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지막 총알을 타고 돌아올 것이다

[연재소설]미래는 남은자들의 유서이다(22)

등록 2011.04.14 08:07수정 2011.04.14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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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조종사나 카레이서로 꿈에 나타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그랬다면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들에 대해 은폐되고 도치된 그리움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엾은 아메드. 아빠를 떠나보낸 우리에게 남았던 유일한 희망. 엄마는 남동생을 묻은 후 한 번도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끈질긴 부인. 엄마는 순교자 집에 걸어두는 초상화 사진조차 거부했다. 아침에 아빠를 회상했을 때조차 가엾은 아메드는 없었다.


사촌동생의 장례식 때 엄마가 서둘러 돌아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생명보다 소중했던 내 새끼가 살해된 것이 재연되는 장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빠가 자동차경주대회 카레이서로, 엄마 꿈에 처음 등장했던 날이다. 엄마는 웃으며 꿈 이야기를 꺼냈다. F1그랑프리대회에 참가한 레이서처럼 각종 스폰서 로고가 화려하게 장식된 유니폼을 입었다고 했다.

- 그런데 더 우스운 건 차가 폭스바겐 비틀이었어.

순간 엄마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고통에 입술을 깨문 후 마른 가슴을 쥐어뜯고는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노란 딱정벌레차가 웅덩이를 피해 폴짝거리며 달리는 비디오 자동차경주 게임.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꿈이었던 아메드의 생일선물이었다.

그 후 엄마는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아니, 꿈을 꾸었겠지만 두려움에 떠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아빠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아빠인지 남동생인지 구분할 수 있을 때쯤부터 엄마는 다시 꿈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안도감 가득한 표정으로 아빠 이야기를 꺼내면 즐겁게 맞장구 칠 수 있었다. 출근하기 위해 문을 나설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거나 아예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는, 남동생 꿈을 꾼 것으로 이해하면 정확했다.

그럼에도 아메드를 만날 수 있는 잠은 엄마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는데, 지난 며칠간은 밤이 오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그리워할 기력조차 남지 않았던 것이다.

사피나는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이모 집에 가기 위해서는 한 블록 전에서 꺾어야 했다. 그런데도 굳이 길을 돌아온 이유는 완구점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건물은 미사일 공격을 받지 않았다. 녹색의 철제 덧문도 몇 군데 총탄자국을 빼면 깨끗했다. 그 위에 그려진 흰 구름을 타고 있는 알라딘은 작년 가을 직접 그려 넣은 것이다.

두 달 전 도시가 침공당하기 직전에 문을 닫은 후로 지금껏 열지 못했다. 이모는 누가 장난감을 사줄 마음의 여유가 있겠느냐며, 당분간 닫아놓자고 했다. 전쟁 중에도 아이들은 미래를 꿈꾼다. 그렇지만 부모가 짊어진 현실은 악몽이었다.

덧문이 잘 닫혀있는지 흔들어 본 후 시건장치도 점검했다. 가게 내부는 괜찮을지 확인해볼까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모가 자주 나와서 확인한다고 하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완구점 앞 도로를 건너 건물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사피나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Bismillahi Allah Akbar! 마른 체구의 남자가 밧줄에 두 다리를 묶인 채 4층 건물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짙은 색깔의 바지에는 흙이 잔뜩 묻었고, 상체는 발가벗겨졌으며, 늘어진 두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슴에서 흐른 검은 피가 목을 타고 머리카락을 적신 후 땅바닥에 흥건하게 흘렀다

시신 위에 걸린 흰색 플래카드에는 <이적 행위자에게 죽음을!>이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스라엘에 부역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처형되었다는 의미였다.

건물이 하산아저씨네 구둣가게라는 것은 더욱 충격이었다. 구두들과 가게 기물들도 도로에 내팽개쳐졌다. 몸집으로 보아 아저씨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가족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했다.

하산아저씨는 아빠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항상 아빠에게 깍듯했고 친절했다. 남동생이 앞창 뜯긴 신발을 가져가도 싫은 내색 없이 고쳐주었다.

아저씨네 대추야자는 어찌나 맛이 좋던지. 아빠와 함께 가면 선반 위에서 대나무 반합을 내려주곤 했다. 안에는 윤기가 돌고 말랑말랑하게 잘 건조된 대추야자가 들어있었다. 모로코에서 대추야자 도매상을 하는 친척에게 매년 주문하는 최상품이라고 했다. 가게를 나올 때면 두툼한 손으로 대추야자를 한 움큼 쥐어주곤 했는데. 이제 부역자의 집안으로 몰려 자식이 희생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기척이 없었다. 분명 하산아저씨 가족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나서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게 앞에 시신이 매달려 있는데, 놔두고 있을 수는 없다.

