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이토 처단 기록화, 왜 이탈리아에?

[서평] 이충렬의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을 읽고

등록 2011.06.24 08:34수정 2011.06.2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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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대 후반 일본의 한 젊은 사진작가가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부산 시내에는 적산가옥 등 일제강점기 건물들이 적잖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사진작가는 도쿄에서도 보기 어려운 왜식 건물들이 시내 곳곳에 남아 있는 걸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며칠에 걸쳐 이들을 카메라에 담고는 서울로 발길을 향하였습니다. 서울에는 더 좋은 '물건'들이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역에 내린 그는 1925년에 준공한 서울역(당시는 경성역) 건물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는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도심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경복궁 뜰에 일제 통치의 본산인 조선총독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서울시청(구 경성부청), 한국은행 본점(구 조선은행 본점), 신세계백화점(구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 등 다수의 일제 건물들이 거의 원형 보존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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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 1925년에 건립된 서울역사는 현재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자료사진


당초의 방한 일정을 늦춰 가며 이들을 취재한 그는 귀국 후 도쿄와 오사카에서 한국에 남아 있는 일제시대 건물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그는 또 이 건물들을 답사하면서 느낀 소감과 남산도서관에서 확인한 자료들을 토대로 60여 쪽 분량의 소책자를 하나 펴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잔영(殘影)을 찍다>가 그것인데, 이 책은 서울시내 일제잔재 건물에 대한 첫 기록입니다. 그 책 첫머리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역사는 역사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국내 출판계에 등장한 새로운 흐름 가운데 하나가 민중생활사에 대한 주목입니다. 이는 종래의 정치사(왕조사), 사건·사고사 위주의 역사서술 방식을 탈피한 것으로, 유럽에서 시작된 미시사(微視史) 서술방식을 본딴 것이랄 수 있습니다. 즉 정치사 대신 서적, 복식, 화폐, 음식, 건축, 회화, 생활도구 등을 역사서술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와 같은 책이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란 한마디로 말해 '옛날이야기'이며, 이를 기록하는 수단은 문자, 사진, 그림, 노래 등 다양합니다. 그간 대부분의 역사기록은 문자 위주로만 해석해 왔는데 이는 전적으로 문자 이외 분야에서의 노력 부족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예로 최근 일본에서 반환 움직임이 일고 있는 '조선왕실의궤'의 경우 왕실의 주요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한 것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그러나 여태 이를 대중적으로 풀어낸 성과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재미작가 이충렬(57)씨가 펴낸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김영사 펴냄)은 돋보이는 시도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그간 출간된 그림(미술)을 주제로 한 책들은 회화에만 중점을 둔, 즉 회화사나 작가론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림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씨가 펴낸 책은 그림이 주제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역사, 즉 우리의 근대사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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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렬 씨가 펴낸 <그림으로 보는 한국 근대의 풍경> ⓒ 김영사

그림을 통한 '우리 근대사 들려주기'

저자는 단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한 작가이자 대중매체에 르포, 칼럼 등을 써온 소위 '글쟁이'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림에 남다른 관심과 안목을 갖고 있으며,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탐구심이 돋보이는 '재사(才士)'랄 수 있습니다.

저자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외국생활에서의 그리움과 고독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모으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그림 모으기 '취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곰삭아 '식견'을 낳았고, 마침내는 지난 2008년 <그림애호가로 가는 길>(김영사 펴냄)이라는 첫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한편 그림 수집과정에서 해외에서 떠도는 한국 근대 관련 그림들을 더러 접하게 됐는데 저자는 이들 그림 속에서 우리의 근대를 읽어낸 것입니다. 즉, 이 그림들을 회화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림이 담고 있는 근대의 풍경에 주목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자는 경복궁, 고종·순종 황제,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괴짜시인 이상, 전설적 무희(舞姬) 최승희 등 역사인물들을 책이 아닌 그림을 통해 얘기해보자는 것이죠.

