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마흔되면 1년간 떠날 거야"

[30대, 내 멋대로 산다 ①] 프리랜서 사진가 조경국이 꿈꾸는 삶

등록 2011.05.01 10:54수정 2011.05.02 10:09
0
50,000
a

사무실에서. 자전거는 서울에서 출퇴근할 때 타고 다니던 물건이다. ⓒ 김대홍


프리랜서 사진가이자 출판편집자인 조경국(38)씨는 지난해 가을 부인에게 깜짝 고백을 했다.

"나이 마흔이 되면 1년간 자유시간을 달라."

부인은 단 한마디 말로 남편 말을 받았다.

"알았다."

마흔을 바라보며 조경국이 꾼 꿈은 '1년간의 자유'였다.

아침에 밥 달라고 식탁에 앉아 소리만 쳐도 '간 큰 남편'이라 불리는 시대에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내를 아니 만나볼 수가 없었다. 해서 지난 20일 오전 그가 사는 집을 찾아 경남 진주로 떠났다. 볕이 참 좋은 날이었다. 밭에 핀 꽃들은 유난히 색깔이 진했다.

조씨는 요즘 '반 주부'로 산다. 오전 7시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준비한다. 초등학교 1학년과 4학년인 아이들 학교 보낼 준비를 하고 밥을 먹인다. 8시 30분까지 등교지만 아이들은 항상 20분에 집을 나선다. 아이들 배웅을 한 뒤엔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한다. 방과 욕실 청소까지 한 뒤 사무실 출근.

오후 6시 30분엔 미술학원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7시에 집에 돌아오면 이젠 저녁 준비. 식사가 끝나면 잔소리 시간이다. 숙제했는지, 가방은 챙겼는지부터 "양말 뒤집어서 벗지 마라", "옷 제대로 걸어 놔라", "세수해라"가 이어진다. 아빠와 놀고 싶은 아이들은 10시 30분에서 11시쯤 돼야 잠이 든다. 그때부터 자유시간. 보통 새벽 1시에 잠자리에 든다.

아내가 병에 걸렸다, "여보 어서 내려와"

a

아이폰으로 아이와 문자를 주고 받는 조경국씨. ⓒ 김대홍

반주부로 살게 된 것은 지난해 초부터. 서울 직장생활이 길어져 부부가 만나는 횟수가 한 달에 1∼2회 정도로 줄면서 아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2007년경 참을성 많은 부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무 힘들다."

그 해 몸에 문제가 생겼다. 갑상선 기능항진증. 가슴이 쿵쾅거리고 살이 쏙 빠졌다. 피곤해 빨래를 개면서도 졸았다. 짜증도 늘었다. 알약 2개로 시작한 약이 알약 10개로 늘었다. 지방에선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망설였지만 아내는 최후통첩을 했다.

"일단 다 접고 내려와라. 일자리는 나중에 생각하고."

그렇게 서울을 떠나 진주로 내려왔다. 2010년 봄에 조씨가 귀향했는데 가을에 아내가 약을 끊었으니 남편이 내려온 효과는 컸다. 지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행복은 부인뿐만 아니라 경국씨에게도 찾아왔다. "행복하다"는 말을 자신 있게 내뱉는다. 우선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단다. 책 보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다 한단다. 돈 쓸 일도 크게 줄었다. 서울에서 살 때는 돈 새는 구멍이 많았다.

월세 23만 원, 식비 20만∼30만 원, 교통비 20만∼30만 원, 술값 등 친목비 20만∼30만 원 등은 진주에 내려온 뒤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사무실 월세 8만 원을 빼면 한 달 순수생활비는 20만∼3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여기선 100만 원만 벌어도 남아요. 서울에선 200만 원 벌어도 빠듯했거든요."

동생이 말했다, "청춘은 빚 갚느라 다 보냈네"

'작은 욕심 큰 행복'을 실천하는 조씨지만 그의 청춘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1997년 아버지가 실직했다. 앞으로 집안이 좀 힘들겠거니 생각했다. 아버지가 장남이자 종손인 경국씨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앞으로 학비를 대줄 수가 없구나."

졸업까지 2년을 남겨둔 경국씨는 그때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컴퓨터가게와 PC방을 하며 학비를 대고 집에 생활비를 보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몇 해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유산은 빚 2억2000만∼2억3000만 원 가량. 그 와중인 1999년 아내와 결혼을 했다. "엄청 부잣집 남자인 줄 알았다"면서 결혼한 부인이었다. 부인, 남동생과 함께 빚 갚기에 나섰다. 초기엔 매달 이자만 200만 원 가까이 나왔다. 게다가 종손인 경국씨는 매년 10차례가 넘는 제사를 지내야 했다.

어려운 형편에 남동생은 일찍 철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 굴착기 기사 자격증을 따 제 앞가림을 했다. "굳이 대학 안 가도 된다"며 식구들 부담을 덜었다. 그렇게 줄어든 빚이 이제 6000만 원 가량 남았다. 여전히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빚 갚기' 신공을 가진 식구들은 이젠 제법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얼마 전 남동생이 경국씨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형, 우리 청춘은 빚 갚느라 다 보낸 것 같아."

