선언을 믿지 않는다. 차라리 자기 연민의 힘을 믿는다. '전향 주사파'는 군중의 주목 없인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자기 연민에 가득한 과대망상가일 뿐이다.

 

1998년 봄, <한겨레> 대담 자리에 나온 황장엽을 만났다. 서울 남산 근처 안기부 안가에서 그를 보았다. <봄우뢰>의 잔잔한 파동을 오랜만에 느꼈다. 늙은 망명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는 전향 주사파가 아니었다. 그는 깐깐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난 김일성의 이론서기로 7년 이상 일했어. 현 단계에서 자본주의 이념을 지지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유물론자요."

 

그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한국에 온 것은 아닌 듯 했다. 그의 망명은 확실히 '이념적'이었다. 그는 여전히 정의를 믿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정의를 구현하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다만 늙은 몸뚱아리가 그의 행동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정의에 대한 그의 관념은 안기부 안가의 담장을 넘지 못했다. 그에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0여년에 걸친 기자 생활 동안,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전·현직 운동가들도 만났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를 '주사파'라 한다면, 나는 지금껏 딱 한 명의 주사파를 만났다. 황장엽이다. 주사파의 혐의를 받는 한국의 운동가 중에 진짜 주사파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저 정의라는 관념에 남들보다 강하게 끌리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계급 모순보다 민족 모순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현실의 부정의를 해소하려는 노력 끝에 이런저런 사상과 이념을 얄팍하게 접해보았을 뿐이다. 황장엽은 달랐다. 그가 한국에 온 목적은 주체사상을 '구현'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념을 중심에 두고 현실을 바꿔내려는 사상가였다.

 

한국에서 주체사상가·주체운동가를 본 적이 없으므로, 나는 황장엽을 통해 주체사상의 실체를 짐작한다. 그가 믿었던 것은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선한 인간의 무한한 에너지를 황장엽은 '천리마 운동'에서 보았다.

 

'천리마 운동'은 생산력 증대를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건설을 시작하고, 중-소 분쟁 과정에서 자주노선을 지키면서, 1960년대의 북한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가장 큰 걸림돌이 관료주의였는데, 이를 해결하려고 김일성이 현지에 내려가 한 달씩 머물며 노동자들과 직접 대화했다.

 

어느 탈북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천리마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는 사람들이 대문을 모두 열어 놓고 살았다. 서로 도와주고 협조하며 한 가족처럼 살았다. 옆집 사람이 아프면 동네 사람들이 다투어 병문안을 갔고, 먹을 것이 있으면 아끼지 않고 주었다. 1960년대 북한은 사람이 살 만한 나라였다."(<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에서 재인용)

 

황장엽은 그 경험을 이념으로 표현했다. 주체사상이다. 지도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생산력 증대에 성공한 60년대의 경험은 '무오류의 수령-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성-인민의 창발성'으로 연결되는 주체사상으로 탄생했다. 한국 망명 이후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초가 된 '사람 중심 사상'을 '인간 중심 철학'으로 바꿔 이름 붙이고, 이를 한국 사회에 적극 소개했다.

 

한국의 보수파들도 반기는 그 내용의 핵심은 "인간이 실천적 활동의 주체가 되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되, 전체 사회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나의 이익이라는 통찰"에 있다. 논리 구성은 주체사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을 수용하는 한국 우파야말로 어느 면에서는 '주사파'인 셈이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에는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정치 분야의 원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인민 대중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한국의 기업 운영 방식을 비판하면서 일종의 '집산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인민에게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 헌신 분투하는 사람은 일부 절차를 어기는 경우가 있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자"라고 말할 때, 그는 독재자를 옹호하는 논리로 빠져든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하면 '무오류의 수령론'에 가닿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주체사상은 종교와도 만난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설파한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설교한다. 그런 개인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공동체의 번성과 평화를 약속한다. 다만 절대로 민주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민주적인 종교는 없다. 특출한 개인을 숭배하는 것이 종교다. 숭배의 과정까지 소수의 지도자가 지배한다. 종교 지도자는 무오류이며 그 자체로 신성불가침이다. 지도자에 대한 반대는 곧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다. 황장엽은 계급 독재가 아니라 (사회주의라는) 종교에 감동 감화된 신도들이 스스로 충성하며 평화로운 집산 공동체를 이뤄가길 꿈꾸었다. 1960년대의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

 

북한의 현실과 관련해 황장엽이 불화한 것은 오직 김정일이었다. 황장엽은 김일성을 수령으로 인정했으나, 김정일에 대해선 그렇지 않았다. 김정일은 교황의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김정일이 한사코 덮으려는 것에서 김정일을 쳐낼 무기를 발견했다. 미국과 한국이었다. 한국 우파가 귀하게 여긴 것도 국가주의·사회주의·인본주의가 묘한 긴장을 이룬 황장엽의 추상적 이론이 아니었다.

