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얼굴·부리가 그대로...이걸 하루에 7개씩 먹다니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⑤] 필리핀 보양식 '발롯', 잔치음식 '레촌 바보이'

등록 2011.09.06 20:36수정 2011.09.06 20:36
0
원고료로 응원
발롯, 17일짜리에 도전하다

얼마 전 루시는 '한국 사람과 사귀려면 한국 매운 라면에 김치를 먹어봐야 한다'는 내 제안에 휘말려 눈물 콧물 쏙 뺐습니다. 같은 바랑가이(필리핀의 행정단위, 우리나라 '동'에 해당합니다)에 사는 루시네는 닭과 오리를 많이 키우는데 어찌나 건강한지 그 집 닭들은 점프는 물론이고, 심지어 날아다녀서 주로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루시가 '발롯'을 가지고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발롯은 부화되기 바로 전의 오리알을 삶은 것입니다. 이전에 술에 취해 10일짜리 발롯을 먹어본 경험이 있었던 터라 그리 놀랍진 않았습니다. 내부를 보지 않고 먹으면 그리 거북하지 않고, 맛도 맥반석 계란처럼 쫄깃하고 일반 계란보다 3배는 고소해서 먹을 만했기 때문입니다.

a

필리핀 사람들은 발롯을 먹어야 진정한 친구가 된다고 말합니다. 발롯, 투표용지(ballot)가 아닙니다. 필리핀에서 먹는 오리알을 말합니다. ⓒ 조수영



"필리핀 사람과 사귀려면 이걸 먹어야 해."
"나 발롯 먹을 수 있어."
"몸에 좋은 거야."
"며칠짜린데? (나도 먹을 수 있다고!)"
"(이건 좀 힘들걸?) 17일짜리."
"(허어억!) 17일짜리를 어떻게 먹어. 난 한국 사람이야."
"아냐, 넌 내 친구니까 필리핀 사람이야. 그래서 넌 먹을 수 있어. 나도 그 매운 라면에 김치 먹었잖아!"
"넌 김치 맛있게 먹었잖아."
"발롯도 맛있어."
"난 (알의 형태를 가진, 10일 정도의) 귀여운 것만 먹을 거야."
"그래. 이거 엄청 (오리 모양이 그대로 있어서) 귀여워."

a

발롯은 수정된 오리알을 부화 직전에 삶은 것입니다. 즉 그 안에 흰자, 노른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직전의, 살아있었던 오리새끼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 조수영



루시가 직접 껍질을 까주는데 거무튀튀한 속살에 주홍빛 실선들이 보입니다. 혈관입니다. 좀 더 껍질을 제거하니 검은색 털이 보입니다. 작은 뼈들이 있고 계속 바라보니 날개, 얼굴… 오리의 부리… 정말 새가 들어 있습니다. 털이 나 있는 오리새끼가 웅크린 채 죽어 있습니다. 미끈한 피부로 덮여 있는 눈은 아직 여물지 않아 외계인의 튀어나온 눈 같습니다. 작은 부리에 앙증맞은 다리, 금방이라고 꽥꽥거리며 걸어나올 것 같은 그 모습입니다.


'먹어야지, 아니 먹어봐야지.'

죽은 오리에게 눈길을 똑바로 주기가 힘듭니다. 벌써부터 얼어붙은 마음이 더 그렇습니다.
주눅 들지 않으리라는 호된 결심에도 막상 입을 대자니 머릿속만 복잡해집니다.

a

18일이 넘으면 거의 완전한 오리의 형태를 보입니다. 이정도로 내부를 보고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습니다. 처음 드시는 분은 반드시 어두울 때 드십시오. 미리 탄두아이 반 병 마시고 취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조수영


우선 윗 부문을 살짝 깨서 뜨끈한 육수를 마십니다. 전에 먹었던 10일짜리와는 확연히 다른 진한 맛이었습니다. 비린내를 덮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굵은 소금을 잔뜩 뿌렸습니다. 껍질을 좀 더 깨고, 눈을 질끈 감고 내용물을 삼켰습니다. 먼저 목구멍을 넘어가는 뜨거운 액체는 체액일 것이고, 뭉클거리는 이 느낌은 여물지 않은 몸통일 겁니다. 부드러운 살점이 넘어가고 입안에는 단단한 것들만 남았습니다. 머리뼈일까? 아님 부리?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소리가 내 머릿속 신경의 주파수를 급격하게 늘어나게 합니다.

