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겨울 기다리는 마음

[그림책이 좋다 101] 가도노 에이코, 오오시마 다에코 <눈사람의 비밀>

등록 2010.11.22 16:07수정 2010.11.2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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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사람의 비밀

 (가도노 에이코 글, 오오시마 다에코 그림, 고향옥 옮김,웅진닷컴,200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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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웅진닷컴

겉그림. ⓒ 웅진닷컴

지난 10월 26일 아침, 우리 산골마을에도 처음으로 얼음이 얼었습니다. 꽝꽝얼음은 아니고 살얼음입니다. 요즈음은 살얼음이 얼거나, 들판과 멧자락에 서리가 곱고 넓게 내립니다.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때에는 골목마실을 하면서 골목집 꽃그릇이나 텃밭에 앙증맞게 내려앉은 서리를 보았습니다. 서리가 아스팔트 길바닥에 내린다든지, 거님길 돌바닥에 내려앉는 모습은 거의 못 봅니다. 그러나 도시 어디에나 잔뜩 서 있는 자동차 지붕에 하얗게 깔린 서리는 자주 봅니다.

 

자동차 지붕에 내려앉은 하얀 얼음조각을 서리라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골이든 도시이든 똑같은 자연 움직임이니 서리가 아니라 할 수는 없을 텐데, 자연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뿐더러, 아예 자연을 잊거나 잃으며 살아가는 도시라는 터전이거든요. 자동차 지붕에 앉는 얼음조각을 볼 때면 이 얼음조각은 서리가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으랴 싶곤 합니다.

 

이제 울긋불긋한 가을잎이 저무는 철이 지나고 나무마다 빈 가지가 될 무렵에는 차츰 눈바람이 불테지요. 때때로 눈보라가 치기도 할까요. 눈은 없이 매서운 추위인 강추위가 몰아닥치려나요.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느끼는 날씨는 뒤죽박죽이 되어 가니까요.

 

그림책 <눈사람의 비밀>을 봅니다. 이 그림책은 낱권으로는 나오지 않고 전집으로만 나온 터라 여느 새책방에서는 따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더는 찾아보기 힘들기까지 합니다. 헌책방에서 겨우 찾아보는데, 헌책방에서도 낱권으로는 장만하기 힘듭니다. 전집으로 묶어 서른 권인가 마흔 권을 한꺼번에 장만해야, 이 가운데 1번으로 나온 <눈사람의 비밀>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용케 낱권으로 하나 흩어진 이 책을 만났습니다.

 

<눈사람의 비밀>이라는 이름이지만, 눈사람한테 비밀이 있다기보다, "비밀 눈사람"이라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눈사람들이 깊은 밤이 되면 조용히 일어나 저희끼리 공차기를 비롯해 온갖 놀이를 즐기거든요. 어쩌면 "눈사람한테 있는 비밀"이라든지 "눈사람한테 비밀이 있어요"라 해 볼 수 있겠지요. "비밀스러운 눈사람"이라든지요.

 

차츰 눈 구경이 힘든 만큼 이 그림책에 눈이 갑니다. 눈 구경이란 아득한 옛날 일처럼 가물가물해지기에, 아빠(또는 엄마)랑 눈사람을 함께 굴리며 손이 얼얼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그림책에 손이 갑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때, 눈을 뭉치자면 장갑을 끼고는 잘 안 되었습니다. 으레 장갑을 벗은 맨손으로 눈을 뭉치거나 굴렸고, 한동안은 맨손으로 눈을 뭉칠 때에 참 잘 뭉쳐진다고 느낍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 손가락 끝부터 쨍하고 뜨끔합니다. 이러면서 손가락 온 마디와 손바닥까지 후끈후끈 달고, 사타구니까지 조입니다.

 

다시 장갑을 끼어도 아픔은 가시지 않습니다.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이고 아야 윽윽 하며 두 팔을 오므려 가슴에 대고 두 손을 살살 어루만지고 비빕니다. 장갑을 낀다고 따스하지 않으니 다시 장갑을 벗습니다. 얼어붙은 맨손을 서로 덜덜 떨면서 쓰다듬습니다. 손가락에 따시 따순 피가 돌 때까지 옴쭉달싹 못합니다. 조금 손이 풀렸다 싶으면 허벅지 사이에 두 손을 넣고 콩콩 뛰거나 새우처럼 등을 구부립니다. 이렇게 몇 분을 앓으면 드디어 손이 풀려 히유 하고 한숨을 쉽니다. 그런 다음 또 눈을 뭉치는데, 장갑 낀 손으로는 도무지 눈 뭉치기가 안 되어 또다시 장갑을 벗으며, 얼마 뒤에 똑같은 뜨끔함과 아픔을 거듭 겪습니다.

