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누워! 누워버려!"

다리 깁스하고 운동회 선수보다 응원단장으로 참여한 나

등록 2011.05.24 10:58수정 2011.05.2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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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에서 친구들과 함께~~~^^ ⓒ 이슬비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날마다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야자)을 한다. 솔직히 열심히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놀 시간이 없다. 그러던 지난 4월 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 동안 마음 편히 놀지 못했던 걸 한풀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셋째 날 밤, 다리를 다쳐 버렸다. 숙소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그랬다. 남은 여행기간 나는 낙오자가 됐다. 한라산에 오르지도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병원에 갔더니 깁스를 해주었다.

벌써 몇 번째 깁스인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심심찮게 다리를 다쳐 깁스를 했던 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시는 것 같았다. 이후 나는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으며 학교에 다녔다.

깁스를 하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운동회 날짜가 다가오는 게 문제였다. 얼마나 기다려 온 운동회인데, 운동회에 참가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우려했던 대로 다리는 빨리 낫지 않았고, 운동회 참가는커녕 빨리 걸을 수도, 뛸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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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플래카드를 열심히 만들다가,,,,,, ⓒ 이슬비


운동회 날짜까지 깁스를 풀지 못한 나는 운동회에 단 하나의 종목도 참여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나는 기대만큼 실망이 컸다. 다른 친구들은 운동회 준비를 한다고 모여서 에어로빅도 하고 그랬지만 나는 구경꾼 신세를 면치 못했다.

친구들은 운동회 연습을 한다며 들떠 좋아하는데, 가만히 바라만 봐야 하는 나는 너무 서글펐다. '놀면서 조금만 조심할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운동회를 하는 이틀 동안 나는 뭘 하고 놀까 하는 고민도 생겼다.


아쉬운 대로 친구들과 운동회에 쓸 피켓과 플래카드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와 친구들은 운동회 전날, 야자가 끝나고 밤늦게 모여 피켓과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다음 날 있을 운동회를 생각하며 열심히 만들었다. 피켓은 목에 걸 수 있는 크기로 만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플래카드를 만드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친구들과 떠는 수다가 더 재미있었다. 평일인데도 새벽 1시 넘어서까지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즐거웠다. 공부를 했으면 진즉 잠이 왔을 텐데, 잠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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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에서 높다리 밟기를 하고 있어요. 빨강색 옷이 저희 반이에요!!! ⓒ 이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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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리 밟기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 이슬비


운동회 당일, 나는 참여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안고 학교에 나갔다. 그러나 막상 운동회를 시작하니 생각만큼 따분하지는 않았다. 우리 반 친구들이 모두 같은 경기에 출전하는 게 아니어서 같이 놀 수 있었다. 반 친구들 전체가 참여하는 줄다리기나 에어로빅을 할 때는 나 혼자 목청껏 응원을 하기도 했다.

줄다리기를 할 때는 친구들에게 "그 자리에 누워! 누워버려!!!"하며 코치도 했다. 줄다리기에 참가한 친구들보다 내가 더 열정적이었던 것 같다. 줄넘기, 7인 8각, 피구 등을 할 때도 출전하지 않은 친구들과 같이 열심히 응원했다.

그런데 밖에서 응원하다 보니 우리 반의 문제점이 눈에 보였다. 숲에 들어가면 나무는 보여도 숲을 볼 수 없다고 했던가. 내가 선수로 참가했으면 몰랐을 일들이었다. 피구를 하면서 우리 반 친구들은 공을 피하는데 급급했다. 공격 못지않게 방어도 적극적으로 해서 공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줄다리기를 할 때도 체구가 큰 아이들이 앞에 서야 잘 버틸 수 있는데, 여러 군데로 흩어져버려 단합이 잘 되지 않았다. 달리기 선수를 뽑을 때도 승부근성 없이 대충대충 뽑은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내가 꼭 코치나 감독이 된 기분이었다. 시합이 끝난 뒤 이런 느낌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더니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다음 번 운동회 때는 우리 반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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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기념샷! ⓒ 이슬비


운동회 중간에 같은 반 친구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같이 응원하고 반 구호도 목청껏 외치며 모두 단합된 모습을 잘 보여준 것 같아 뿌듯했다.

그래도 역시 운동회는 직접 참여해야 흥이 나는데... 나는 응원만 하다보니 빨리 지쳐왔다. 땀도 주르륵 흘러 내렸다. 다른 친구들도 지치는지 쉬는 시간에 하나 둘 졸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몇몇을 빼고 모두 졸았다. 목청껏 소리 지르고 온몸으로 응원한 나도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새 곯아 떨어졌다.

다리를 다쳐 운동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게 정말 후회가 됐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기분도 좋았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고등학생이지만 사소한 것에서라도 큰 재미를 느끼며 생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빨리 다리가 완전히 나았으면 좋겠다. 다음 운동회 때는 꼭 그라운드를 누비고 싶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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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에서~ 가운데 꽃을 꽂고 있는 게 저입니다. 그 옆에 갈색머리 분이 저희 담임 쌤!!! ⓒ 이슬비

덧붙이는 글 | ☞ 이슬비 기자는 광주 문정여자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슬비 기자는 광주 문정여자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운동회 #수학여행 #문정여고 #문정여자고등학교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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