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맹세' 김인규, KBS 기자들의 '저항'

[정연주의 증언 48] '특보사장' 체제 후 폭풍 속의 공영방송

등록 2011.01.05 17:50수정 2011.01.0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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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어느 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모 방송사 사장 선임을 앞둔 시기… 한 사장 후보가 저를 만나자고 집요하게,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한나라당과 연관성이 깊고, 누가 봐도 아주 보수적 성향의 인사였습니다.

그가 던진 말은 충격이었습니다. '현재 사장이 방송을 장악 못해 비판적 보도가 많다, 확실히 장악해서 대통령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 임기 말인데 (방송장악이) 중요한 문제 아니냐, 거기엔 내가 적격이다, 특히 노조 하나는 확실히 장악해서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 그럴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를 밀어 달라, 난 한나라당 사람이 아니다, 믿고 도와달라.' 이런 얘기였습니다. 사실상의 충성맹세이자 은밀한 다짐을 한 것입니다."

김인규씨가 열심히 뛰어다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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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KBS 사장. 사진은 지난해 10월 18일 국회 문방위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 남소연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인터넷 한겨레>와  <양정철닷컴>에 올린 글 '청와대는 방송의 '쪼인트'를 이렇게 깠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글이 나간 뒤 곡절을 거치면서 이 글에서 언급된 인물이 KBS 김인규 사장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자 김인규씨 측은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대응했다.

법정에 가면 '충성맹세', '방송장악' 등의 이야기와 관련해 여러 '증언'이 나올 것처럼 보인다. 김인규씨가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2006년 가을 KBS 사장 선출 당시 이미 나돌았고, 그래서 이런 저런 흔적들이 남아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당시 김인규씨가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강동순 전 KBS 감사(전 방송위원회 위원)에 의해서도 4일 밝혀졌다. 그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당시 김인규씨가 열심히 가능성을 놓고 뛰어다니는 걸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광범위한 접촉의 흔적은 최민희 전 방송위 부위원장의 증언에도 나온다. <오마이뉴스> 보도를 보면 최민희 전 부위원장은 당시 일부 여권 인사들까지도 자신에게 '김인규씨가 KBS 사장을 하려고 하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되물었고, '청와대가 김인규씨를 내정했다, 그런데 왜 너 혼자 반대하냐?'는 등의 얘기를 여러 루트를 통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 전 부위원장은 "당시 김인규 사장은 경기고-서울대 인맥을 총동원해서 KBS 사장 인사로비를 하고 다녔다"며 "그런데도 '참여정부 때 인사로비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적절한 처신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오마이뉴스> 1월 1일 "김인규 사장, 호텔 로비 모임까지 찾아와 로비했다" 기사에서).

KBS 새노조 "'권력 줄대기' 구설수 자체가 치욕"

이처럼 '충성맹세', '방송장악' 등의 이야기가 나오자 KBS 새노조는 지난달 30일 성명을 발표하고 이런 증언들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한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KBS 사장 후보였던 김인규 사장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KBS를 잘 장악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 차마 눈뜨고 귀 열고는 보고 들을 수 없는 내용이다. … 대화내용의 진위여부를 떠나 권력 줄대기 처신으로 구설수에 오른 것만으로도 KBS구성원들로서는 정말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 '충성맹세' 논란이 과거형이라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청와대와 KBS간의 '부당거래'설은 현재진행형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추적 60분-4대강편> 불방 청와대 압력설에 이은 'K모 보도본부장의 청와대 낙점설'에 주목하고 있다.…'

KBS 새노조가 성명서 끝머리에서 우려했던 'K모 보도본부장 설'은 1일자 KBS 임원인사에서 현실화되었다. KBS 보도본부내 '하나회' 성격인 '수요회' 모임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진 고대영 해설위원장이 보도본부장으로, 그리고 민정당 사무처 요원으로 있다가 특채로 KBS에 입사한 뒤, 김인규 체제 출범 때 인력관리실장으로 발탁된 박갑진씨가 시청자본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고대영, 박갑진씨에 대한 이야기는 증언 42, 43, 44 참조 바람).

