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가 사랑하는 삶을 담은 보배

[헌책방 나들이 235] 인천 창영동 <동네책방 사각공간>

등록 2010.12.29 11:37수정 2010.12.2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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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모습. ⓒ 최종규

 ― 인천 창영동 <동네책방 사각공간> / 032) 204-6242

 

 

 (1) 작은 동네 작은 책방

 

2010년 10월 15일에 자그마한 책방 하나 자그마한 동네 한켠에 문을 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책을 안 보는 곳은 인천이라는 도시인데, 사람들이 책을 가장 안 본다는 곳에서도 '오가는 사람'이나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 안 많은 한켠에 책방이 문을 엽니다.

 

작은 책방 이름은 <동네책방 사각공간>입니다. 동네에 자리한 책방이니 말 그대로 <동네책방>이라는 이름이 어울립니다. 책방 일꾼은 책방 문을 열 때면, 책방 앞에 마련한 네모난 상자에 책 하나를 얹고, 이 책을 읽으며 여럿이 나누고픈 글월을 작은 칠판에 적바림해서 길가에 내놓습니다.

 

책방은 인천 동구 창영동에 자리한 창영초등학교 앞문 건너편에 있습니다. 창영초등학교는 백 살이 넘은 학교이고, 백 살이 넘은 건물이 튼튼히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곳입니다. 이 건물은 앞으로도 이대로 건사하리라 보는데, 오늘날 새로 짓는다는 건물이나 아파트는 몇 해나 그 자리에서 버틸까 궁금합니다.

 

창영초등학교에서 '금창동'이라 일컫는 금곡동과 창영동이 만나는 '배다리 헌책방거리' 쪽으로는 아주 가깝습니다. 걸어서 2분쯤 됩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책방마실을 나오는 길에 이곳으로 들를 수 있고, <동네책방>으로 마실을 오는 길에 헌책방거리 나들이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인천 배다리에 헌책방거리가 처음 이루어진 때는 한국전쟁 즈음 해서 1960년대 사이라 하고, 이무렵에 첫 헌책방들은 옛 축현초등학교(인현동) 담벼락을 따라 길장사로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길장사이니 '문을 연다'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축현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길장사를 하던 분들은 창영초등학교 쪽으로 옮겨 와서 길장사를 이어야 했고, 차츰 이곳에서 가게를 열어 꾸리다가 오늘날 창영동 1∼4번지하고 금곡동 13-1∼13-10번지가 맞닿은 길가로 다시 옮겨 뿌리를 내립니다.

 

한국전쟁 무렵부터 헌책방 장사를 하던 분으로 <삼성서림> 할배가 아직 씩씩하게 일손을 붙잡으며, <한미서점> 할배는 당신 아드님한테 물려주어 일손을 잇도록 합니다. 옆으로 <집현전>과 <대창서림>도 오랜 발자국을 남깁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아벨서점>이 '가장 젊은(?)' 헌책방이랄 수 있는데, <아벨서점>은 1970년대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 뒤로 여러 헌책방이 새로 열고 닫았는데, 공예전통 지하상가에 있던 <문학당>이 땅위로 나와 <문학당> 할배가 '퍽 젊은(?)' 헌책방으로 줄기를 이어간다 할 만합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창영초등학교 건너편에 <동네책방>이 새롭게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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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안쪽 모습 ⓒ 최종규

 

 (2) 작은 사람 작은 책밭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책방이 문을 열 수 있는 곳은 사람이 살 만한 동네입니다. 커다란 책방이 문을 여는 곳은 사람이 살 만한 동네라기보다 돈이 모이는 동네입니다. 동네 크기에 알맞춤하게 조촐히 문을 여는 책방이 하나둘 자리를 잡을 때에 동네에도 비로소 새 숨결이 태어난다 할 수 있습니다. 책이 가장 커다란 문화이거나 가장 소담스러운 삶자락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왔고 살아낸 슬기와 눈물웃음을 깃들어 놓은 책이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거름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책에 깃든 넋을 고이 받아먹으며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아름답다 말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이 살아가지 않으며 책만 읽는 사람은 하나도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착하게 살아가지 않으면서 책만 많이 읽는 사람은 조금도 착하지 않습니다. 참다이 살아가지 않으면서 책 지식을 가득 쌓은 사람은 터럭만큼조차 참답지 않아요.

