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아름다운 구룡령 옛길을 걷다

[양양 여행 7] 갈천리에서 구룡령 옛길 따라 명개리로

등록 2011.06.02 18:29수정 2011.06.03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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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양양 읍내에서 홍천 내면까지 버스는 하루에 딱 1번 운행한다. 홍천 내면에서 양양 읍내까지도 마찬가지다. 양양에서 오전 8시 20분에 출발하고, 홍천 내면에서는 오전 9시에 출발한다. 그 버스를 놓치면?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른 교통편을 찾든가.

지난 5월 28일, 양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 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갈천산촌체험학교 앞 구룡령 옛길 입구. 이곳에서 구룡령 옛길이 시작된다. 그 길은 홍천 내면 명개리까지 이어진다. 지난 3월에 걸으러 왔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눈만 보고 돌아갔던 길이다.


그 길을 걸으려고 27일 밤, 양양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양양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30분을 훌쩍 넘긴 시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양양까지는 3시간가량 걸린다. 간이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양양 읍내까지 걸어 모텔을 찾아들었다. 그래야 오전 8시 2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늦지 않고 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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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구룡령은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오르는 길이 구불구불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를 지나 양양과 홍천을 잇는 길이 56번 국도다. 하루에 한 번 양양에서 홍천으로, 홍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버스가 이 길을 따라 달린다. 이 도로가 처음 뚫린 것은 1874년이지만, 구룡령 옛길은 그 길이 뚫리기 전에 사람들이 걸어서 넘던 길이었다. 물론 당시 뚫린 길은 당연히 비포장이었고, 이 길이 포장된 것은 1994년이라고 한다.

도로가 뚫리면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사라졌지만 길은 없어지지 않고 남아 '문화재길'이 되었다. 단, 문화재길 구간은 갈천에서 구룡령 옛길 정상까지다.

갈천리에서 명개리로 넘어가는 길은 그다지 긴 편이 아니다. 갈천리 옛길 입구에서 구룡령 옛길정상까지 거리는 2.75km, 옛길정상에서 명개리까지 거리는 3.5km. 그 길은 느릿느릿 유람하듯이 야생화까지 감상하면서 걸어도 다섯 시간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갈천에서 옛길 정상까지는 오르막길이 거침없이 이어지고, 옛길 정상에서 명개리까지는 내려가는 길이다.

문제는 명개리에 도착한 다음이다. 갈천리는 양양에서 하루에 다섯 번 버스가 드나들지만 명개리에는 버스가 들어가지 않는단다. 때문에 명개리 마을입구에서 외길을 따라 56번 국도까지 2km 이상을 걸어 나가야 하는데 그게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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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그곳에서 내면까지 나가려면 56번 국도를 따라 걸어야 한다. 창촌까지 버스가 있다고는 하나, 버스가 오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버스가 없는 지도 모르겠다. 버스가 없으면? 당연히 걸어야지, 어쩌겠나. 일단은 갈촌에서 명개리로 넘어간 뒤 생각하기로 했다.

홍천 내면으로 가는 버스 승객은 나와 남편을 포함해 달랑 세 명이었다. 이번 구룡령 옛길에는 남편이 동행했다. 우리는 갈촌산천체험학교가 목적지인데, 남자 승객은 내면까지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기사아저씨,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마디 한다.

"내면까지 가는 손님을 태우는 건 처음이네요. 내면까지 가는 사람이 있긴 하네요."

기사 아저씨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 남자 승객과 시선이 마주쳤다. 30대는 훌쩍 넘은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수줍게 웃었다. 눈길이 마주친 김에 명개리에서 홍천으로 나가는 버스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면까지 걸어 나가야 한단다. 명개리에서 내면까지 차를 타면 20분쯤 걸리는 거리란다. 그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잽싸게 계산을 한다. 차로 20분이 걸리는 거리면 최소한 20km는 족히 된다는 얘기인데, 걸으면 몇 시간이나 걸리려나.

우리가 갈천리에서 명개리까지 걸어갈 거라니까 기사아저씨가 백미러로 우리를 보면서 말한다.

"거기 걸으려면 다섯 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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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느냐, 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 도로가 아니라 구룡령 옛길을 넘으려고요. 내 설명에 아저씨는 백미러를 통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못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지 말고 곰배령으로 가란다. 현리가 여기서 가깝다면서. 고마운 걱정이지만 우리는 구룡령 옛길을 걸을 작정으로 어젯밤에 양양에 왔노라, 고 대답했다. 곰배령은 다음에 가지요, 했다.