KBS 새노조는 이같은 임원 인사에 대해 3일 성명을 발표했다. 새노조는 고대영 신임 보도본부장에 대해 "전임 이병순 사장 시절 총괄기획팀장과 보도국장을 지내며 KBS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을 불공정과 편파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물"이라고 지적하고 "권력과 줄이 맞닿아 있는 고씨를 통해 청와대가 KBS뉴스와 시사프로그램에 관여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역사에 기록될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거든 지금 스스로 본부장 자리를 고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KBS 보도본부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려 온다. 고대영씨가 보도국장을 하던 시절, 그의 행태가 고압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젊은 기자들의 반감이 높았고 그래서 2009년 6월 KBS 기자협회에서 실시한 신임 투표에서 무려 93.5%라는 높은 '불신임'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인물을 보도본부장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는 게 김인규 체제의 한계라는 지적도 있다.

KBS 새노조 성명에는 나도 처음 알게된 이야기도 있었다. 박갑진씨가 2007년 대선 당시 엠비(MB) 캠프의 좌장격인 최시중 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포항언론인 모임에 참석해 '이대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를 외치는 등 사실상 정치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7년 대통령 선거 훨씬 이전부터 포항을 오가며 마치 한나라당 당직자와 같은 처신으로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이다. 박갑진씨는 이런 사실을 부인했다.

젊은 기자들 "KBS 명예 실추 장본인은 김인규씨 바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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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엄경철) 파업 7일째인 지난해 7월 7일 저녁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열린 '시민과 함께하는 KBS 개념탑재의 밤' 시민문화제에서 새 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들이 공정방송 사수와 임단협 체결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김인규 사장을 비판하면서 사퇴를 주장하는 이들은 KBS 새노조뿐이 아니다. KBS 보도본부의 막내기자들인 35기 기자들이 사장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미디어 비판'적 시각으로 KBS의 보도행태를 비판한 글을 발표했다고 하여 김용진 KBS 부산총국 울산방송국 기자에게 '4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린 것을 비롯하여, 새 노조원 60명에 대한 집단 징계 통보, 사내 게시판 댓글에 대한 징계 등 구제역처럼 번지는 KBS 사내 대량 징계 사태에 대해 막내 기자들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막내기자들의 '사장 사퇴 요구'에 앞서 2008년 1월에 입사한 34기 기자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34기는 내가 KBS 재임 중 마지막으로 뽑은 공채였다. 그들은 입사하자마자, 2008년 8월 초 나의 강제 해임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온갖 일들을 막내로서 지켜보았던 기자들이다.

34기 기자 26명은 연명으로 지난달 27일 발표한 성명에서 "입맛에 안 맞는 기사는 막고 비판적인 기자는 잡아가두던 군사정권의 화석이, 저희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밝힌 뒤 "공영방송 KBS의 명예를 실추시킨 장본인은 김인규 사장과 사측"이라고 비판했다.

34기, 35기 기자들의 성명서는 취재와 보도 최전선에서 일하는 KBS 젊은 기자들이 실제 체험하는 KBS의 모습과 분위기가 어떠한지, 한국의 방송이 어떤 현실에 처해있는지를 생생하게, 절실하게 증언하고 있다. 지금 시대를 증언하는 주요 문건이라 여기기에 거의 전문을 옮긴다.

[34기 성명서] 누가 KBS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까?

저희 26명은 입사 4년차로 접어드는 기자입니다. 전국 곳곳에서 KBS 기자로서 각자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 시깁니다. 또, 젊은 피가 좀처럼 수혈되지 않는 보도국에서 신참으로 가장 활기차게 일해야 할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KBS 기자로서의 모습에도, 조직의 신참으로서의 모습에도 의욕을 갖기 힘든 상황입니다.