결혼과 함께 엄청난 빚을 떠안았지만 부부갈등은 없었다. 아내가 아버지 빚보증까지 선 상태에서 아버지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으니 원망이 생길 법도 하지만 아내는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내가 정작 힘들어한 것은 빚이 아니라 남편과 떨어져 있던 시간이었다. 경국씨는 "빚이야 갚으면 되잖아요"라 했다. 부창부수라 해야 할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딸 둘 딸린 부부는 보증금 4100만 원에 월세 17만 원인 23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산다. 경국씨 표현대로 하자면 "네 명이 살면 적당하고 세 명이 살면 넓은 집"이다. 내년엔 집을 살 계획이다. 집값은 9700만 원. 부부가 저축한 돈을 탈탈 털면 4000만 원 정도 된다. 전 재산이라 해봤자 집값에 조금 못 미치지만 전혀 모자라지 않다는 눈치다. '아이 특목고 보내기' '노후자금 10억 마련' 등 세상은 직장인들을 압박하지만 경국씨는 덤덤하기만 하다.

"애들에게 너희들 대학부터 돈 대주지 못하니까 미리 저축하라고 말해요. 출세하는 데 대해선 관심 없어요.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어요. 대학 안 가도 상관없어요. 먹고 살 능력만 있으면 그게 가장 큰 경쟁력이죠. 아내 생각요? 똑같아요. 요즘 엄마들 치맛바람이 무섭다는데 아내는 오히려 그런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요."

아이에게 꿈을 묻는다, "넌 뭘 하고 싶니?"

a

"남들 눈치 안보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고 말하는 조경국씨. ⓒ 김대홍

'간 큰 남편'뿐만 아니라 '간 큰 아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행복에 겨운 미소다. 몇 반인지 묻자 '큰 애는 5반' '작은 애는 3반'이라고 곧장 말한다. 몇 번인지도 안다. 유치원 졸업식 때, 학교 학예발표회 때 가봤단다.

경국씨가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좋아하는 것 찾아주기'다. 아이와 눈을 맞추며 수시로 묻는 건 "넌 뭘 좋아하니"다. 둘 다 그림을 좋아한단다. "그럼 만화가가 돼 보는 게 어떻겠니"라고 꼬시는데 아직까진 반응이 없단다.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교사는 '부모'라 했다. 아이들 꿈을 찾아주려는 아빠 또한 오래전부터 꿈을 꿨다. 사진이다. 20대부터 꾼 꿈이다. 사진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사진으로 먹고사는 데까지 이르렀다. 아르바이트까지 더하면 대략 한 달 수입은 200만 원 정도. "지출 빼고도 많이 남는다"고 시원스레 말한다.

그가 사진으로 담고 싶은 세상은 '아이들'이다. 나이 마흔이 돼서 1년간 휴가를 떠나게 되면 사진기 속에 아이를 담을 생각이다. 그렇게 찍은 사진으로 사진집을 낼 꿈도 꾼다. 지난해 5월 월 50만 원짜리 3년 만기 적금을 든 것도 그래서다. 만기가 되면 대략 1년 생활비와 사진집 출간비까지 마련될 것이라 자신한다.

꿈을 만드는 건 열망이고, 지탱하는 건 결국 현실이다. 꼬박꼬박 적금을 붓는 걸 보면 꿈이 달성될 가능성은 꽤 높아 보인다. 그의 노후가 궁금해졌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우리 부부는 우리대로 즐겁게 살 겁니다. 서로 손 벌리지 않구요. 노후엔 농사지으며 살 거예요. 우리 먹을거린 우리가 책임져야죠. 다행히 아내가 대학 때까지 논밭 일을 해서 농사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요. 저도 농사일을 해봤구요.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을 때쯤이면 50대 중반인데, 환갑쯤 되면 손자 볼지도 모르겠네요. 허허."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을 물어보니 "빚은 안 물려주고 싶다"며 '씩' 웃는 경국씨다. '돈'과 '자식'은 확인했으니 '목숨줄' 확인을 해보자. 얼마나 오래 살고 싶은가. 경국씨는 외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외증조할아버지께서 여든 넘어 병에 걸려 자리보전을 하게 됐어요. 어머님 말씀으론 그때부터 곡기를 끊고 그대로 돌아가셨다 해요. 생명연장을 하지 않고 그냥 떠나신 거죠. 저도 종종 생각해봐요. 몸이 아파 수발 받으면서 사는 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건강하게 살다 갔으면 좋겠어요."

이쯤이면 유언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을 것 같다. '잘 사는' 방법과 '잘 죽는' 방법은 서로 통하지 않겠나.

"제사도 지내지 말고 나 죽은 날 모여서 제사비용으로 가족끼리 맛있는 것이나 먹어라 하고 싶어요. 다 크고 나면 형제끼리 모이기도 힘들 텐데. 그날은 파티하는 날 하라고 하죠. 조상님들께는 미안하지만 다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쿨'한 경국씨. 앞으로도 남들 눈치 보지 말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기를 응원한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AD

AD

인기기사

  1. 1 '피의자와 성관계 검사'가 보여준 절대 권력의 민낯
  2. 2 "검찰개혁 누가 못하게 했나" 송곳질문... 문 대통령의 답변은
  3. 3 조국 PC 속 인턴증명서 파일은 서울대 인권법센터발
  4. 4 김세연 '동반 불출마' 사실상 거부한 나경원... 패스트트랙 때문?
  5. 5 '데드크로스' 대통령 지지율? 여론분석전문가도 "처음 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