 

<동네책방> 한켠에 꽂힌 '팔지 않는' 만화책 몇 가지를 들여다봅니다. <동네책방> 일꾼이 어린 나날부터 즐기던 만화책이라 하는데, 이 책들을 오늘까지 알뜰히 건사해 주었구나 싶습니다. 이 만화책을 돈셈으로 쳐서 판다면 제법 쏠쏠히 돈을 벌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만화책을 그냥 얌전히 꽂아 둔다면, 오가는 사람들 누구나 언제라도 즐거이 읽으며 그때그때 새로운 기쁨과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겨울 추위를 느끼며 천천히 책꽂이 사이를 누빕니다. <E.H.카/박순석 옮김-반역아 미하일 바쿠닌>(종로서적,1989)이라는 발가스름한 책을 집어들고 <조중의-사는 게 참 행복하다>(북노마드,2010)라는 책을 집어듭니다. <사는 게 참 행복하다>라는 책을 내놓은 이는 도시보다 시골에서 당신 삶을 꾸리고 싶다는 꿈을 천천히 이루어 간다고 이야기합니다.

 

.. 시골에 산다고 하면 십중팔구는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자고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시골의 너른 마당에 둘러앉아 숯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석쇠를 받쳐 고기를 구워먹는 것이 낭만적인 식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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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 최종규

 

처음부터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고기 구워 먹자고 이야기하는 동무는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옮겨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이처럼 말하는 동무가 으레 있고, 꽤 많습니다. 제 동무들도 으레 이처럼 이야기합니다. 시골을 몰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니, 시골에서 살아가는 까닭이나 맛이나 멋이나 뜻이나 값을 찬찬히 돌아볼 겨를을 내기 힘들도록 도시 삶에 지치거나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사람으로서는 싱그러운 바람과 따순 햇살을 받으며 고기를 굽다가는 하얗게 뜨는 밝은 달을 올려다보며 소주 한잔 기울일 때에 그동안 도시에서 복닥이며 쌓였던 고단함을 조금이나마 털겠지요. 이렇게 해서 고단함을 털지 않고서야 도시에서 버티어 내거나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手づくりを始め たい人のための ガイドブック>(日本ウォ-グ社,1978)를 고릅니다. 둘째를 밴 뒤부터 뜨개질에 한창 마음을 쓰는 옆지기한테 선물할 책입니다. 일본은 사진책이나 여느 잡지나 낱권책도 훌륭히 엮을 뿐 아니라, 그림책이나 어린이책 또한 훌륭한데, 뜨개책까지 아주 훌륭히 엮습니다.

 

한국땅 지식인 가운데 일본제국주의자들 낱말과 말투를 말끔히 털어내어 정갈하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요.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마해송, 이주홍, 권정생, 임길택 같은 분에다가 이오덕 님을 빼놓고, 참말 이 나라에서 옳고 바르며 참답다 할 한국말과 한국글을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당신 넋을 펼친 어르신은 누가 있으려나요. 요사이는 어린이문학을 하는 이들조차 옳고 바르며 참답다 할 한국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의 없다'가 아니라 '아예 없습'니다.

 

<the maya, palaces and pyramids of the rainforest>(Taschen,2001)를 봅니다. '타셴(Taschen)'에서 내놓은 책은 어느 책이든 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책이든 그림책(미술책)이든 건축책이든 남다르고 훌륭합니다. 책마을 한길을 알차며 싱그러이 걷는 출판사가 한국땅에도 모쪼록 차츰차츰 생겨나고 늘어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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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안쪽 모습. ⓒ 최종규

책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the maya, palaces and pyramids of the rainforest> 같은 책 하나는, 저로서는 가 볼 수 없는 곳 삶과 삶터와 사람을 책으로 만날 수 있는 기쁨과 고마움을 베풀어 줍니다. 살림돈도 적지만 여권마저 없는 저는 마야 문명 터전을 보러 몸소 찾아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나라안에서 나온 볼 만한 책이 있지도 않아요. 마야이든 아즈카이든 어디이든 나라밖 사람들이 내놓은 나라밖 말로 된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서 읽습니다.