특보 출신 사장이 취임한 후 탐사보도팀 해체와 부당 징계, 보복 인사, 잇단 정권 홍보까지. 저희는 KBS에서 벌어진 비상식적인 일들에 저항하며 수차례 제작 거부와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더 이상 KBS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상황은 신기록을 작성하듯 나빠졌습니다. 역사의 기록인 줄만 알았던 대통령 찬가가 9시 뉴스에서 방송되고, 지금도 실체를 모를 G20 정상회의에 KBS의 모든 역량이 투입됐습니다. 반면, 올해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천안함 사태와 4대강 사업에 대한 심층취재물은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방송됐습니다. 새로운 의제를 제기하기는커녕, 이미 벌어진 일을 기사로 쓰기도 힘든 언론사가 된 것입니다.

회사 내부에서는 국내 대표 언론사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치졸한 일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회사의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한 김용진 선배가 정직 4개월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는 저희들이 보기에, 이미 수뇌부가 실추시킨 KBS의 명예를 너무 적나라하게 고발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김용진 선배가 탐사보도의 새 지평을 연 훌륭한 기자라는 사실은 회사 밖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일로 능력 있는 직원의 고언에 징계로 화답하는 회사의 치졸함이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사장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 동기 김범수 PD의 글을 삭제하고 징계를 검토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KBS본부노조 파업 동참을 이유로 60명에게 징계를 통보한 일도 회사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파업의 책임은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않는 회사에 있습니다. 7월 파업 이후 빠른 시일 안에 체결한다던 단체협약은 12월이 돼서야 체결됐습니다. 뒤늦게 단체협약을 맺은 책임을 60명에게 물으려는 것입니까? 한 달이나 파업을 한 것을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면 본부노조원 1000명에게 모두 징계를 내리실 것을 권합니다. 사장과 간부들에게 고까운 노조를 만든 책임을 묻겠다면, 그 책임은 저희들부터 기꺼이 지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가 입사한 2008년 이후 두 번이나 사장이 교체됐고, 그때마다 안팎의 우려가 많았습니다. 그 우려는 KBS가 정권의 방송으로 전락했다는 비난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정치권력으로부터 KBS를 지키러 왔다는 김인규 사장 취임 이후 점점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태어난 저희 대부분은 군사정권의 언론 탄압에 대해 책으로만 배웠습니다. 입맛에 안 맞는 기사는 막고 비판적인 기자는 잡아가두던 군사정권의 화석이, 저희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이제 묻겠습니다. 밖으로는 정권의 방송이라는 비난을 받게 하고, 안으로는 비판하는 입을 막아 KBS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린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KBS의 명예를 실추시킨 장본인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는 김인규 사장과 사측, 바로 당신입니다.

KBS 막내기자들의 '사퇴 요구' 직격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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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30일 KBS 사측이 파업에 참여한 아나운서, 기자를 TV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킨 가운데 8월 3일 정오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 개념광장에서 열린 '임단협 재개 출정식 및 보복성 인사 규탄 결의대회'에서 KBS 새 노조 조합원들이 부당인사 철회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34기 4년차 기자 26명이 "KBS의 명예를 실추시킨 장본인은 김인규 사장과 사측, 바로 당신"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데 이어 35기 막내 기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인규 사장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35기 10명의 기자들은 지난달 30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렇게 그들의 심정을 밝혔다.