양양 읍내에서 갈천리로 가는 길은 온통 푸른빛이었다. 지난 3월에 왔을 때는 세상이 온통 하얀빛이었는데, 봄빛이 무르익긴 했다. 버스가 송천 떡마을 입구를 지나면서 아카시아 향기가 열린 차창을 통해서 흐드러지게 스며들었다. 소담스럽게 피어난 꽃송이들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꽃은 쏟아내는 향기도 정해진 양이 있을까?

갈천산촌체험학교 앞에서 내렸다. 기사아저씨는 조심해서 잘 가라, 고 인사를 건넸고, 내면까지 가는 남자와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인사를 나눴다. 시골마을에서 버스를 타면 이런 게 좋다. 낯선 사람인데도 스스럼없이 이야기와 인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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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구룡령 옛길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에 집 한 채가 있다. 그 집에 있는 개를 본 남편, 어김없이 다가가 아는 체를 하면서 어른다. 개, 얘가 문제다. 낯선 사람을 경계해야 할 녀석이 반갑다고 꼬리를 치면서 난리도 아니니, 남들이 보면 주인이 외출했다 돌아오는 줄 알겠다.

5월의 숲은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연한 초록빛 잎새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1년 중 5월의 숲이, 5월의 나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 계절, 나무에 새로 달린 나뭇잎들은 초록보다 연두에 가까운 빛깔이다. 그 여린 빛이 품어내는 기운은 신선하면서 상쾌하기까지 하다. 옛길로 들어서니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갈천리에서 묘반쟁이, 솔반쟁이, 횟돌반쟁이를 지나 구룡령 옛길 정상까지 가는 길은 당연히 오르막이었다. 구룡령 정상의 높이는 1089m. 그곳까지 계속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숲길이기는 한데, 오르막이니 계속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는 얘기다. 올라가려니 정말 힘들더라.

10분을 채 걷기 전에 이마에서 땀이 퐁퐁 샘처럼 솟아난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머물지 않는 시원한 바람이 휘돌아들면서 불어와도 땀이 솟아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대신 흘린 땀을 시원하게 식혀주긴 했다. 숨을 몰아쉬면서 오르막을 걷다가 잠시 멈춰서면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불어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면 얼굴에, 겨드랑이에서 흘러 내려 옷을 적신 땀이 순식간에 식어 선뜩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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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령 옛길 금강소나무 ⓒ 유혜준


우람한 금강소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다. 아침식사를 걸러 터미널 옆 분식집에서 사온 김밥을 꺼내 먹으면서 금강소나무를 우러러 보고 또 우러러 봤다. 나무 둥치가 엄청나게 굵다. 남편이 나무에 달려가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지만, 절반도 채 닿지 않는다. 저렇게 나무가 굵고 크게 자라 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고 또 뻗으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할까?

묘반쟁이에서는 잠시 멈춰 이 길을 양양 수령을 업고 달렸다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청년을 생각했다. 결국 지쳐서 죽었다지, 그 청년은. 슬픈 전설이다. 청년의 묘가 있어서 묘반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지만, 묘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세월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막강한 힘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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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깨덩굴 ⓒ 유혜준


산죽이 이어진 길을 지나니 보랏빛 꽃들이 지천이다. 벌깨덩굴이다. 이 꽃들 말고도 옛길에는 하얗거나 노랗거나 보랏빛이거나 파란 빛의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내가 이름을 아는 꽃이래야 몇 가지 안 되니, 기껏해야 민들레나 제비꽃, 달개비 정도다. 그리고 금낭화와 매발톱꽃도 있다. 옛길에서 보았다.

길을 걸을 때 기껏 알아두었던 꽃 이름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 곧잘 잊었다. 그래서 길 위에서 다시 만나면 쟤 이름이 뭐였더라, 하면서 생각을 쥐어 짜내곤 하는데 쉬이 기억나지 않아서 애를 먹곤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산죽이나 속새는 기억이 나는데, 다른 애들은 가물거리면서 금방 생각나지 않고 이름이 입안을 뱅뱅 돌았다. 벌깨덩굴은 집에 돌아와 사진을 뒤적여보고 알아낸 이름이다.

한동안 동해를 따라 아스팔트길을 많이 걸어서 그런가, 부드러운 흙길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물론 오르막은 올라가기 힘들어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기를 반복했지만 발밑에 와 닿는 느낌은 무척이나 좋았다.

