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대신 사장을 파견하면 어떨까

[서평] 하라코이치의 단편집 <마루밑 남자>

등록 2011.07.25 11:49수정 2011.07.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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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마루밑 남자는 남편보다 가정을 위해 같이 있어주었다. 오늘날 파괴되어 가는 가정의 의미. ⓒ 예담

"이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마루밑 남자는 남편보다 가정을 위해 같이 있어주었다. 오늘날 파괴되어 가는 가정의 의미. ⓒ 예담

매년 몇 백 명씩 자르는 대기업에서 성과급 몇 백 프로씩 챙기는 임원들을 손가락질 해봐야 현실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삼복더위에 수건 뒤집어쓰고 투쟁을 해봐야 남아있는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그만두는 이들도 생긴다.

 

몇 달씩 똥도 제대로 못 싸고 높은 데 올라가 홀로 싸우지만, 정작 아래에서 그를 응원하는 이들조차 그렇게 하는 심정을 십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 세상이다. 요즈음은. '경쟁'을 통한 성장을 내세우는 사회에서는 어차피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기도,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그럴 시간에 내 앞가림이나 잘 하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쓰기 힘든 것이 지금이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사회다. 수천만의 '나'가 어울려 잘 살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고. 제도가 잘 되어 있는 곳이라면 수백억 돈 잔치 하는 회사 경영진과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말단사원이 동시대를 사는 일은 생기지 않는 것이겠지.

 

이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 가족과 직장 등의 관계에서 오는 어색함과 생활의 비애를 맛깔스럽게 그려낸다. 현실이 아니라 매우 재치 있는 상상력으로 그린 가상세계다. 집에 거의 들어오지 못하는 가장 대신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다 비어있는 집의 마루를 차지하고 가장이 없는 동안 가족의 역할을 하는 <마루밑 남자>.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악랄하게 파산시킨 회사에 복수하기 위해 사내 전산망을 조작해 사원으로 투입된 <튀김사원>은 부조리한 직장 임원들과 이에 줄을 대는 중간관리자들, 달달 볶이는 사원들의 구조를 꿰뚫는 이야기다.

 

역시 경제 불황에 쉽게 희생되는 것은 여성이다. 이런 여성들의 비애와 반란을 그린 <전쟁관리조합>은 씁쓸하면서도 개운한 느낌도 있다. 아웃소싱이라고 하는, 파견사원들로 넘쳐나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생각하는 효율이 무엇일까.

 

<파견사장>은 그에 대한 역발상으로 사장을 파견하면 어떠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아주 능력 있는 경영자들을 한 달씩 무료로 파견해주는 회사. 오히려 진짜 사장이 손쉬운 회사운영으로 생각하고 택한 일이라는 점은 지금 아웃소싱 하는 기업들의 구조가 과연 효율적인가를 되묻고 있다.

 

정리해고 당한 중년 남자와 꿈꾸는 소녀의 만남과 동거를 그리는 <슈샤인갱>은 좀 슬프다. 직장생활 때문에 가족의 외면을 받는 가장과 이런 가장 밑에서 자란 소녀가 함께 생활하며 만든 관계로 꾸린 새로운 가족의 개념이랄까. 뭔가 재치 있는 상상력 정도라고 치부하기엔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배경은 모두 일본이라고 하지만 지금 한국은 그런 일본의 기업시스템과 경제구조를 뒤따르고 있지 않던가.

 

기지 넘치는 작가 하라코이치의 단편을 모은 <마루밑 남자>는 매우 유머러스하다. 동시에 뒷맛이 아주 씁쓸하다. 가족답지 못한 가족과 이의 중심에 서야할 가장이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외면 받고 있는 모습이나 무한경쟁과 비정한 사회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기업 간의 경쟁과 올라서기 위해서는 가차 없이 남을 밟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들이 낯설지 않기 때문일까.

 

읽으면서 터져 나오는 실소를 금하기 힘든 것은 작가의 문체와 상황 만들기 때문이라고 하면, 단편이 끝날 때마다 뒷맛이 매우 씁쓸하게 남는 것도 특징적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도 '마루 밑 남자'의 그 주인공처럼 아프기 때문이다.

2011.07.25 11:49 ⓒ 2011 OhmyNews

마루 밑 남자

하라 코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예담, 2010


#마루밑남자 #하라코이치 #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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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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