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국은 중국에서 패배한 사실을 쉬쉬할까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14편] '국공내전' 실질적 패배자는?

등록 2011.07.15 11:58수정 2011.07.1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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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을 이끈 장개석(장제스)과 모택동(마오쩌둥). 사진은 1930년대 초반의 모습. 사진은 위키페디아 백과사전에 있는 2개의 사진을 편집한 것.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일제 패망 뒤에 장개석(장제스)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벌인 대결. 우리는 그것을 국공내전(1945~1949년)이라 부른다. '국공내전' 하면 떠오르는 것은 흔히 '국민당의 부패'다. 이 전쟁의 승부를 가른 핵심 요인이 국민당의 부패라고 믿고 있다.

대규모 전쟁의 승패 요인을 분석할 때 흔히 전략이니 화력이니 하는 개념을 사용한다. "전략이 승부를 갈랐다", "화력이 승부를 갈랐다" 등등의 말을 자주 한다. 그만큼 대규모 전쟁에서는 전략과 화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실상 하나의 대륙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국공내전과 관련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략이니 화력이니 하는 개념은 온데간데없고 생뚱맞게도 '부패'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왜 유독 국공내전과 관련해서는 전략이니 화력이니 하는 개념들을 잘 사용하지 않는 걸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패는 다 있는 법인데, 왜 국민당의 부패를 그토록 열렬히 거론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국공내전의 또 다른 주역, 아니 실질적 주역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출될 것이다. 국민당·공산당뿐만 아니라 미국도 이 전쟁의 주역이었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 전쟁의 승패 요인을 국민당에서 찾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국공내전의 패인 정말 국민당의 부패였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이 뒤이어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동아시아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 전쟁에 고도로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조종하기까지 했다는 점을 입증할 만한 사례들은 매우 충분하다. 사실, 그런 사례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런 사례들이 갖는 국제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국공내전과 미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측면 가운데서 네 가지만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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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당시 미국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첫째, 미국은 공산당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국민당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1945년 4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소련·중국 주재 미국대사들은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원조할 생각이 없다. 장개석에 의한 중국 통일을 지지하며 중국 문제에 대한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한다"는 몰로토프의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중국공산당이 소련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둘째, 미국은 국민당의 국제적 입지를 제고시켜 주었다. 미국은 국민당이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측의 동맹조약을 주선했다. 그 결과물이 1945년 8월 14일 중·소 우호동맹조약의 체결이다.

자본주의 진영의 최강국인 미국에 이어 사회주의 진영의 최강국인 소련마저 국민당의 우군이 되었으니, 국민당은 양 어깨에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공산당은 고립시키고 국민당은 도와준 미국의 행보는 미국이 전쟁의 실질적 당사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미국은 국민당의 군사활동을 지원했다. 미국이 1937~1948년에 국민당 정권에 제공한 금액은 46억110만 달러다. 이 중에서 무상공여 및 차관인 35억2300만 달러의 60%는 국공내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1945년 8월 이후에 제공되었다. 이 돈은 당연히 공산당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당시, 국민당 군대의 253개 사단 중에서 39개 사단은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덕분에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우세한 화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미국의 지원은 또 다른 형식으로도 나타났다. 미국의 중국 방면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장군이 이끄는 육·해·공군은 국민당 군대를 중국대륙 이곳저곳으로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미군은 국공내전에서 '운전수' 노릇도 했던 것이다.

미군은 전투병도 파견했다. 1945년 8월에서 12월까지 10만 명의 미군이 황하 지역에 투입되어 국민당을 지원했다. 또 국민당이 불리한 지역에는 미 해병대가 급파되어 공산당의 기를 꺾어놓기도 했다. 국민당 군대가 코너에 몰린 지역인 상해·청도·천진 등에 5만 명의 미 해병대가 급파된 것은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의 긴급조치였다. 미국이 얼마나 열심히 이 전쟁에 개입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넷째, 미국은 국민당이 불리할 때는 전쟁판을 잠시 중단시키기도 했다. 공산당이 유리할 때는 국·공 양당의 대화를 주선함으로써 국민당에게 쉴 틈을 주었던 것이다. 농구나 배구 경기에서 자기 팀이 불리할 때 작전타임을 요청하는 것과 유사했다.

국민당이 공산당을 상대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생긴 뒤인 1945년 12월 12일 미국의 조지 마셜 전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그에 힘입어 1946년 1월 9일 양당 간에 휴전이 성립된 것은, '내 아이'가 '동네 아이'한테 얻어맞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현대 동아시아 질서 속 미국의 위상

위와 같이 미국은 가지가지 방법으로 국민당을 지원했다. 심지어는 전투병도 파견했다. 미국은 사실상 국민당의 후견인 내지는 기획자였다. 미국은 중국을 동아시아 전진 기지로 삼기 위해 이처럼 열심히 돈과 몸과 시간과 머리를 투자했다.

이것은 국공내전이 단순히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이 아니라 실은 미국-국민당 연합과 공산당의 대결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과 연합한 국민당이 이 전쟁의 패자라면, 미국도 당연히 패자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국민당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뒤에 미국이 1948년 1월 6일 '로이얄 성명', 같은 해 10월 7일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권고', 1949년 12월 30일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입장' 등을 통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위해 중국을 포기하고 일본을 선택하겠다"는 입장을 표시한 것은 자신들이 이 전쟁의 실질적 패배자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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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셜.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이처럼 미국이 국공내전의 실질적 패배자인데도, 오늘날 이 전쟁이 미국의 실패작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가 결정적 패배 요인이었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할 뿐이다.

만약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가 실패한다면, 그것을 주연배우의 실패로 보기보다는 임권택의 실패로 볼 것이다. 임권택 영화의 경우에는 주연배우보다는 감독이, 혹은 주연배우 못지않게 감독이 영화의 흥행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공내전과 관련해서는 그런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 미국이 국공내전을 기획하고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참전까지 했는데도 이 '영화'의 승패 요인을 주로 '주연배우'에게서만 찾는다. '감독'이 승패에 보다 더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국공내전 패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경우 미국의 핵우산 하에 있는 한국·일본의 충성심이 약해지게 될까봐 그러는 것일까? 동아시아 공산세력을 막아주겠다는 명분으로 한·일 양국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이 실은 중국공산당에 패배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질 경우 양국 국민들의 불신을 초래하게 될까봐 그러는 것일까? 제2차 대전에 승리한 미국이 동아시아에 진입하자마자 국공내전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미국의 지도력에 혹시라도 금이 가게 될까봐 그러는 것일까?

1945년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미국의 승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미국을 두려워하고 한편으로는 미국을 신뢰하고 있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공고히 하는 심리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공내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동아시아 질서는 한편으로는 미국의 승리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미국의 패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질서를 이루는 기초는, 절반은 미국의 승리이고 절반은 미국의 패배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확실하게 굴복시킨 나라는 일본뿐이다. 미국은 중국 무대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1950~1953년에 벌어진 전쟁에서도 실패하지 않았는가? 물론 형식적으로는 휴전협정으로 끝났지만, '그만한 나라'가 '그만한 나라'를 상대해서 비겼다면 과연 무승부라 할 수 있을까?

절반만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한 채로 미국이 현대 동아시아 무대에 진입했다는 사실. 미국이 지금도 '의외로' 강하지 않지만, 과거에도 '의외로' 강하지 않았다는 사실. 미국이 그다지 강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미국은 어느새 우리 앞에 무한정 작은 나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국공내전 #팍스 아메리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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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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