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실사구시, 자산 정약전의 도움 있었네

[서평] 김영주 장편소설 <자산 정약전>

등록 2011.08.22 20:07수정 2011.08.2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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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정약전> 표지 ⓒ 이리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은 늘 혼탁하기 마련이다. 정약전이 살던 약 200년 전 조선 후기에도 그랬다. 당시 조선은 지금의 한나라당격인 노론이 권력을 움켜쥐고 전횡을 일삼았다. 왕인 영조도 노론의 입김에는 자유롭지 못했다.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는 노론과 각을 세우다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비참하게 죽기도 했다.

영조 뒤를 이은 이는 정치 개혁으로 유명한 손자 정조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이기도 한 정조는 아버지를 잃은 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에 젊고 참신한 인물을 들여 노론을 견제하려고 노력했다. 뱃놀이를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던 약전도 그때 벼슬길에 나갔다. 그렇게 김영주 장편소설 <자산 정약전>은 운을 뗀다.


소설 속 약전의 아비 재원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함께 관직을 그만둔 심지가 곧은 인물이다. 재원은 자신을 닮은 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네 명의 아들을 뒀다. 고향에서 조용히 지낸 맏이 약현과 달리 약전, 약종, 약용은 지적 호기심이 매우 많은 지식인이었다. 이 셋은 물 건너 들어온 학문인 서학(천주학)에 흠뻑 빠진다. 서학은 과학적인 증명을 중심으로 천문과 농경, 측량 등의 영역에서 조선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정조는 벼슬길에 오른 약전과 약용을 귀히 쓴다. 장부의 기개도 있고 재능도 뛰어났지만 왕을 향한 충의와 백성을 위한 대의가 더 맘에 들었다.

약전이 듬직한 맛이 있었다면 약용은 재치가 뛰어났다. 정조는 궁에서 약전과 술을 기울이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수원 화성 축성으로 약전 형제는 정조의 큰 신뢰를 얻고 조정에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나고 욕심이 없으면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주위의 질투와 시기를 피할 수 없다. 약전은 낌새를 알아채고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약용이 문제였다. 군계일학의 재능을 가진 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노론의 견제를 온몸으로 받는다. 결국 약용도 고향으로 돌아온다. 참으로 비정한 게 정치판이었다.

"'깨어 보니 허망한 꿈인 것을.' 약관의 나이에 이곳을 떠나 불혹을 넘겨서야 돌아왔으니. 딱히 모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꿈과 포부는 온데간데없고 세상에 대한 불신과 실망만을 품고 왔으니. 약전은 고향집을 매심재(每心齋)라 지었다. 매와 심을 합치면 회(悔)가 되니 즉 후회의 집이란 뜻이었다. 공연히 벼슬길에 나갔다는 후회가 담긴 이름이었다." - <자산 정약전>, 141쪽


매심재의 평화로운 날은 오래 가지 않는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다시 노론의 세상이 온다. 보수적인 노론은 호서 지방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천주교를 문제 삼는다. 하지만 실제 칼끝은 약전 형제들과 같은 개혁적인 젊은 지식인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외육촌 윤지충과 내외종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위패를 불태운 죄로 참형을 당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제사 거부는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기세가 오른 노론은 기강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천주교도를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 도학을 버리고 천주교에 빠진 약종이 그들의 표적이었다. 약종은 아내와 아들 철상과 딸 정혜를 모두 천주교로 끌어들일 만큼 열성 신도였다. 약종이 잡히면서 불똥은 결국 형제간인 약전과 약용에게까지 튄다. 관직에 몸담아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게 탄압의 이유였다.

결국 청운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약종은 처형되고 약전과 약용은 모진 고문 끝에 흑산도와 강진으로 각각 유배의 길을 떠난다.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생이별이었다. 왕에게 충성하고 소임을 다한 죄치고는 너무도 가혹했다.

약전과 약용은 당시 촌구석에 불과한 유배지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약전은 아들 학초의 죽음을 전해 듣는 등 견디기 쉽지 않은 시련을 겪었음에도 늘 연구하는 지식인상을 보인다. 낯선 곳의 두 사람은 학문에 정진하고 또 정진한다. 비록 오지이긴 했지만 그곳도 역시 사람이 숨 쉬는 곳이었다. 학문이 출중한 약전은 섬에서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틈틈이 훈장 노릇을 한다.

이곳에서 약전은 민본주의를 토대로 소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는 금송절목의 문제를 지적하고 식목을 장려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담은 <송정사의>를 쓰게 된다. 홍어장수 홍순득의 동아시아 표류 사실을 글로 옮겨 <표해시말>도 펴낸다.

"약용이 '사촌서당기(沙村書堂記)'를 지어 보냈다. 누에채밭을 비유 삼으며, 설령 멀고 먼 섬에 살고 있다할지언정 학문에 뜻을 두고 노력한다면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응원을 담은 글이었다." (위의 책, 291쪽)

약전은 약용과 서로 다독이며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해 나간다. 타고난 천재끼리는 통하는 데가 있었다. 약용이 주역의 이치에 대해 분석한 <주역사해>를 완성하는 동안 약전도 가끔씩 전달 받은 초고를 보고 의견을 보탰다. 약용은 나중에 약전의 조언을 모아 별도로 <자산역간>이라는 이름으로 엮기도 한다.

평소 생태계에 관심이 많았던 약전은 어느 날 흑산도의 생물에 대해 자료를 남기기로 한다. 그게 바로 약전의 대표적인 책으로 꼽히는 <자산어보(자산해족도설)>다.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에 자생하는 155종의 수상생물에 대해 각각의 명칭과 분포, 행태, 습성 및 이용법 등에 대해 알아보고 꼼꼼히 적어둬 현재도 참고가 되는 훌륭한 책이다. <자산어보>를 준비하는 약전은 절망 속에서 또 희망을 품는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자산해족도설.' 약전은 한 자 한 자를 힘주어 발음하였다. 오랜 세월 깊숙이 품었던 진주가 오색창연한 광채를 흩뿌리며 퍼져 나갔다. 시리도록 눈부셨다." (위의 책, 314쪽)

<자산 정약전>의 지은이인 김영주 소설가는 문득 경기 남양주시 마재 강가에서 그곳에 200여년 전 터를 잡고 살았던 약전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의 삶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동생인 약용에 비해 덜 알려진 약전을 소설로 다루는 건 그만큼 힘들지만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으로 믿는다.

지은이는 <자산 정약전>에서 소설의 재미와 역사의 흐름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그가 적지 않은 사료를 찾아가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소설가의 손으로 정약전이 세월을 거슬러 생생하게 나타났다.

덧붙이는 글 | <자산 정약전> / 김영주 지음 / 이리 펴냄 / 값 1만 1000원


덧붙이는 글 <자산 정약전> / 김영주 지음 / 이리 펴냄 / 값 1만 1000원

자산 정약전

김영주 지음,
이리, 2011


#정약전 #자산어보 #김영주 #정약용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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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동작구위원장. 전 스포츠2.0 프로야구 담당기자. 잡다한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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