 

<요네하라 마리/김윤수 옮김-인간 수컷은 필요없어>(마음산책,2008)라는 책을 고릅니다. 고양이와 개를 기르던 이야기를 담은 수필책인데, 뭔 놈 책이름이 요 모양인가 싶지만, 한국이든 일본이든 수컷이라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헤아린다면, 이런 소리를 들을 만합니다. '사람 수컷'이 얼마나 바보스러운지요. 막개발이나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은 사람 수컷입니다. 주먹다짐으로 동무를 괴롭힌다든지 이웃을 못살게 구는 깡패들 또한 사람 수컷이에요. 총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가르치는 군대 또한 사람 수컷이 꾸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쌍하거나 딱하거나 모자란 사람 수컷이기 때문에, 사람 암컷은 불쌍한 사람 수컷을 따스히 어루만지며 타이를밖에 없습니다. 딱하거나 모자란 사람 수컷은 너그럽고 아름다운 사람 암컷을 마주하면서 슬기롭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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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 최종규

 

 (3) 새롭게 다시 사는 책

 

<알렉스 헤일리/김종철,이종욱,정연주 옮김-말콤 엑스 (상∼하)>(창작과비평사,1978 첫/1993 고침)를 만나고, <존 헨릭 클라크/김영일 옮김-말콤X와 검은 혁명>(일월서각,1982)을 만납니다. <말콤X와 검은 혁명>은 도서관에 갖춘 책이지만 <말콤 엑스>는 도서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아내지 못해서 다시 장만합니다. 굳이 새로 안 사도 될 만하다 여길 수 있지만, 우리 도서관이 깃든 웃마을에 있는 이오덕자유학교를 다니는 열세 살 푸른 벗님이 이 책들을 읽고 싶다고 하기에 얼른 새로 사든 찾아내든 해야 했어요. 마침 <동네책방> 책꽂이에서 두 가지를 나란히 마주합니다.

 

.. 미국의 노예제도와 '집단의 일부를 살인하는 것'은 두 개의 전쟁으로 연결되었다. 멕시코전쟁과 남북전쟁. 인종에 기초하여 경찰, 법원, 백인 우월론자 집단에 의한 암살은 오랫동안 미국에 횡행되어 왔는데 최근에 고조되고 있다. 인종 학살은 그 성격상, 억압받고 있는 민중의 도전성보다 더욱 침략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암살의 범죄는 더욱 증가되고 있다. 헤이즈 틸든 타협 뒤에 테러리즘이 따랐다. 1·2차 세계대전 뒤에 테러리즘이 따랐다. 한국전쟁기와 2차 대전 전후에 매카시즘이 뒤따랐다. 더우기 인종학살은 대의 문제에 명확하고 확실한 관계를 가진다. 우리가 말하는 인종학살은 인기없는 베트남전쟁에 뛰어든 미국의 개입과 분리해서 생각되어질 수 없다. 콩고에 인기없는 미국의 간섭과 분리해서, 전 나찌 군국주의자와 비슷한 인기없는 미국의 일치와 분리해서, 쿠바를 전복하기 위한 인기없는 전쟁과 분리해서, 인종학살을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기없는 전쟁과 간섭은 민중을 침묵시키고 민중의 저항 의지를 진정시킨다. 미국 흑인 시민에 대한 폭력은 미국인의 생활 전반에 늘어나는 억압과 비례한다 ..  (534쪽)

 

이오덕자유학교 열세 살 푸른 벗님은 '말콤 엑스'를 읽습니다. 제도권학교 열세 살 푸른 벗님 가운데 말콤 엑스를 읽을 이들이 있을까 궁금한데, 이 벗님은 말콤 엑스에 앞서 노신을 읽었습니다. 열세 살 푸른 벗님한테는 말콤 엑스이든 노신이든 어려울까요?

