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도 없는데..." 73세 할머니가 울린 골든벨

충남 예산군 문해백일장 열리던 날

등록 2010.11.22 14:50수정 2010.11.2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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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두개나 겹쳐 쓴 참가자가 경필대회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 장선애


지난 17일 오후 1시 할머니들이 예산문화원 강당에 모여들었다. 너댓 분씩 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70여 명이나 되는 할머니들이 강당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할아버지 두 분도 눈에 띈다. 예산군 내 아홉 곳에서 운영 중인 문해교실에서 한글공부를 하고 있는, 말 그대로 '만학도'들이다.

오늘은 예산군문해백일장이 열리는 날, 1년여 동안 배우고 익힌 한글실력을 발휘해 경필대회, 편지쓰기, 골든벨에 참여해야 한다. 행사장 입구에는 어르신들이 만든 작품과 활동사진들이 전시되고, 행사 시작 전에는 문해교실 운영 상황을 알 수 있는 슬라이드도 상영됐다.

축사에 나선 최승우 예산군수가 "지난 시절 어려웠던 사정으로 교육기회를 잃었던 어르신들이 지금 이렇게 공부를 하신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라며 "이렇게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사업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자 박수가 터진다.

이윽고 경필대회가 시작된다는 안내가 나오자,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자못 긴장감이 흐른다.

교실 나가면서 잊어버리지만...

경필내용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반달> 가사 전문. 최근 몇주동안 각 교실별로 대회준비를 하면서 여러 번 써 봤던 데다, 베껴쓰는 것인데, 노래로도 불러봤던 글귀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글씨가 자꾸 비뚤어 나간다.

"시간 충분해요. 천천히 쓰세요."

행사를 진행하는 예산군 평생교육사 신현미씨의 안내방송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연두색 조끼를 맞춰 입은 문해교육사들은 각자 제자들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맘이 삐뚤어졌나, 왜 글씨가 자꾸 삐뚤어져"라며 속상해 하는 할머니 제자들에게 "괜찮아요. 잘 쓰시는 거예요"라고 격려하고, 틀린 글씨는 얼른 알려줘서 고쳐쓰게 한다.

할머니들의 손은 대부분 수십 년 농사에 검게 그을리고 세월의 주름이 깊게 패여있다. 고된 노동에 휘어버린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꼭 쥐고 한획 한획 정성껏 글씨를 써내려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어디나 그렇듯 먼저 써 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절반도 쓰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한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과 주소만 써 내기도 했다.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데다 자꾸 잊어버려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대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나왔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이 '문고리 잡고 나가면서 잊어버린다'고 하세요. 그래도 당신 이름 석자, 자식 이름, 동네 이름 안다며 너무 좋아 하시죠. 무엇보다 처음엔 창피해 하시고 비관하시던 어르신들의 자존감이 높아진게 가장 큰 성과예요."

신현미씨의 설명이다.

말이 '대회'지, 서로의 마음과 처지를 잘 아는터라 늦는다고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 준다. 경필대회를 마무리 하면서 할머니들이 합창을 한다. '푸른하늘 은하수…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글씨로 써낸 노랫말을 음율에 맞춰 부르는 할머니들의 얼굴이 처음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의 얼굴처럼 투명하다.

어려우시죠? 괜찮어, 쓸만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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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 골든벨 예선에서 열심히 답을 쓰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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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벨 결선에서 탈락한 할머니들이 웃으며 일어나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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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벨을 울린 동을 경로당 정정호 할머니가 마지막 문제의 정답을 들어보이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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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2인에 올랐다가 아쉽게 2등상에 그친 신양 윤명숙 할머니가 문해교육사회가 주는 상품을 받고 있다. ⓒ 장선애


한글 단어를 불러주면 맞춤법에 따라 써야 하는 골든벨대회. 오이, 비누, 고구마, 아파트, 코끼리….

할머니들의 실력이 대단하다. 시간이 지나도 탈락자가 많지 않자, 오히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쩔쩔 맨다. 결승 진출자를 빨리 가려야 하는데 여간해서 승부가 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어려운 단어겠지 하고 문제를 내면서 "어려우시죠?"하고 물으면 "괜찮어, 쓸만혀"하는 대답이 돌아오니 대략난감이다.

게다가 서로 경쟁하기는커녕 옆사람 이 틀린 글자를 고쳐주기까지 한다. 문해교육사들도 제자들이 실망할까봐 틀린 글씨가 나오면 눈치껏 알려준다. 급기야 진행자의 호통에 교육사들이 모두 맨 앞으로 불려나왔다.

시간이 흐를 수록 '대회'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다 쓴 사람은 뒤집어 놓으라"느니 "누구는 보고 썼다"느니 신경전도 벌인다. 탈락자 가운데 실수했다고 아쉬워하며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할머니들이 너무 잘하신다.

