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김개남 장군이 악연된 사연

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 참가기

등록 2010.11.12 10:43수정 2010.11.1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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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 헌례를 올리는 장면입니다. ⓒ 조종안


엊그제(10일)는 아침을 미숫가루로 대신하고 일찍 집을 나섰다. 한말의 대표적인 항일의병장 임병찬(1851-1916)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 참석을 위해서였다. 일주일 전 초청장을 받고, 우리 고장에도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계셨구나! 하고 놀라며 달력에 메모해 놓았었다. 


아침에 초청장을 보낸 군산문화원 이진구 사무국장에게 전화하니까 이복웅 문화원장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 충혼제가 열리는 장소까지 동행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환영한다면서 오전 11시 시작이니까 맞춰서 오란다. 오전 10시10분까지 사무실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마을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군산문화원 부근 정류장까지 갈아타지 않고 45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지루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창으로 스치는 거리 풍경은 물론이요, 어쩌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버스에서도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자주 대하기 때문이다.

버스가 군산문화원 부근 정류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 55분. 약속시각보다 일찍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이 원장이 기다렸다는 듯 반겨주었다. 그는 임병찬 선생 생가와 가까운 상평초등학교 교정에서 (충혼제를) 치르려다 날이 추워 옥구초등학교 강당으로 옮겨 준비했는데 봄날처럼 따뜻하다며 웃었다.

시간이 없어 커피도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이 원장 승용차를 타고 옥구초등학교로 향했다. 임병찬 선생 충혼제를 언제부터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올해가 두 번째라고 했다.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을 어째서 이제야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운전하는 분에게 자꾸 물어보기도 그랬다.

옥구초등학교 강당에 도착하니까 (사)한국차문화재단 회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참석자들에게 전통 녹차를 대접하고 있었다. 진혼풀이와 농악, 민요, 한량무를 공연할 예술단원들은 식전공연 리허설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분하고 경건하게 치러진 충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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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제 식전행사가 열리고 있는 옥구초등학교 강당. 학생들도 다수 참석했는데요. 임병찬 선생은커녕 의병의 의미조차 모르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 조종안


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 1부 식전행사는 옥구 농악단의 풍물로 문을 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아직은 사람들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 농악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악에 이어 입춤, 민요, 한량무로 이어졌다. 

2부 제례는 남정근 전 옥구 문화원장의 집례로 충혼선언, 초헌례·아헌례·종언례, 독촉, 헌화와 분양, 진혼풀이, 헌공다례, 종제선언 순으로 봉행되었다. 3부는 군산문화원 이진구 사무국장의 사회로 개식사에 이어 국민의례, 인사말, 추모사, 군산지역 항일의병 참여자 소개, 후손 인사 순으로 차분하고 경건하게 치러졌다.

행사를 주최한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을 비롯한 문동신 군사시장, 고석강 군산시의회 의장 등은 하나같이 청렴성과 강직함,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려다 일경에 잡혀 감옥에서 단식을 감행하다 자결한 임병찬 선생의 우국충절 정신과 공적을 높이 사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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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지역 항일의병 참여자를 소개하는 김양규 향토문화연구회장. ⓒ 조종안


김양규(85세) 향토문화연구회장은 군산지역 항일의병 참여자 소개에서 의병이 활발했던 시기를 넷으로 나눠 설명했다. 1차는 1895년(을미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2차, 을사늑약(1905년) 후 연암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병오창의(丙午倡義)'. 3차, 이완용과 이등방문이 체결한 정미7조약(1907년). 4차 경술국치(1910년) 이후로 정리했다.

이어 김 회장은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군산에서 35명이 의병에 참여했고, 그들 대부분이 '병오창의'에 투신했다"면서 "특히 임병찬 선생은 동생 임병대, 아들 임응철, 손자 임 정, 임 진 등 3대가 의병에 가담하여 항일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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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대표로 인사하는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 영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 아들이 공군 조종사로 출전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어려울 때는 지도자들이 솔선수범을 보여줘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 조종안


후손 대표로 나온 전국 임씨 중앙회 임창열(전 경제부총리) 회장은 "강당을 가득 메운 시민들에게 감동을 받았다"면서 "훌륭한 행사를 치르는 시민 여러분께 1백만 임씨 종친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군산에서 우리나라를 이끌어간 지도자가 많이 나오셨는데 항일운동을 주도한 임병찬 선생도 이 지역 출신이어서 기쁘다"며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임 회장은 "직계후손은 살고 있지 않지만, 임병찬 선생님 생가가 있는 마을로 묘소를 이장하고 사당을 짓는 일을 군산의 뜻있는 분들이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전국 임씨 대표들도 기쁜 마음으로 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약속드린다"며 인사를 마쳤다.   