저희들은 보도국의 막내 기자입니다... 조직의 막내로서 가급적 말을 아끼고 자세를 낮추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회사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기 전에 먼저 온전한 기자로 성장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풋내기가 설친다는 냉소도 두려웠습니다. 저희들보다 먼저 의견을 표명한 34기 선배들의 용기에 감사함을 느끼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들이 막내 기자로 보내온 시간은, 한편으로 많은 의구심들을 억누르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의욕과 패기가 넘쳐야 할 수습기자 시절, 저희가 취재 현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었습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취재하다 욕설을 들으며 쫓겨나는가 하면, 멱살을 잡히고 뺨을 맞기도 했습니다. 집회나 시위를 취재하기에 앞서 ENG 카메라에 붙은 KBS 로고를 떼어 내야 했던 참담한 상황도 겪었습니다. 의욕과 패기는 버거운 짐이었습니다. 의아함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물을 쏟은 동기도 있었지만, 모두들 기자가 되기 위한 관문이라 믿으며 참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취임하신 뒤 그런 믿음을 간직하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공영방송이 가장 소중히 지켜야 할 가치는 공공성이라고 믿습니다. 공영방송 KBS는 국민이 공유하고 있는 재산의 일부이므로 권력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영역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KBS는 불행히도 권력의 확성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G20 정상회의를 홍보하는 데에만 주력했던 KBS 전파는 노동계의 우려나 해외 언론의 비판적 반응을 담지 못했습니다. 예산안 날치기를 왜곡 보도했다는 의혹에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연평도 사격 훈련에 대한 일각의 우려는 국가 안보를 담보로 무시되었습니다.

민간인 불법 사찰과 UAE 파병에 대한 분석 기사도 누락됐습니다. 4대강 사업을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 개조 꿈에 비유한 대통령의 발언은 즉시 소개됐지만,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한 프로그램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2주 동안 결방됐습니다. 결방 사유가 청와대의 압력 때문이라는 정황도 일부 드러났습니다. 청와대 직할 보도본부장이 내정됐다는 소문이 기정사실화 되어 거리에 나돌고 있습니다. 급기야 사장님께서 과거 청와대 고위 인사에게 방송장악을 다짐했다는 믿기 어려운 보도까지 나왔습니다.

저희들에게 더 힘든 것은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는 구성원들이 징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론노조 KBS 본부와의 단협이 체결되자마자 사장님은 지난 7월 파업에 참가했던 조합원 60여명을 징계하기로 하셨습니다. 파업 참가자 천여 명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60여명이 선택됐는지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외부에 매체 비평 수준의 글을 기고한 중견 기자도, 사장님의 퇴진을 권고한 막내 피디도, 사내 게시판에 댓글을 단 누군가도 징계의 대상 혹은 후보가 되고 있습니다. '징계 플루'라는 말이 회사에서 떠돌고 있는 사실을 사장님은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들은 사장님께서 30년 숙원사업인 수신료 인상을 위해 이 같은 악역을 자처하고 계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수신료 인상에 성공한 최초의 사장이 되기 위해 잠깐의 수모는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사장님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수신료가 공영 방송의 정당한 재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공영 방송에게 주어진 공적 책무를 온전히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이 수신료 인상 국면을 이유로 결방된다면, 그 순간 수신료 인상의 정당성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수신료 인상을 위해 공공성의 역할을 유보할 수 있다는 발상이야말로 수신료 인상의 정당성을 가장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사실을 언론학 박사인 사장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사장님께서는 '특보 사장'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호칭은 누구도 함부로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 같은 것입니다. 대통령 특보를 지낸 사장님이 KBS에 들어오심으로써 공영방송의 위상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저희 막내 기자들은 모두 사장님의 취임에 몸을 던져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공영방송을 지키겠다는 사장님의 취임사에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사장님 취임에 반대했던 선배들도 저희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저희들은 참담하게도 이 같은 기대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정연주 전 사장 시절로 돌아가자는 얘기냐,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 질문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세대입니다. 그 시간을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KBS란 거대한 조직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문제의식이 그런 식으로 왜곡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습니다. KBS 뉴스가 공정했다는 외부의 평가를 언급하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장님께서는 본인이 오랜 세월 몸담으셨던 보도국의 막내들에게도 이처럼 가혹한 평가를 받고 계십니다. 사장님을 가장 믿고 존경해야 할 사람들에게 그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사장님이 정말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조직이 가장 자랑스러워야 할 막내들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장님의 몫입니다. 국민들은 권력의 편에 선 공영방송을 외면하고, 직원들은 서로 징계를 받겠다며 사장님의 권위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 웃지 못 할 현실에 가늠하기 힘든 슬픔을 느낍니다. 이제 사장님은 결단하셔야 합니다.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KBS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장으로 남을지, 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사퇴함으로써 존경받는 선배로 기억될지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희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사장님께서 명예롭게 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반평생을 기자로 살아온 자부심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으시길 희망합니다. 사장님께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KBS를 떠나시는 순간, 저희들은 온 마음을 다해 뜨거운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4개월 정직' 중징계 받은 김용진 기자는 누구인가