 

저는 말콤 엑스나 노신을 열너덧 살에 읽지 않았나 떠올립니다. 그무렵에 이들 책을 읽으며 그리 어렵다고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외려 왜 이와 같은 책을 나한테 알려주는 어른이 진작에 없었나 하고 서운했습니다. 아쉽다면 번역은 그리 정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뭐, 다른 책이라 해서 번역이나 창작 말투나 말씨가 정갈하지는 않아요.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 읽을 책을 찾거나 우리 아이들한테 읽힐 책을 살핀다 할 때에는, 눈높이도 살펴야 하지만 책에 깃들어 놓은 이야기를 살펴야 한다고 느낍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이야기일는지를 살피고, 얼마나 고운 이야기인가를 돌아보며, 얼마나 참답고 착한 이야기인가를 톺아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곧은 한길을 신나면서 즐겁게 꾸리는 데에 길잡이가 되는 책인가 아닌가를 헤아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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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책꽂이와 걸상. ⓒ 최종규

 

그림책 <존 버닝햄/김원석 옮김-장바구니>(보림,1996)를 봅니다. 썩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다카하시 루미코-高橋留美子 걸작단편집 1>(하이북스,2002)를 봅니다. 곰곰이 책장을 넘기는데, 아무래도 해적판이군요. 다른 해도 아닌 2002년에까지 일본 만화를 해적판으로 내는 출판사가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참말, 한국땅 책마을이란 어디까지 막나가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은숙-책 사용법>(마음산책,2010)을 고릅니다. 이 책도 책이름이 이게 뭔가 하고 슬펐으나, 책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에 고릅니다. 책에 붙이는 이름이란 책을 쓰거나 내놓는 사람들 마음입니다. 책이름이야 그다지 눈여겨볼 만하지 않다 할 수 있지만, 책이름은 책 하나가 담은 넋을 모조리 보여주는 한 줄로 간추린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고서 쓰는 느낌글은 꼭 한 줄짜리 느낌글부터 원고지 1000장짜리 느낌글까지 골고루 있습니다. 책에 붙이는 이름이란 바로 '한 줄짜리로 쓰는 느낌글'이에요. 그런데 "책 사용법"이라니.

 

'왜, 책도 쓰지(사용하지) 말란 법이 있남?' 하고 물을 분이 있을 텐데, 책은 쓸 수 없습니다. 책은 다룰 수도 없습니다. 책방 일꾼이라면 책방에서 책을 다룬다고 할 테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읽을' 뿐, 다룰 수 없어요. 책은 물건이 아니라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파는 쪽에서는 그냥저냥 다룬다 할 만할 테고, 책을 잘 다루거나 건사하거나 갈무리해 주는 손길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 책 <책 사용법>은 책을 파는 일꾼 자리에서 들여다보거나 헤아리는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 자리에서 살피며 이야기를 엮으려는 책입니다.

 

.. 어느덧 나도 젊은 날의 파토스와는 많이 멀어진 듯하다. 이제는 좀더 명료하게 현실적으로 사물과 예술을 바라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김수영의 문학은, 그의 산문과 시는 언제나 나를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온다 ..  (212쪽)

 

시쓰던 김수영 님은 글을 잘 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글을 못 쓴 사람이 아니에요. 김수영 시인은 김수영만큼 글을 쓴 사람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쓴 글은 더 잘나거나 더 못난 대목이 없이, 오로지 김수영입니다. 시쓰는 김수영 님은 당신이 파블로 네루다가 될 마음이 없었고 정약용이 되려는 꿈도 없었습니다. 그저 김수영 시인은 김수영 시인으로 살면서 김수영 시인답게 당신 길을 걸었습니다.

 

<책 사용법>을 내놓은 정은숙 님은 정은숙 님 삶을 일구면서 정은숙 님 글을 쓰면 넉넉합니다. 김수영 문학이 당신한테 예나 이제나 깊은 곳부터 울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정은숙 님 또한 스스로를 울리는 이야기를 쓰면 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어느덧 나도 젊은 날의 파토스와는 많이 멀어진 듯하다" 하고 털어놓습니다. 꾸밈없이 털어놓습니다. 숨기지 않는 모습은 고마우며 반갑습니다. 그러나 숨기지 않는다고 해서 아름다운 글이지는 않아요. 글을 굳이 아름답게 써야 할 까닭이란 없어요. 글이란 내 삶을 사랑하면서 써야 하고, 글이란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을 씩씩하고 즐겁게 걸어가는 하루하루를 되살피면서 써야 할 뿐입니다.

