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좀 씻고 다니세요... 냄새 나요"

세탁기도 없고 수도 고장나 빨래 못하던 할머니... 편견없이 환자 대할 수 있을까

등록 2011.01.13 17:22수정 2011.01.1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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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진료실 나로도 보건지소 한방과 모습입니다. ⓒ 최성규


그 분이 나타나면 진료실 안에 묘한 여운이 감돈다.


"자리 있소?"
"네, 있어요."

환자분을 맞이하는 여사님의 목소리가 반갑지만은 않다. 나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괜히 안타까워진다. 그 할머니는 냄새가 좀 나신다. 냄새를 느끼는 건 사람마다 주관적이지만, 창문을 열어달라는 분들이 있는 걸 보면 다들 비슷하게 느끼나 보다. 조용하게 다른 환자분께 물어봤다.

"저 할머니는 왜 저렇게 냄새가 나죠?"
"어판장에서 일을 해. 일을 도와주면 생선을 좀 주거든. 그러면 생선을 가져다 집에서 말려. 근데 왜 집 안에서 말리냐고. 밖에다 말려야 옷에 냄새가 안 배지."

목욕을 안 한 게 아니라 세탁을 못한겨

나는 전남 고흥의 나로도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고 있다. 나로도 산책을 하다보면 이따금씩 빈 병이나 상자 같은 것이 실린 카트를 끄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 자원봉사하러 할머니 집에 들렀던 사람들이 집 안에 그득 쌓인 쓰레기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소문 아닌 소문도 있다. 그런 모습도 할머니의 생활을 어느 점도 짐작하게 해 준다.


어느 날은 큰 맘 먹고 할머니에게 직언을 하기로 한다. 침을 맞으려고 어깨죽지의 맨살을 드러낸 할머니 몸에 살짝 코를 갖다 댄다. '어라, 냄새가 안 나네.' 이번에는 할머니가 옆에다 벗어놓은 옷을 향한다. '아, 옷이 문제구나.' 냄새가 나는 건 옷이었다. 그동안 할머니가 목욕을 게을리 한다고 투덜댔던 게 죄송해졌다.

"할머니, 좀 씻고 다니세요!"
"씻었어..."
"에이, 그러지 말고 씻고 오세요. 서로 깔끔하고 좋잖아요."

이렇게 할머니의 항변을 한 귀로 흘려 버렸다. 목욕을 안 해서 냄새가 난 건 사실이다. 목욕을 안 한 게 사람이 아니라 옷이어서 그렇지. 그래서 이번엔 빨래 이야기를 했다.

"빨래를 좀 자주 하셔야죠. 세탁기 있어요?"
"세탁기, 없어."
"세탁기 없으면 손으로 빠시겠네? 불편하겠는데."
"물도 안 나와."

어라, 물이 안 나온다니.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수돗물이 안 나와서 근처 학교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식수를 받아온단다.

"언제부터 그래요?"
"반 년 전부터."

이 말을 듣고 다시 물었다.

"아, 그럼 고쳐달라고 해야죠. 말 안 하셨어요?"
"말을 해도 안 고쳐줘... 못된 놈들이..."

'할머니 수도 고쳐주기 항의조', 임무 완수

여러 번 얘기했는데 안 고쳐줬단다. 할머니가 제대로 얘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을 처리하는 사람 입장에서 할머니를 만만하게 봤는지도 모른다.

"이거, 말 해야죠. 어디다 전화하면 되지? 제가 전화 한 번 해볼게요."
"아, 냅둬... 안 해준다니까.."

급한 사람이 오히려 말린다. 옆에 누워 있던 할머니들이 들고 일어선다.

"도와준다고 할 때 가만 있어."
"그래, 가만 있어."
"만만하다고 안 해주면 안 되지.. 그걸 그렇게 살면 되나?"

그 순간 '할머니 수도 고쳐주기 항의조'가 결성된다. 옆에서 같이 항의해 주겠다는 할머니 한 분을 끼워서 면사무소에 같이 찾아갔다. 입구로 들어가기 전까지 괜찮다고 손사래 치시는 할머니. 부담되나 보다. 그래도 완강하게 데리고 들어갔다. 막상 직원을 눈 앞에 대하자 할 말 다 하는 할머니.

조금 있다 찾아가서 살펴보겠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나서는 길에 바라보니 할머니의 얼굴이 활짝 펴 있다. 여기저기서 냄새 난다고 핀잔을 듣다 보니 의기소침해진 지 오래. 옷 깊숙히 굳어버린 냄새처럼 자신감도 굳어버린 할머니. 오랜만에 기분 좋은 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그 할머니, 수도가 고쳐졌길 바란다.
#공중보건의 #나로도 #수도 #할머니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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