도시락 먹다가 충격적인 얘기 듣다

공식 행사가 모두 끝나고 점심으로 도시락이 나왔다. 플라스틱 용기와 알루미늄 박지로 싸긴 했지만, 장아찌와 부침개, 된장국, 생수까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야외에서 오랜만에 먹는 도시락이어서 그런지 별미였다.

십 년 넘게 연락이 두절됐던 지인을 우연히 만나 반가웠다. 그들과 자리를 함께했는데,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늙어버린 분도 있어서 세월이 덧없음을 실감 나게 했다. 도시락이 거의 비어 가는데 한 분이 임병찬 선생 얘기를 꺼냈다.

그는 임병찬 선생은 동학 농민혁명 때 김개남 장군을 밀고했던 분이라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는 그의 표정은 농담이 아님을 전해주는 듯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괜히 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독립유공자 중에 훗날 친일경력이 밝혀져 문제가 되는 일을 자주 봐왔던 터여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행사를 주최한 군산문화원이나 충혼제를 지내기로 뜻을 모은 지역 향토사학자들을 의심할 수 없었다. 김개남 장군과의 관계를 모르고 행사를 추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격랑의 시대에나 가능한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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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최익현과 의병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좌측), 전봉준, 손화중 등과 함께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추앙받는 김개남 장군(우측) ⓒ 조종안


훗날 의병장까지 지낸 분이 김개남 장군을 밀고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이복웅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 상황에 대해 보충설명을 요청했다.

"아~ 지금이니까 그렇지, 당시(1894년)에는 '민들의 난동'이었으니까,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해방 이후에도 '난동'로 전해지다 김대중 정부(1988년) 들어 '동학농민운동'로 바로잡혔으니까요. 1894년 12월 임병찬 선생의 밀고로 김개남 장군이 잡혔지요. 이듬해 1월에는 공을 인정받아 임병찬 선생에게 임실 군수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전라관찰사(이도재)가 포상으로 내리는 쌀 20석도 받지 않았던 분이에요."

이 원장의 설명을 듣고 나니까 이해가 가는 대목이 있었다. 50년-60년대에 초·중·고를 다녔던 필자도 '동학난'으로 배웠고, '전봉준'과 '동학난'에 대한 선생님 설명도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의병장까지 지낸 분이 김개남 장군을 밀고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자료를 뒤적이면서 임병찬 선생이 낙안 군수 등 벼슬자리에 있었던 시기와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를 비교해 보았더니 나름대로 이해가 가는 대목이 있었다.

1851년 2월 5일(음력) 아버지 용래(溶來)와 어머니 송악 왕씨(松岳 王氏)의 맏아들로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 남산(옥구현 대사리)아래에서 태어난 임병찬은 16세 때(1867년) 전주에서 지방시에 수석 합격하고, 1889년(고종 28) 절충장군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가 낙안군수 겸 순천진 절제사로 있으면서 농정에 공을 세웠다. 당시 고을 농민들이 선정에 감복하여 온갖 방법으로 사례하였으나 거절하였고, 비를 세우는 것마저도 만류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이 일어나 무남영우령관에 오르라고 해도 마다했던 임병찬은 정국의 문란을 걱정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 최익현을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투쟁했다. 1910년 독립의군부 전남 순무대장에 올라 항일 구국투쟁을 전개하다 1914년 6월 경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고 1916년 5월 23일 단식을 감행하다 자결하였다.
<군산문화원 행사자료집 발췌 정리>  

1894년 1월에 일어난 동학혁명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빌미가 되었고, 최후의 상대는 조정, 즉 임금이 되겠는데,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에 오르라고 해도 마다했던 임병찬 선생의 당시 처지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아울러 70년대 중반 거리에서 유신철폐를 외치는 대학생들과 80년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을 잡아들이던 경찰서장이나 군인 장교 중에는 훗날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자기가 잡아들였던 대학생들과 의기투합해서 의병처럼 들고일어날 사람도 있을 거라는 추리도 해보았다.

군산출신 의병 35인 중에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도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국권을 빼앗기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동학 혁명군이었던 농민들 중에 다수가 의병에 참여하여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의 민주주의도 아직은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좌우익 대립과 한국전쟁으로 형제들이 원수가 되었던 것처럼, 한말의 임병찬과 김개남의 비극도 격랑의 시대에서 가능한 악연이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항일의병장 #임병찬 #충혼제 #김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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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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