 

어릴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왜 장갑 낀 손으로는 눈을 뭉치기 어려웠는지, 왜 맨손으로는 눈을 잘 뭉칠 수 있는지. 장갑 낀 손으로는 눈을 모으기까지는 좋으나, 맨손일 때에는 따스한 손이 눈을 살짝 녹이면서 눈이 한결 단단히 뭉쳐집니다.

 

.. "자, 눈을 모아서 조그만 눈덩이를 만들자." 아빠가 말했어. 나는 두 손으로 눈을 뭉쳤어. 아, 손 시려. 손가락이 얼얼했어 ..  (6쪽)

 

여름은 덥습니다. 겨울은 춥습니다. 봄은 따뜻합니다. 가을은 시원합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은 서로 다른 철이요, 서로 다른 네 철이 골고루 흐르며 찾아오는 동안 우리 몸과 마음은 찬찬히 튼튼해지고 씩씩해지며 무르익습니다.

 

따뜻하기만 한 나라에서 살아가도 좋을 테고, 시원하기만 한 나라에서 살아가도 좋다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따뜻하기만 한 나라는 파리와 모기가 많습니다. 시원하기만 한 나라는 곡식이 잘 여물지 못합니다. 더우면 싫고 싫으면 괴롭다지만,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하면서 땅과 해와 바람과 물이 어우러질 때에 뭇목숨과 뭇사람이 즐거우며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에는 따뜻한 날씨에 걸맞게 따뜻한 이야기가 있고, 더운 여름에는 더운 날씨에 알맞게 더운 이야기가 있으며, 시원한 가을에는 시원한 날씨에 알맞춤하게 시원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추운 나날에 들어맞는 추운 이야기가 있어요. 추운 겨울에만 느낄 수 있고, 추운 나날에만 겪을 수 있으며, 추운 나날에만 즐길 수 있는 일과 놀이가 있습니다. 추운 나날에는 멧자락 작은 집에 꽁꽁 틀어박혀서 살붙이하고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더 가까이 보듬으면서 사랑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겨울이 닥쳐 오면 빨래하기가 한결 힘듭니다. 빨래를 하자면 손이 시리고 얼어붙으니까요. 기름을 때어 보일러를 돌리면 따순 물을 얻어 쓰니 손이 얼어붙지는 않는데, 한낮 살짝 따뜻할 때를 잘 맞추어 빨래를 신나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말리기 어렵습니다. 겨울날 겨울빨래를 하며 봄을 기다립니다. 겨울에는 이불 빨래를 하기 힘드니까, 봄이 되어 신나게 이불 빨래를 꾹꾹 밟으면서 마당에 척척 널어 놓을 일을 꿈꿉니다. 올겨울이 가고 새봄이 오면 우리 아이도 한 살을 더 먹을 테니, 이제는 이불 빨래를 할 때에 발로 눌러 주는 힘이 더욱 세겠지요. 또 새 겨울을 맞이하고 나서 다시금 새 봄을 맞이한다면, 그때에는 우리 아이가 이불 빨래에서 제법 한몫 할 수 있으려나요.

 

.. 눈사람들이 다시 걸어가고 있어. 하늘을 보고 노래를 부르면서 말야 ..  (28쪽)

 

올해 겨울에는 얼마나 눈바람이 불고 눈누리가 이루어질까 기다립니다. 우리 산골마을에는 얼마나 눈이 찾아들어 버스며 짐차며 다니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안 생길까 궁금합니다. 온통 눈밭이 되면 어린 딸아이는 마음껏 소리지르고 노래부르며 신나게 뛰어놀 수 있다고, 어쩌면 우리 집 마당이나 문간이나 한길에 눈사람 둘 세워 놓을 만큼 눈이 펄펄 찾아들는지 모릅니다. 겨울다운 겨울이 찾아와 달라고 비손합니다.

 

그림책 <눈사람의 비밀>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내아이가 제 아빠랑 공차기를 하며 노는 꿈을 꾸는데, 사내아이랑 아빠가 아닌 계집아이랑 엄마가 솔솔 내리는 눈을 가만히 그러모아 눈사람을 만들며 꿈을 하나 빌었다면 이야기가 얼마나 달랐을까 헤아려 봅니다. 계집아이랑 아빠, 사내아이랑 엄마일 때에는 또 얼마나 다른 꿈을 빌었을까 곱씹어 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사내아이이든 계집아이이든 꿈이란 매한가지가 되려나요. 아니면, 눈사람 굴리기는 사내아이만 즐길 놀이가 되려나요.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쓴 <초원의 집>을 보면, 어린 계집아이인 '로라'는 제 언니 '메리'하고 신나게 눈사람을 굴리며 놀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알라딘 서재] http://blog.aladin.co.kr/hbooks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2010.11.22 16:07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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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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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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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책읽기 #삶읽기 #그림읽기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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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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