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가 북한의 앵벌이 대변? 그의 메시지 폄하하지 말자

[정욱식 칼럼] 카터의 방북과 대한민국의 국격

등록 2011.04.29 15:44수정 2011.04.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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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답하는 지미 카터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이 28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디 엘더스 기자회견에 참석해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카터 전 대통령도 이제 한반도의 남북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이 소멸(消滅)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다."

"이번 방북을 계기로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 편애 입장에서 한반도 문제를 중재하겠다는 발상을 접어야 한다."

"카터는 "핵실험과 무력도발은 잊고 식량이나 달라"는 북한의 앵벌이를 대변하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엘더스 그룹'의 방북 결과에 대해 조선·중앙·동아(조중동)가 29일자 사설에서 차례로 언급한 구절이다. 카터 일행과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존경받고 있고 어떻게 해서든 남북관계를 풀어보고자 하는 외국의 전직 국가원수들에게 거의 욕설에 가까운 험담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서, 이들 언론이 그토록 강조해온 '대한민국의 국격'이 땅에 떨어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카터는 평양에 머물던 4월 27일 인터넷에 "미국으로부터의 안전보장 없이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전(停戰) 협정 이후 60년 이상 북한과 한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것은 비극"이라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평화협정 없이 비핵화 없다!

이에 대해 <조선>은 "김정일을 만나 비핵화를 논의하겠다더니 그 방북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평화협정이 없어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북의 핵무장 논리를 그대로 옮겨 놓고 말았다"며, "북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이야 한 해 두 해 된 얘기도 아닌데 그걸 대변(代辯)하겠다고 각국 전직 수반들까지 대동하고 굳이 평양 땅까지 날아갈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조선>의 지적처럼, 북한이 핵포기의 조건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한 것은 새삼스러운 소식은 아니다. 또한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에서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한반도 평화포럼 창설이 담겨 있다. 그러나 2005년 9월에 이러한 합의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평화포럼'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카터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최소한 평화협정과 북미관계정상화 등 북한의 안보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논의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한미 양국의 보수 진영이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협상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권고인 것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명제가 있다. 바로 '한반도 평화체제 없는 비핵화는 맹목이고, 비핵화 없는 평화체제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핵무기를 폐기한 다른 나라들,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로루시 등의 사례를 보더라도, 안전보장은 핵포기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카터의 메시지를 폄하하기에 앞서 과연 한-미-일이 북한의 안전보장에 대해 얼마나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였는지 자문해봐야 할 까닭이 아닐 수 없다.

MB의 식량 지원, 핵실험과 천안함 침몰 전에도 없었다

방북일정을 마치고 방한한 지미카터 미국 전 대통령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와룡동 남북회담본부에서 현인택 통일부장관과 악수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카터는 또한 "한국과 미국이 의도적으로 북한에 갈 수 있는 식량지원을 억제하고 있다"며 "식량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한 "북한 인권문제는 한국이나 미국이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미 양국의 보수 진영이 집중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북한문제 해결의 중재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선 북한에 들어가야 하고, 그러려면 북한의 인권탄압자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단선적 사고에 빠진 것"이라고 힐난했다. "북에 지원하는 식량의 대부분이 주민들의 인권을 탄압하는 통치자들에게 가는데, 이를 중단한다고 '인권침해'라고 하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인권문제는 외국 정부가 관여할 수 없는 문제'라면 대통령 시절 왜 한국 정부에 대해선 그렇게 압력을 넣었는가"라고 반문했다.

물론 카터의 발언에 대해 비판은 할 수 있다. 특히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외부에서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발언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그러나 카터를 비롯한 전직 국가수반들이 강조한 것은 북한 인권문제에 침묵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권리"인데, 북한의 참혹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르쇠하고 있는 한미 양국 정부의 무책임성이 한탄스럽다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인권문제는 외면하면서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접근하는 것은 정치 공세로 비칠 것이고, 이에 따라 북한의 실질적인 인권개선을 이룰 수 없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다.

<동아일보>는 사실관계까지 왜곡하면서 카터를 맹비난하고 있다. 이 신문은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고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자행해 지원이 중단된 사실을 제쳐두고 두 나라를 매도하는 궤변"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MB 정부는 북한의 2차 핵실험 이전에도, 천안함 침몰 이전에도 단 한 톨의 쌀도 북한에 보내지 않았다. '동물용 사료'를 검토할 정도로 쌀이 남아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을 중단한 것 역시 2차 핵실험 2개월 전의 일이었다.

통탄할 만한 '격세지감'

카터와 함께 방북한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은 북한 어린이를 비롯한 취약 계층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지난 4월 16일 세계식량계획(WFP)과 북한 정부가 양해각서(MOU) 체결했는데 식량배급 상황을 좀 더 잘 모니터링할 수 있는 훨씬 폭넓은 접근이 보장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여성, 아동을 포함한 인도적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별개로 다뤄져야 되는 기본적 권리"이고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는 생사가 달린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한 그로 브룬트란드 전 노르웨이 총리는 북한 의료, 보건, 위생 체계의 참혹성을 언급하면서 "아동들에게 저체중이 많고 전체 아동의 3분의1이 성장이 멈춘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아동의 두뇌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향후에는 후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극심한 식량난에 이어 이러한 추가 상황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분쟁 해결 전문가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은 "이제 한쪽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당사들이 만나서 대화 일정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며, 남북대화, 북미대화, 6자회담 등 대화와 협상 재개를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 ⓒ 청와대


이처럼 저명한 외국 인사들이 한국 정부에게 대북 지원과 남북대화를 촉구하고 나선 것은 대단히 낯선 풍경이다. 한국이 이들 전직 국가원수들에게 그만큼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비록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와 대북 지원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었다. 카터를 비롯한 외국의 많은 지도자들도 이를 적극 지지하고 협력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바뀌고 말았다. MB 정부는 대북 식량지원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의 대북 지원에도, 한국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에도 제동을 걸려고 한다. 북한은 조건없는 남북대화를 촉구하고 있지만, MB 정부는 사과부터 하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지만, MB 정부 들어서는 '평화협정'이나 '평화체제'라는 단어 자체가 실종되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와 보수언론은 엘더스 그룹의 방북과 이들이 전해온 메시지를 깎아내리기에 바쁜 모습이다.

물론 오늘날의 파국이 전적으로 MB 정부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엘더스 그룹의 역할이나 메시지에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선의를 갖고 임한 민간외교를 악의적으로 폄하하고, 무엇보다도 북한의 참혹한 인도적 위기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외면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자화상은 너무나도 낯설고 유감스럽다. '글로벌 코리아'니, '기여외교'니, '국격'이니 하는 말들이 공허하다 못 해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는 까닭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 '정욱식의 뚜벅뚜벅'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제 블로그 '정욱식의 뚜벅뚜벅'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카터 #대북정책 #엘더스 #대북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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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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