 

황장엽은 인간중심철학의 방향으로 북한을 개조하려면 "한국이 미국에 의거하여 북한의 독재체제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라고 주장했다. 황장엽이 '인간 중심 세상'을 북한에 만드는 꿈을 꾸는 동안, 한국 우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을 비판하는 도구로 그를 앞세웠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 사유가 북한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남한 반공주의의 선전 도구가 되는 기묘한 일에는 역사적 뿌리가 있다. 박정희 시대의 철학자 박종홍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며 '반공 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는 국민교육헌장의 논리구조는 주체사상과 거의 똑같다.

 

국가적 부의 증대를 최고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천리마운동'과 '새마을운동'은 닮았다. 동원할 자원이 마땅치 않으므로, 인민(국민)이 스스로 생산력 증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적 세뇌의 과정 또한 닮았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복종이 필수적이라는 믿음도 닮았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유보해도 좋다는 정치론도 닮았다.

 

황장엽은 북에서 남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다. 그의 등장은 한국에서 암약해온 '70년대식 국가주의자'의 재림이었다. 황장엽은 자신이 기초한 주체사상에서 국가주의의 요소를 거세하고 인본중심철학만 추출하려 했으나, 한국의 우파는 이를 오히려 국가(체제)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차용했다.

 

'뉴라이트'로 불리는 전향 주사파들이 박정희는 물론 이승만까지 찬양하고, 결국 이명박의 충실한 우군이 된 것도 주체사상의 국가주의적 성향에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한동안 김일성·김정일의 독재를 수긍했다. 북한 체제의 유지·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논리였다. 김일성·김정일의 자리에 박정희 또는 이명박을 대체했을 뿐, 그들은 절대로 전향한 것이 아니다. 사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군중의 '창발적 충성'을 토대로 탁월한 엘리트의 지도에 따라 공동체 전체가 부강해지는 것을 꿈꾼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의 프로젝트는 거듭 실패했다. 황장엽의 죽음이 뜻하는 바는 여기에 있다. 그의 사유는 북에서 변질되었고, 남에서 악용됐다. 주체사상의 논리구조는 국가주의·체제이데올로기와 반드시 만난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에서 (자신이 입론한) 철학과 (김정일이 변질시켰다 믿는) 정치이론을 분리하려고 애썼지만, 그의 철학 안에 이미 '반 민주주의'의 독소가 포함돼 있다는 것은 몰랐다. 국부의 증대가 곧 시민 개인의 행복이라는 믿음이 횡행했던 1960~1970년대에 그의 사상은 이미 진화를 멈췄다. 그걸 21세기에 끄집어내면 어떤 사탕을 발라도 국가주의·독재이념일 뿐이다.

 

민주주의와 결정적으로 충돌하는 주체사상의 논리구조에 대하여,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한국의 국가주의 우파는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엘리트의 독재를 마음 깊이 갈구한다. 미국과 같은 강성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들의 이념이 주체사상과 다른 게 무엇인가. 한국의 민족주의 좌파는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을 추구한다.

 

그들은 엘리트의 독재를 마음 깊이 거부한다. 강대국의 억압에서 벗어나 민주시민들이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국가 공동체를 희망한다. 그들의 이념은 주체사상을 용인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침묵하는가.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 자,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자, 민주주의의 폭넓은 적용을 꺼리는 자, 이들 모두 솔직해져야 한다. 당신이 내건 민주주의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1998년 5월의 봄날, <한겨레> 대담 자리에 나온 황장엽은 남산 안기부 안가의 소파에 앉아 말했다.

 

"그저 집안에 앉아서 죽지는 않을 것이오."

 

2010년 10월의 가을날, 황장엽은 서울 논현동 국정원 안가의 욕실에 앉아 세상을 떴다. 황장엽이 살아있을 때, 남과 북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의 말과 글을 빌려 제 이익을 취했다. 국가를 내세워 특권집단의 이익을 지켰다. 사람중심사상으로 득을 본 인민은 남과 북에도 없다. 이명박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 이 글은 필자가 쓴 <한겨레21> 832호 '영원한 금기, 주체사상을 말하다' 기사를 발췌·재구성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안수찬씨는 현재 한겨레21 기자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10.29 13:54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안수찬씨는 현재 한겨레21 기자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 #북한 #황장엽 #봄우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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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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