젊은 기자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고 고백하는 KBS의 억압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은 최근 KBS 내에서 남발되어 온 징계 사태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KBS의 보도행태를 비판한 글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가해진 김용진 기자에 대한 4개월 정직은 가장 상징적 사건이 되어버렸다. 언론의 기본 기능,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비판 기능'인데, KBS 보도행태를 비판했다고 중징계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언론임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김용진 기자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KBS 경영진은 스스로 언론임을 부인하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을까. 그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서울 본사에서 부산 총국으로, 다시 울산국으로 유배를 당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시 4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받게 되었을까.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징계를 받은 뒤인 지난달 24일 그가 KBS 사내 게시판에 올린 'G20, 정직 4월, 그리고 WSJ'이라는 글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글 역시 이 시대를 증언하는 매우 의미있는 문건이다.

<미디어오늘> 기고글 ⓒ 화면캡처


'G20, 정직 4월, 그리고 WSJ'

1. 연평도 포격과 날치기 정국 등을 거치면서 이젠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그래도 G20 서울회의 당시 한 장면으로 되돌아가 보자. 11월 12일 오전 KBS 1TV는 <G20 특별생방송 : 위기를 넘어 다함께 성장>이라는 제목의 2시간 20분짜리 특집을 방송하고 있다. 프로그램이 마지막 절정에 이를 무렵 마치 <진품명품> 시간에 골동품 가격 매기듯 화면에 숫자가 숨 가쁘게 올라간다. 이윽고 '24조 6천억 원'에 멈춘다. 이어서 G20 회의가 가져온다는 경제 효과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한해 수출 403조의 16분의 1, 2002 월드컵 7조원의 3배, 일자리 11만 2천개 창출 효과, 자동차 100만대 수출 효과, 30만 톤짜리 초대형 유조선 165척 수출 효과"

하지만 압권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자장면이다. 그래픽 화면에 자장면 그릇이 나타나고 여자 진행자가 말한다. "좀 더 가슴에 와 닿게 자장면 값으로 계산을 해 볼까요" 자장면 한 그릇을 4천원으로 계산하면 61억 5천만 그릇이 나오고 국민 1인당 123그릇을 먹을 수 있는 양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이어진다. G20 개최를 통해 국민들이 1년 내내 사흘에 한번 꼴로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 경제 유발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엄청나다.

그런데 KBS는 이 수치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경제적 파급 효과는 훨씬 크다"라고 선전한다. "회의기간 내내 한국이 해외에 노출되면 국가신인도과 국가브랜드 가치가 상승해 수출증대효과가 18조 원에서 21조 8천억 원" 가량 또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리곤 마무리 발언이 나온다. 남자 진행자 왈, "네, 그야말로 엄청난 혜택입니다.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 자장면 123그릇이 국민들에게 골고루…."