 

파토스하고 멀어지면 어떻고 파토스처럼 그대로 살면 어떻습니까. 그저 그대로 내 삶과 결과 목숨과 눈매와 손길을 사랑하거나 아끼면 돼요. 다만, 정은숙 님은 아직 이 대목을 느끼지 못하는 듯싶습니다. 무언가 더 느끼셨다면 "책 사용법"이 아닌 "책 사랑길"이라든지 "책 나눔빛"이라든지 "책 물줄기" 같은 이름으로 당신이 책을 매만지며 돌보아 온 스물여섯 해 발자국을 한결 알뜰살뜰 엮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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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날 추운 마음으로 고운 책을 마주합니다. ⓒ 최종규

 

 (4) 작은 길은 작은 걸음으로

 

즐겁게 고른 책을 가방에 싸서 가져가지 못합니다. 제 가방에는 아이 옷가지랑 먹을거리가 잔뜩 들었거든요. 이제는 책방마실을 하며 사들이는 책은 늘 택배로 맡깁니다. 웬만하면 가방에 짊어지고 돌아가려 하지만, 버스길이나 기차길에서 아이한테 읽힐 그림책 몇 권을 빼고는 택배로 맡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더욱 젊던 날 혼자서 살아가던 때라면 마땅히 가방에 꾹꾹 눌러담고 자전거 짐받이나 짐수레에 꽉꽉 채우든지 끈으로 질끈 묶어 영차영차 날라서 가져가겠지요. 옆지기하고 둘이 살던 때까지만 해도 택배로 책을 보내던 일은 몇 번 없습니다. 늘 팔 빠지고 허리 빠지도록 들고 이고 지며 날랐습니다.

 

<동네책방> 건너편에는 창영초등학교랑 영화초등학교랑 영화여상이 있습니다. 요 옆으로 중구 유동 쪽으로 가면 정보산업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조금 더 오르면 도원동 꼭대기에 광성 중·고등학교가 있고, 더 안쪽으로 가면 숭의1동 중앙여상이 나오고, 신흥동1가를 지나 답동성당 건너편에 신흥초등학교, 큰길 건너 사동에 인천여상, 동인천 쪽으로 가면 인일여고와 인성 초·중·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들이 있습니다. 테두리를 넓혀 송림3동 쪽으로 가면 동산 중·고등학교에다가 박문여고하고 선인재단 학교들이 나와요.

 

그리 먼 옛날까지는 아니고, 딱 열 해쯤 앞서만 하더라도 이들 학교에서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걸어서 오가며 책을 사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습니다. 저는 스무 해쯤 앞서 고등학생 때에 한 시간 이십 분을 걸어와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십 분이나 이삼십 분을 들여 천천히 골목을 구비구비 돌고 돌면 여러 책방을 만납니다.

 

더 많은 책을 더 싸게 사들이는 헌책방이 아닙니다. 더 좋다 할 만한 책을 더 값싸게 찾아내면 좋을 <동네책방>이 아닙니다. 그저 책 하나 기쁘게 만나면 좋을 책방입니다. 내 삶을 밝히는 데에 도움꾼이나 길잡이가 되어 줄 예쁘고 반가운 책 하나 즐거이 마주하자는 책방마실입니다.

 

작은 책방으로 작은 사람이 작은 걸음을 내딛는다면 기쁘겠습니다. 작은 책으로 작은 가슴에 작은 사랑을 소담스레 피워올린다면 반갑겠습니다. 작은 손으로 작은 지갑을 열어 작은 돈을 꺼내어 <동네책방>이든 배다리 헌책방거리이든, 작은 열매 알뜰살뜰 담긴 책들을 살가이 보듬는다면 고맙겠습니다. 책은 삶이고, 삶은 책입니다. 책인 삶을 찾는 사람이고, 사람으로 사랑하며 일굴 삶을 만나는 책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알라딘 서재] http://blog.aladin.co.kr/hbooks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10)>(그물코,200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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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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