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과 헨델의 메시아가 친구한 날

영어 독해교재가 클래식 해설서 how to enjoy music?

등록 2010.12.26 13:37수정 2010.12.26 13:3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독교 신자이건 말건 크리스마스가 주는 설렘과 행복이 있었던 시절도 내겐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크리스마스가 뭐데?'일 정도로 관심도 느낌도 없는 무감각의 시대가 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연휴 날짜를 계산하기 위해 빨강 글씨 위치가 어디 있더라가 유일한 관심거리가 돼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올 성탄절은 아주 특별하게 보냈다. 머리 안 깎은 중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신심이 깊은 남편은 새벽마다 예불을 한다(당근, 성탄절도 예외는 아니다). 오전 5시 예불, 운동, 그리고 혼자 차려 먹는 아침상까지 끝내고 마누라 눈뜰 때를 기다리는 남편이었는데, 올 크리스마스 아침은 상황이 달랐다.

성탄 축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여수를 가자는 것이다. 여수에는 남편이 제일 아끼는 후배가 목회를 하고 있었지만 놀러 가는 목적 이외는 가보지를 않았던 곳인데 예배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가자니…. 잠시 머리를 굴려본 결과, 하루 종일 둘이 코 맞대고 있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싶어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원래 클래식광인 남편과 여행을 할 때면 음악은 피할 수 없는데, 이번엔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두꺼운 CD 케이스를 주섬주섬 열더니 연달아 세 개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때부터 음악해설을 시작했다.

"이 곡이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이야. 특히 이 연주는 1959년에 토마스 비참경이 지휘한 로얄필하모니 연주곡인데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신 최갑진 선생님이 매주 열던 메시아 음악회 첫 곡을 꼭 이 곡으로 들었지. 당신도 할렐루야 합창은 들어봤지? 그 유명한 합창이 메시아 2부에 있는 곡이야."

아무리 무식해도 헨델의 '할렐루야'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라구.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전교 합창대회 우리 반 지정곡이 할렐루야였다. 연습하면서 얼마나 야단을 많이 들었던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곡이 '할렐루야'인데 모를 수가 있나.


말 나온 김에 남편의 고등학교 때 선생님, 최갑진 선생님에 대해 물었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그가 클래식 광인 것이 신기했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절대 빈곤에 허덕이던 집안에서 어떻게 고급 취향인 클래식과 친하게 되었을까? 그랬더니 최갑진 선생님 덕분이라고 했다. 남편이 고등학생이던 시절은 66년에서 68년 때까지다. 그때만 하더라도 금성라디오만 갖고 있어도 살만한 집으로 인정받을 때였다고 한다.

최갑진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셨단다. 수업시간에 <how to enjoy>라는 고전음악 해설서를 프린트해 와 독해 교재로 쓸 만큼 선생님은 클래식 광이었다. 그 시절에 방송국 오디오보다 더 좋은 오디오를 갖고 있을 정도였고, 선생님 댁을 다녀온 아이들 말에 의하면 오디오를 캐비닛에 고이 모시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자물쇠로 잠가놓더라니…. 상상을 초월한 클래식 마니아임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독해 수업 과정에서 서양음악과 음악가를 알게 된 남편. 수업내용에 관심을 보이는 까까머리 제자에게 선생님이 초대를 했단다. 매주 일요일 새벽에 충장로 제일극장 앞에 있는 '르네상스 다방'에서 음악감상회를 하는 데 관심이 있으면 오라는 초대였다.

당시 르네상스 다방은 지역에서 제일 성능 좋은 오디오를 갖춘 음악감상실이었다고 한다. 회원은 음악을 좋아하는 동료 교사, 대학생, 그리고 선생님의 제자들인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구성돼 있었다. 오전 6시부터 시작해 서너 시간 고전음악 감상을 했는데 '메시아음악회'란 제목처럼 첫 곡은 늘 헨델의 메시아로 시작했단다.