2. "자장면 61억 5천만 그릇",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등의 유치찬란한 선전문구 등으로 가득 찼던 KBS 화면들. 이게 저널리즘인가? 아니면 프로파간다인가? 나는 <미디어오늘>에  이것을 프로파간다라고 썼다. 그리고 G20의 과다 편성과 홍보 일변도의 방송 내용은 KBS와 이명박 대통령 모두에게 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 또 김인규 사장에게 진정으로 옛 주군인 MB를 위하는 길이 뭔지 생각해보시라고 충언을 드렸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정직 4개월이다. KBS 취업규칙의 '성실'과 '품위유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나는 나치방송 또는 조선중앙방송에나 나올 법한 유형의 선전들이 국민들의 소중한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KBS에 버젓이 방송되는 것을 보면서,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말도 않고 지나가는 것이야말로 KBS 취업규칙의 '성실'과 '품위유지' 조항을 어기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3. 11월 11일 <미디어오늘>에 기고문이 나간 직후 한 일간지 기자의 전화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혹시 이 기고문 때문에 회사 내에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요? 요즘 KBS 사정이 좀 그런 것 같아서"라고 물었다. 나는 "우리 KBS가 그 정도로 망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웃어 넘겼다. 그러고 보니 지난 5월에 지방자치 관련 특집 프로그램을 취재하면서 울산지검 고위간부를 만나 몇 가지 자료를 요청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 검찰 간부는 긴 설득 끝에야 자료 일부를 협조해주기는 하면서도 이런 말을 던졌다. "지역 사회에서 KBS가 이것을 방송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 때도 "KBS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하고 웃어 넘겼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두 상황 다 내가 틀렸다. 기고문은 '정직 4개월'짜리가 됐고, 그 때 그 프로그램은 예고까지 나갔는데도 울산국장의 결방지시로 방송되지 못했다.

4. 지금 KBS 경영진의 행동양태를 KBS에서 24년이나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내가 외부의 검사나 타사 기자보다 더 예측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KBS가 그래도 아직은 밖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비록 KBS가 여러 어려움에 빠져있지만 KBS라는 공영방송 시스템 자체는 절대로 훼손돼서는 안 되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자, 우리가 굳게 지켜나가야 할 공론장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징계를 지시하고, 결정하고, 실행한 자들이 이번 징계를 통해서 그 누군가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것은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이번 징계를 통해 공영방송의 본분을 다하고자 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KBS 내 현업자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입을 막으려 의도했다면 그것만큼 가소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이전 어떤 글에서도 한 번 언급한 바 있듯 지금 KBS 현업자 대다수는 민주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다. 5공에 부역하고서도 공영방송 운운하며, 권력에 의탁해 KBS에서 단물을 빨아먹던 세대와는 다른 인류다. 망조(亡兆)라는 말이 있다. 망징패조(亡徵敗兆)의 준말이다. 수많은 직원들을 상대로 징계라는 칼을 망나니 칼춤 추듯 휘두르는 모습에서 망조를 본다. 

5. 2010년도 이젠 저문다. 불과 한 달여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세계 중심 국가로 우뚝' 섰었는데, 세밑인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인터넷 사이트에 자신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진(Year in photos)'을 월별로 클릭해 볼 수 있도록 올려놓았다. 올해의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은 포연 자욱한 연평도 사진과 국회의 예산안 날치기 현장 사진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감히 역사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고 자화자찬한, 단군 이래 최대 행사라던 G20 서울회의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획기적으로 올라간다던 국가신인도와 국가브랜드 가치는 포연과 화약 냄새와 유리창 깨진 국회의사당의 난투극 이미지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그런들 현 권력이 눈 하나 깜짝하겠는가. 이번에는 주류 언론과 함께 안보 게임을 즐기며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향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매 놓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실을 영원히 감출 순 없다. 최근 긴급조치 1호와 조선일보 방응모의 친일행각에 대한 법적 판단을 보라. 공영방송 KBS가 '저널리즘'과 '프로파간다'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서야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지금 김인규 체제의 KBS가 눈엣가시처럼 보고 있는 김용진 기자를 조금 더 잘 알기 위해서는 그가 KBS 탐사보도 팀장 시절, KBS 탐사보도팀이 어떤 성과를 이뤄냈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에게 정직 4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게 한 <미디어 오늘> 기고문 '나는 KBS의 영향력이 두렵다'라는 글을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기고문은 이명박 정권 아래 KBS, 나아가 방송과 언론을 참으로 적확하고 예리하게 분석한 역사적 문건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있다. 다음 '증언'에서 독자 여러분과 함께 그 문건을 들여다 보고, 그가 탐사보도팀장  때 어떤 일들을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정연주 #김용진 #KBS 새노조 #김인규 #양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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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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