솔반쟁이를 지나고 횟돌반쟁이를 지났다. 옛길 정상을 앞둔 지점에서 앞서 가던 남편이 감탄사 비슷한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 커다란 소리로 되묻자, 꿩이라는 말이 들렸다. 그제야 저만치 앞에서 까투리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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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철쭉꽃잎이 뿌려진 길 ⓒ 유혜준


어, 저 녀석이 서둘러 왜 날아오르지 않고 종종 걸음이지?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았다. 까투리 녀석은 새끼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메추리보다 작은 몸집의 새끼 너덧 마리가 있었더란다. 새끼를 둔 어미는 낯선 침입자가 나타나자 침입자의 시선을 끄느라고 잰 걸음질을 쳤고, 그 사이에 새끼들이 풀숲 사이로 서둘러 흩어졌다는 것이다. 까투리가 그런 상황인 것을 몇 걸음 뒤에 떨어진 내가 본 것이었다. 남편은 그 짧은 시간에 새끼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기를 들이밀었지만 못 찍었단다. 나는 새끼는 보지 못하고 남편을 유인하는 어미만 본 것이다.

옛길 정상에 도착했다. 11시 20분. 옛길 정상에 있는 통나무 의자에 앉아 숨고르기를 하고 있으려니 구룡령 56번 도로에서 들어오는 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백두대간을 등반하는 중인지 갈전곡봉으로 가는 돌계단으로 한꺼번에 몰려간다. 5월은 산을 타기 좋은 계절이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20여 명쯤 되는 것 같다. 나도 그들을 따라 백두대간을 걷고 싶어진다.

2시간 가까이 오르막길을 헉헉거리면서 올랐지만 이제는 내리막길을 걸을 차례다. 구룡령 옛길 정상에서 명개리까지 가는 길은 죄다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은 내리막이라 숨을 몰아쉬면서 걷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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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확실히 사람들은 갈천리에서 구룡령 옛길 정상까지 가는 '문화재 길'만 즐겨 찾는가 보다. 명개리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걸은 흔적이 덜 하다. 연분홍빛 산철쭉이 지고 있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꽃잎을 스치면서 지날 때마다 꽃잎이 난분분 흩어진다. 좁은 흙길 위에 사뿐히 즈려 밟으라고 산철쭉나무가 꽃잎들을 무수히 뿌려놓았다. 5월의 막바지에 바람에 지는 산철쭉을 만나다니, 운이 좋았다.

명개리로 내려가는 길은 계곡과 맞닿아 있거나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계곡물이 수런거리면서 흘러내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아직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 이른 계절인가 보다. 중간에 멈춰 배낭을 내려놓고 계곡 돌무더기 언저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은 뒤 물에 발을 담갔더니 발이 시리다 못해 아프다. 몇 초를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발을 빼내다가 뒤로 자빠졌다. 다행히 옷은 적시지 않았다.

다시 발을 담근다. 발에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찌르르한 기운이 퍼진다. 발만 시린 것이 아니라 걷느라 푹 젖은 웃옷이 열기가 식으면서 찬 기운을 뿜어내 으스스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춥다. 발이 시리다 못해 동상에 걸리겠다, 고 남편이 너스레를 떤다.

토요일인데도 옛길을 걷는 이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우리 둘이 길을 독차지한 것 같다. 명개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50분 즈음. 더 빠르게 걷는다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천천히 느릿느릿 걸으면서 아름다운 숲을, 길을 감상해야 제격인 길이다, 구룡령 옛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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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개리에서 56번 국도까지 2km가 넘는 길을 걸었고, 그곳에서 다시 56번 국도를 걸었다. 확실히 봄날이 가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이 아스팔트를 달구고 있어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어디까지 걸어야 하나, 하면서 길옆을 보니, 창촌까지 19km라고 쓰인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저기까지 걸어야 한다는 얘기?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데 길 끝에서 우리를 마주보면서 사이클 여러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그쪽에서 먼저 속도를 늦추며 인사를 건넨다. 사이클 타는 사람들은 바람을 가르면서 빠르게 달려 아는 체를 잘 안 하는데, 이들은 여유가 있다. 잠깐 스쳐 지나가면서 서로 멋있다는 덕담을 나눴다.

가는 길에 점심이나 먹고 가자, 고 들른 길옆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이곳은 홍천군이지만 홍천까지 거리가 80km나 되기 때문에 생활권은 양양에 속한다는 게 식당 쥔장의 설명이었다. 양양까지 거리는 40km남짓. 밥을 다 먹고 나니 쥔장이 창촌으로 계란을 사러 나가는 길이라면서 태워다주겠단다. 고맙기도 하지. 그렇지 않으면 56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버스가 오면 세워서 타고 가려고 했다.

창촌에 도착해 홍천으로 나가는 버스시간을 확인하니 가장 빠른 게 4시 20분이다. 5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 내면파출소 앞 정자에 앉아 남편과 오랜만에 끝말잇기 놀이를 하면서 버스시간을 기다렸다. 그 놀이, 시간 죽이기에 그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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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구룡령옛길 #갈천리 #명개리 #구룡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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