탈락한 할머니들은 화이트보드가 없어도 무릎에 손가락으로 정답을 써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예산에서 문해백일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벤치마킹을 온 경기도 양주시노인회 회원들도 서로 답을 써보면서 열의를 보인다. 결판이 안 나자 문제의 난이도가 껑충 뛰었다. 돼지코, 찌개, 우체국 택배.

드디어 결승에 진출하는 할머니 열명이 가려져 보무당당하게 무대에 오른다. 다리가 불편해 걷지 못하는 할머니 한 분은 문해교육사 김석현 회장이 업어서 무대에 올려드린다. 박수가 터지고, 문해교실별 응원전도 펼쳐진다.

실력파들의 경쟁이라 까다로운 맞춤법의 문장을 쓰게 한다.

자리에 앉다, 편지를 부치다….

귀가 어두우셔서 되물으면서도 침착하게 문제를 맞히던 광시 동울문해교실 정정호(73) 할머니가 골든벨을 울렸다. 정 할머니는 "아는 것도 없고 많이 부족한데 1등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기뻐했다.

소박한 기쁨 넘치는 잔치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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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문화원 2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편지쓰기대회 모습.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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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 사리경로당 문해교실에서 나란히 공부하는 할머니 자매가 편지를 쓰고 있다. ⓒ 장선애


편지쓰기 대회에는 모두 참가하지 않는다. 글씨를 쓰기도 버거운데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편지글이라니…. 그래도 20명이 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2명이 대회에 참여했다. 고덕에서 온 자매 할머니도 나란히 앉아 있다. 

편지쓰는 대상은 남편, 돌아가신 어머니, 문해교실 선생님, 군수님 등 다양하다. 아무래도 가장 많은 대상은 아들과 딸, 그리고 손주들이다. 어려서는 가정형편과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에, 결혼 해서는 자식들 가르치느라 배울 기회를 놓친 할머니들이 연필을 꾹꾹 눌러 편지를 쓴다.

편지는 대개 '사랑하는 아무개야' '아무개 보거라' '사랑하는 당신께'로 시작한다. 불과 대여섯줄로 끝나거나 '잘있느냐, 나는 잘 있다' 같은 뻔한 인사말일지라도 편지를 받는 이들은 한 획 한 획에 담긴 어머니의, 아내의 지나온 삶과 현재의 기쁨을 가슴 깊이 느끼리라.

사각 사각 글씨쓰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진행되는 편지쓰기, 역시 '대회'가 아닌 못다한 꿈과 소박한 기쁨이 넘쳐나는 잔치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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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시운노경로당 최순자 할머니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쓴 편지. ⓒ 장선애


예산군, 내년 사업비 큰폭 증액

예산군은 내년에 문해교실사업에 군비 7500만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올해 1500만 원이던 것에 견주면 획기적인 증액이다. 이 사업을 담당하는 복지과는 공모사업을 통해 국도비를 더해 1억 원 정도의 예산으로 내년에는 문해교실을  20곳으로 확대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이날 행사를 끝까지 지켜본 인영환 복지과장은 "농번기에는 쉬려 했는데 교육생들이 계속하고 싶다고 요청할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군정방향도 그렇고 평생교육에 대한 투자는 증가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늙은이가 이제 글씨를 배워 뭐할까만서두 집에가는 버스도 몰라 동네사람 따라 타고, 동네사람 없으면 '눈 침침해 안 보인다'고 거짓말 하며 젊은이들에게 물어서 타지 않아도 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새로 태어난 것 같어" 라며 환하게 웃었다.

경필대회와 편지쓰기 대회 수상작은 전국문해교육사협회의 심사를 거쳐 22일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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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용 할머니 ⓒ 장선애

참가자 가운데 가장 연세가 많은 유기용(92, 응봉 지석리) 할머니는 백일장에 참석하느라 분홍색 생활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셨다고 한다.

"우리 선생님 보기 미안혀. 내가 너무 일찍 떨어졌어."

골든벨 시작하기 전에 1등 하시고 싶지 않냐고 물으니 "늙어서 상욕심은 없는데 선생님 고마워서 잘해야 한다"던 유 할머니는 행사가 끝난 뒤 찾아간 기자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글씨 공부하는 건 너무 좋은데, 자꾸 잊어먹어. 밤에 글씨 쓰고 있으면 아들이 들어와서 '늙은 학생 공부하느라고 애쓰신다'고 허지"라며 껄껄 웃는다.

예산군여성농업인센터 문해교실에서 유할머니를 가르치는 신혜정씨가 "경필대회 연습지 드렸더니 한 번 써보시고, 지우개로 지우고 또 쓰시고 여러 번 하셨더라. 얼마나 열심인지 모른다"고 귀뜸한다.

90세가 넘은 연세에도 그렇게 정정한 비결은 아직도 청청한 배움에 대한 열의 덕분인가 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예산지역신문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예산지역신문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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