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맞은 번호는 아니지만...안녕을 고하며

40년 세월을 관통한 소중한 집 전화번호 '856-4435'

등록 2010.11.11 11:36수정 2010.11.1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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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전화가 안되네, 이상한 안내만 나오고…."

"엄마네 전화 번호 바꿨어, 올케네 번호로. 이제 그 번호론 안돼…."

 

친정에 전화가 안돼서 언니한테 확인을 해 보니 번호가 바뀌었다는 대답입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올케가 애들을 데리고 시어머니, 그러니까 제 친정어머니 집에서 살기로 하면서 이삿짐에 자기 집 전화번호까지 싣고 왔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 번호가 어떤 번혼데….'

 

그때처럼 올케가 야속하기는 처음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자기 편한 대로 했을 거라 싶으니 부아가 치밀어 며칠이 지나도 속이 상했습니다. 집에 붙박여 있는 노인네에게 이따금이나마 걸려오는 일가붙이들의 전화마저 불통되게 할 건 뭐며, 식구 수대로 핸드폰이 있는 처지에 이사를 한들 당장 답답할 일도 하나 없을 텐데 꼭 그렇게 자기네 위주로 했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전화번호 따위가 뭐라고, 상황따라 바뀔 수도 있지 하실 테지만 우리 가족에게 그 전화번호는 번호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사람은 세월따라 수명을 잃어가지만 오래 가까이 해온 물건들은 연수가 지날수록 생명을 지닌 듯 정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구체적이고 손때 묻은 살림살이가 아닌 조합에 불과한 추상적 번호에서조차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일을 계기로 새삼 느껴집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처음 전화를 들여놓은 후 한 번도 바뀌지 않았으니 그 번호는 얼추 40년을 한 식구가 되어 한 세대가 훨씬 넘도록 우리 가족의 대소사를 실어 나르며 집안의 지난한 역사를 지켜보았습니다.

 

우리 4남매의 대학 합격과 낙방 소식, 가슴졸이며 기다리던 애인의 연락, 무기징역을 사시던 아버지의 하루 동안의 귀휴와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가석방, 형제들의 결혼, 조카들의 탄생, 오빠의 암 선고, 그리고 1년 후의 사망, 아버지의 치매, 돌아가심, 최근 올케 가족에 닥친 불행까지….

 

누구든 그 번호만 누르면 우리 가족의 근황을 알 수 있었으니 자식들이 모두 떠난 후 홀로 번호를 지켜오던 친정어머니는 호주에 사는 제게까지도 "너 열살 때 친구라더라. 혹시 하고 전화해 봤는데 아직도 번호가 그대로냐며 깜짝 놀라더라"는 등의 뜬금없는 소식을 전해주곤 하셨습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이 수많은 사연들을 담아내던 그 번호는 가족과 동떨어져 살고 있는 제게는 의미가 더욱 컸습니다. 그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언제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어머니의 한결 같은 위로와 격려가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올케가 실수로 많은 돈을 잃고 집까지 떠내려 가는 바람에 3남매를 데리고 시어머니 집에 얹혀 살게 되었지만 그 돈을 본 적도 없는 저로서는 가슴 아파하면서도 솔직히 그다지 실감되진 않았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복작거릴 다섯 식구가 안쓰럽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연이어 또다시 불행을 겪게 된 조카들이 가여운 것 이상으로 친정 전화번호의 부재가 제게는 큰 상실로 다가왔습니다. 그게 무슨 값어치 나가는 소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평생 빼앗기며 살아온 어머니가 이제 하나 남은 전화번호까지 생전에 박탈 당해야 하냐며 억지를 부리고도 싶었습니다.

 

한 번도 발설한 적은 없지만 내심 저는 그 번호와 어머니는 함께 소멸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번호의 부재는 곧 친정의 부재라는 결론도 내려두었습니다. 오빠와 아버지가 먼저 떠난 친정에서 어머니가 안 계시면 더 이상 전화번호를 지켜 줄 이가 없으니까요.

 

그런 전화번호가 어머니를 앞서 홀연히 먼저 세상을 버렸으니 망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망한 ' 친정 전화번호 856-4435를 기릴 양으로 나름의 '애도 기간'을 가진 후에도 한동안 연락하지 않다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최근에서야 올케네 전화번호를 눌렀습니다.

 

"여보세요."

 

아, 언제나 차분하고 정갈한 어머니의 음성이 전과 다름없이 들립니다. 돌아가셨던 분이 되살아 오기라도 한 듯 저도 모르게 잠시 화들짝 놀랍니다. 전화번호의 부재가 어머니의 부고가 아님을 증명하듯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시는 어머니에 안도하지만 '죽어버린' 전화번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립니다.

 

안녕, 소중했던 번호 856-4435.

덧붙이는 글 | 자유칼럼그룹에 실린 글입니다.

2010.11.11 11:36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자유칼럼그룹에 실린 글입니다.
#전화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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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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