작년에 구두 고치러 갔을 때 가게를 지키던 남자는 하산아저씨가 아니었다. 이모 말로는, 넷째 아들이 가게를 물려받았다고 했다. 그가 이적행위로 피살되었다면, 그전에 다른 누군가가 시오니스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의미였다.

이곳에서는 죽음이 두려워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서로가 원수가 되고 복수가 새로운 원한과 고통을 낳고 있다.

지난 해 말에도 두 명의 부역자들이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사피나 친구의 친척이었다. 그의 죄목은 독립투쟁 하는 사촌형 살해에 가담한 죄였다. 신베트의 협박에 못 이겨 폭탄이 설치된 차를 사촌에게 빌려주었던 것이다. 사건 직후 그는 두려워서 도망쳤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곧바로 자치정부에 자수했다.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몇 시간 후 판사는 사형을 선고했다.

시오니스트들과 내통하여 독립투쟁 하는 사촌 살해에 가담한 죄는 분명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 또한 신베트의 집요한 덫에 걸린 또 다른 희생물이었다. 그런 그를, 양심의 가책으로 자수까지 한 그를 단 몇 시간의 군사재판을 통해 공개처형했다.

처형자들은 약식처형을 전투를 앞둔 출정식의 일환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의를 다지기 위해 동족을 살해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그것은 새로운 오류를 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빠가 살아계셨더라면 그걸 동의하셨을까. 그럴 법하다고 말씀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동의할 수 없었다.

- 나도 가서 돌을 던지고 침도 뱉었는 걸.

어떻게 이모 집에 왔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이모는 총에 맞은 줄 알았다고 했다. 핏기 하나 없이 집에 들어선 조카를 황급히 거실 소파에 앉힌 이모가, 찬물을 먹이고 팔을 주물러 준 후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귀속이 멍멍했고 자꾸 소파 밑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 그런 놈은 열 번 죽어도 싸다. 어딜 자기만 살려고 밀고를 하니? 자기만 죽으면 그만이지. 그 놈 눈초리가 힐끗힐끗 할 때부터 알아 봤다니까. 그깟 협박에 훌륭한 동지들을 팔아 넘겼다잖니. 사내놈이 되어가지고 말이지. 

이모의 설명에 의하면, 처형된 남자는 하산아저씨의 넷째 아들이 맞았다. 그렇지만 그 역시 시오니스트들에게 빌붙어 영화를 누리려고 부역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의 복수를 하려다 그렇게 된 거였다.

두 달 전이라고 했다. 엄마가 앰뷸런스에 실려 왔다가 치료받고 돌아간 직후였다. 이스라엘 군대가 나블루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파타운동 조직원 등 십 여 명을 무참히 살해한 후 퇴각했다. 자국 병사가 알 아크사여단조직원에게 피살된 것에 대한 보복이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핑계였을 뿐이다.

파타운동 당원이었던 넷째아들은 동지들과 함께 친구들의 복수를 결심했다. 분노와 애국심, 우정이 그를 행동에 나서게 했던 것이다. 보복 대상은 나블루스 외곽에 위치한 유대인불법정착촌이었다.

가혹한 점령지에서는 숭고한 감정들조차 종종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이 더 마음 아팠다.

그는 공격방법과 퇴각 방법 등을 동지들과 모의하고 준비하느라 자주 가게를 비웠다. 또한 죽거나 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했고, 곧바로 이스라엘 부역자들의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양의 탈을 쓴 부역자들은 빈틈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넷째 아들은 구두 재료를 구입하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신베트의 '러시아수용소'로 연행되었다. 들어가는 순간 방금 전까지 본인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린다는, 공포의 대명사인 그곳에서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모든 것을 자백했다. 그런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날 밤 풀려났다. 게다가 아무도 그가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것이 새로운 불행의 시작이었다. 누군가가 알았다면 이런 비극적 결말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지난 달 중순이었다. 별들이 달의 부재를 기뻐하며 하늘의 주인 행세를 하던 밤이었다. 며칠째 불던 뜨겁고 건조한 모래바람이 숨을 죽여 산책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다섯 명의 팔레스타인특공대는 칼리시니코프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출병했다. 목적지는 외곽의 유대인불법정착촌이었다. 그들은 최대한 목표물에 근접해서 가져간 총알들과 수류탄들을 모두 소모한 후에 마지막으로 남겨둔 총알을 타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특공대는 불법정착촌이 보이는 언덕에 접근하기도 전에 이스라엘 군인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수십 발의 조명탄이 일대를 대낮처럼 밝힌 가운데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1시간가량 계속된 전투의 결과 세 명의 전사는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다른 한 명은 치명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넷째 아들은 단 한발의 총알도 맞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알 아크사여단의 경험 많은 무장요원이 인솔했던 기습전에서, 총 한번 쏴 본 적이 없던 그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어딘가로 연행된 그는 집중 추궁을 당한 후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팔레스타인 #광주항쟁 #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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