"2시간 반이 넘는 메시아 전곡을 들을 수는 없고 나눠서 들었지. 메시아 이외의 고정 곡으로는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9번 교향곡을 들었어. 그리고 돌아가면서 다른 음악가의 곡들을 감상했고. 바흐, 헨델을 비롯한 고전주의에서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차이콥스키… 2, 3학년 2년간 정말로 빠진 기억이 별로 없어. 음악을 듣고 느낀다는 게 정말로 재미있었거든."

고백하자면 집에 금성라디오도 하나 없었던 남편과 달리 그때 우리 집엔 전축이 있었다. 있는 재산 털어 광산을 하느니 무슨 사업을 하느니 사장 소리를 들으며 거들먹거리던 우리 '아바이동지'께서 전축을 덜커덕 사들인 것이다.

전축을 사랑방에 들여놓고는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베벵이굿에서부터 회심곡까지 온갖 민요가 꽝꽝 울려 퍼졌고, 그 전축으로 이미자, 남진, 나훈아, 박재란, 문주란 등의 가요를 무차별 섭렵했다. 막냇삼촌이 사놓은 트위스트 판이라도 틀어놓으면 셋째 삼촌이 운영하는 집 뒤의 공장에서 일하는 오빠들이 바로 튀어나와 사랑방 앞 마당은 곧바로 고고장으로 변신했다.

문화의 차이는 환경의 차이에서 결정된다. 집에 번듯한 전축이 있었음에도 민요나 가요 이상은 접해 보지를 못했다. 내 주변의 어느 누구도 심지어 친척이나 동네 언니, 오빠까지도 클래식의 '클'자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중고등학교 때 음악시간에 배우는 짧은 가곡 그것이 전부였다.

왜 우리 학교에는 최갑진 선생님 같은 분이 안 계셨을까? 가난한 아이들도 문화적 소양과 감성을 충분히 길러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면 지금의 우리 남편처럼 굴곡진 인생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자정능력을 키워줄 수 있었을 텐데.

소화기내과 전문의로 지금은 소화기내과 명의반열에 들 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남편 동창이 있다. 그 친구도 학창시절에 '메시아음악회' 열렬 회원이었다고 한다. 폐결핵에 걸렸는데도 너무나 가난해 변변한 영양섭취를 할 수 없었던 친구를 위해 남편과 친구들은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다고 한다.

고기를 먹을 수 없는 가난한 아이에게 개구리탕은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가난을 딛고, 결핵을 딛고 그 친구는 마침내 의대에 진학했다. 의사로 가는 험난한 길에서도 그 친구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의대 시절부터 연마한 클래식기타 연주 수준이 수준급이라는 남편의 친구.

가난한 이의 자수성가 성공담에 메마른 부와 명예만 있었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폐결핵까지 걸렸던 가난한 학생이 대한민국의 명의반열에 오르기까지의 여정, 그 길은 눈물의 가시밭길이었을 것이다. 그 험난한 인생길에서 그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던 음악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런 길로 이끌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그 얼마나 천복일까.

남편의 고등학교 은사이신 최갑진 선생님을 생각하니 '교육현장'의 의미가 어떠해야 하는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을 길러 낸다는 명제는 어찌 보면 가당치 않은 오만인 것 같지만 적어도 교육현장 어느 곳에서 최갑진 선생님 같은 열정을 가진 선생이 있다면 오만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네 앞에 펼쳐진 인생이 어른들이 주장하는 부와 권력, 명예… 이런 세속적인 출세가 전부가 아니라는, 꿈과 행복을 찾아가는 길은 먼 곳이 아닌 아주 가까운 곳에 또한 너무나 하찮은 것에서 찾기도 한단다고 일러줄 수 있다면 그 아이들이 덜 불행해지지 않을까?

담양에서 여수까지 1시간 반, 헨델의 메시아 그중에서도 '할렐루야' 비신자에게도 우주의 신비와 영광이 남김없이 전달되는 황홀경을 맛보게 해주었던 웅장한 합창곡에서 교육의 미래에 희망을 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최갑진영어선생님 #클래식음악회 #교육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