비단 유명인사들의 얘기만이 아닙니다. 나라 잃은 후 '망국민' 조선인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대동강의 황포돛배는 어떤 모습이었고, 또 향토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이 사라진 까닭은 무엇 때문이며, 근대의 유명 관광지는 어디였는지,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는 얼마나 깊었는지 등도 그 때의 그림을 통해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격동의 우리 근대사를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따져본 적은 여태 없었습니다.   

결론을 앞세우면 그림을 통한 '우리 근대사 들려주기'라는 저자의 색다른 시도는 과연 성공작일까요? 흔히 역사 이야기가 재미있고 또 유익하려면 두 가지가 만족돼야 합니다. 우선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솜씨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확한 근거자료가 그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이구라'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입심 좋은 재담꾼입니다. 게다가 온-오프라인를 넘나들며 국내외에서 찾아낸 자료 가운데는 전문가도 주목할만 것도 더러 있다는 점에서 일단은 성공작으로 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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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서울 경운동에 있는 음식점 '낭만'에서 열린 출간기념회에서 만난 저자 이충렬씨. ⓒ 정운현


"나는 그림을 통해 그 시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근대는 어떤 모습이며, 또 근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어디에 꽂혔을까요? 저자 서문 가운데 한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를 사유하지 않고서, 우리가 어떻게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오늘에 이를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까? 근대는 가장 가까운 과거인데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왜 우리의 시선은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 갇혀 있는가? 근대는 '상실의 시대', '잃어버린 시대'인가? 책의 출발은 여기다. 이 시대를 지나온 우리의 자취를 꼼꼼히 살피고 자유롭게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자칫 놓치고 있었거나, 혹은 짐짓 외면해온 질문들을 여러 각도에서 던져보고 싶었다. 그 답은 의외로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림을 통해 그 시대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1898년부터 1958년 사이에 그려진 외국 화가와 우리 화가의 작품 86점이 실려 있는데, 저자는 2007년부터 이 그림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해 초고 집필에서 수정, 보완까지 4년여의 시간을 쏟았습니다.

그가 풀어낸 이야기는 사료와 접목하여 꽃을 피운 셈인데요, 일본 통감부와 외무성의 비밀문서, 미국 국무부 문서와 재판기록을 비롯해 <고종실록> <순종실록> <황성신문> <독립신문> 등을 두루 망라하고 있습니다. 엔간한 역사학도 뺨치는 저자의 '자료쟁이' 근성이 돋보입니다.

저자가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첫 작품은 국운이 기울던 시기의 경복궁 주변을 조망한 유채화 한 점입니다.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가 1898년 조선을 방문해 그린 '서울 풍경'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멀리 북악산 아래 경복궁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앞으로는 기와집들이 궁궐을 호위하듯 늘어서 있어 조선 말기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무렵 서울은 근대가 막 시작되고 있었으나 3년 전(1895년) 이른바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이 궁궐을 난도질하고 간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화가 콘스턴스 테일러의 '서울거리 풍경'은 생동감 있는 거리 풍경화라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지금의 태평로 어디쯤인가를 일단의 사람들이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기도 하고 또 더러는 걸어서 가고 있는데 긴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습이 천상 조선인들입니다.

보스는 앞에서 언급한 '서울 풍경' 그림 속에 흰 도포 차림의 사람을 너댓 그려넣었는데, 그가 이를 주목한 데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저자는 추정했습니다. 보스는 1911년에 쓴 <자서전적인 편지>에서 "그곳(조선) 사람들은 항시 '유령처럼' 흰 옷을 입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무 말 없이 걸어 다녔다"고 쓴 적이 있거든요. 그가 '흰 옷'을 유심히 봤다는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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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턴스 테일러의 '서울 거리 풍경'(수채, 1894~1901년경) ⓒ 김영사


희귀 사료와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그림도 다수

근대 초기 그림들 가운데는 외국화가들의 작품이 적지 않은 데요, 외국인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가치가 큽니다.

면면들을 소개하면, 앞의 보스는 신혼여행 겸 스케치여행차 한국에 왔던 인물이며, 엘리자베스 키스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여류화가로 3·1운동 직후 내한하여 망국민들의 슬픈 초상을 여럿 그렸습니다. 또 한강의 황포돛배, 대동강 연광정 풍경 등을 그린 릴리언 밀러는 주한 외교관의 딸이었으며, '도공'의 일하는 모습을 그린 폴 자쿨레는 한국인 조수의 딸을 양녀로 입양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그림들 가운데는 학계를 놀라게 할 희귀 사료와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그림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끕니다. 대표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1952년 12월 휴전 협의차 방한한 아이젠하워와 이승만 대통령의 수도사단 회의 장면,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100년 전 내금강의 마하연 풍경, 또 1948년 평양을 방문한 벽초 홍명희가 김일성, 김두봉 등과 대화하는 모습 등이 그것입니다.

이밖에도 한국전쟁 당시 이응로 화백의 한강 도강 장면이나 만화가 고바우 김성환 화백이 그린 전시하 서울 풍경은 국내 최초의 전쟁기록화라는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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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 기록화 이탈리아 군사주간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9년 11월 7일자 1면에 실린 삽화. ⓒ 김영사


이 가운데 안중근 의사의 의거 장면을 그린 그림은 한국정부 예산으로 사서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걸고 싶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이토가 하얼빈역에 내리는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데, 그가 안 의사의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장면은 사진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의거 직후에 나온 <황성신문> 보도에 따르면 활동사진(동영상)이 있다고 하나 아직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던 군사주간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9년 11월 6일자 1면에 실린 이 그림은 이토가 쓰러지고 그 뒤편에서 안 의사(오른쪽 노란색 복장)가 제압당하는 모습을 담고 있어 기록화의 극치라고 하겠습니다.

국내화가 가운데 눈길을 끄는 사람은 러시아동포 3세 화가 변월룡(1910~1990)입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나 라시아에서 미술공부를 한 그는 한국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제1호 미술학박사'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러시아 레핀미술대 교수로 재직 중 북한에 파견된 그는 조선로동당 중앙위 회의에 참석한 김일성-홍명희-김두봉 3인을 스케치로 남겼는데,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날뿐더러 당시 이들 3인의 정치역학 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가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이밖에도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과 북한 포로송환 장면 등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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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 초기의 '3거두' 러시아동포 3세 화가 변월룡이 1953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에 참석한 홍명희, 김일성, 김두봉(왼쪽부터) 3인의 모습을 담은 그림 ⓒ 김영사


블로그를 통해 '고수'들의 조언과 검증을 마친 글 

역사학도도 아니면서 멸게는 100년도 넘은 이 그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집단지성을 통해 보완했습니다. 50대 후반이니 이제 중늙은이 축에 드는 나이이나 사이버 상에서 저자는 생기발랄한 20대도 저리 가라할 정도입니다.

수 년째 블로그('내가 만난 그림, 내가 만난 세상')를 운영해오고 있는 저자는 사전에 이 내용들에 대해 '고수'들로부터의 조언과 검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4일 서울 운현궁 옆 '낭만'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저자는 "책 내용을 사전에 블로그에 올려 검증을 거친 덕분에 별다른 사고 없이 책을 출간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해외를 떠돌던 한 이야기꾼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그림에 빠져산 지 10여 년만에 세 권의 미술분야 전문서적을 출간했는데 이런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림애호가로 가는 길> <간송 전형필>, 그리고 이번에 펴낸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미술 애호가로 시작한 그이지만 그가 펴낸 책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내친 김에 뻗친다고, 그는 또 한 권의 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최순우 전기>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또 하나의 시도를 해볼 모양입니다. 그는 "새로 낼 책은 소설형식을 가미한 전기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우리는 '소설가 이충렬'의 신작 하나를 접하게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 6월 24일(금) 오후 7시부터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티움에서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저자 특강이 열립니다. 미술애호가 여러분들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6월 24일(금) 오후 7시부터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티움에서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저자 특강이 열립니다. 미술애호가 여러분들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이충렬 #그림으로 보는 한국근대의 풍경 #휴버트 보스 #변월룡 #간송 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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