아 이런, 깃털이 이빨 사이에 낀 것 같습니다.

"넌 이제 내 친구야."

필리핀 사람과 친구 맺기 참 힘이 듭니다. 죽은 오리라고 생각하면 '세상에서 제일 못 먹을 음식'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더운 날씨에 저렴한 가격(15페소, 400원 정도)으로 하루에 한두 개, 현지인들은 6~7개씩 먹으면 기운이 솟는 발롯은 필리핀 최고의 인기 보양식입니다.

해질 무렵 찾아오는 발롯 장수

매일같이 해질 무렵, 자전거 앞에 발롯을 담은 스티로폼 박스를 달고 "발로옷~ 발로오오옷~~"을 외치며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발롯 파는 사람이 옵니다. 물론 발롯 말고도 갖가지 불량식품을 같이 팔구요, 항상 손이 델 정도로 뜨거운 상태로 파는 것이 특징입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도, 술집에서도 발롯을 파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필리핀에선 대중적인 음식입니다. 물론 한국 사람들 중에도 보신탕을 먹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필리핀 사람들 중에도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a

매일 해질 무렵 자전거 앞에 발롯을 담은 스티로폼 박스를 달고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발롯을 파는 사람이 옵니다. ⓒ 조수영


"오늘 삶은 거니?"
"아니, 다시 데운 거야."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에 항상 놀랍니다. 신선함을 확인했다면 며칠자 달걀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유통기한이 아니고, 부화가 진행된 지 며칠이 된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외국인이 먹기에는 12일 정도 된 것이 적당한데, 계란찜 같은 노른자 부분이 많고 머리를 제외하면 그다지 형태가 보이지 않아 거슬리지 않습니다. 18일이 되면 이미 몸에 털이 있고 혈관이 두꺼워집니다. 21일이 지나면 거의 성체가 되어 삶은 오리 새끼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거 하나면 통오리 한 마리를 먹는 셈이 됩니다.

최근 미국의 한 언론사가 발롯을 세계 10대 혐오식품에 포함시켰다고 합니다. 시각적으로 좀 생소해서 그렇지, 부화시킨 오리를 몇 달 동안 길러서 잡아먹는 것이나 부화 전의 오리를 미리 잡아먹는 것이나, 사람이 오리를 먹는다는 점에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재래시장에서 발롯의 사촌 격인 '곤달걀'을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더기라든지 살아 있는 무엇인가를 바로 먹는 식품도 아닌데 혐오식품이나 역겨운 음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좀 심한 것 같습니다. 발롯뿐만 아니라 나무좀벌레 요리인 '타밀록', '개구리튀김'까지 필리핀 음식이 랭크를 섭렵하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도 '문화의 차이'로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a

아기 돼지 바비큐, 레촌 바보이. 은은한 숯불에 코코넛 오일을 발라가며 장시간 노릇하게 구워냅니다. 기름도 쫙 빠져서 껍질이 과자 마냥 바삭하니 별미입니다. ⓒ 조수영


귀엽게 생긴 아기 돼지 요리, 레촌 바보이

"돼지 한 마리 잡자."

새로운 계약이 체결된 날이면 '필리핀식 잔치'를 엽니다. 전라도 잔치엔 홍어가 '먹히는' 음식이 듯, 필리핀 잔치 음식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음식이 '레촌 바보이'입니다. '레촌'이라는 것이 숯불에다가 통 바비큐 구이를 한 것을 의미하는데, 돼지를 통구이하면 레촌 바보이, 닭을 통구이하면 레촌 마녹이라 부릅니다.

우선 토실토실하고 귀엽게 생긴 아기 돼지를 한 마리 잡아 털을 밉니다. 그리곤 배를 갈라서 안에 있는 내장들을 제거하고 손질을 한 다음, 배 안에 바나나 잎, 마늘, 생강 등 그득하게 넣습니다. 통돼지의 탈을 쓴 백숙이랄까? 바나나 잎을 넣는 것은 돼지 냄새를 없애주기 위해서랍니다. 암튼 뱃속을 꽉 채운 다음 통째로 빙글빙글 돌려가며 구우면 그 예쁘던 아기 돼지는 기름기가 쫙 빠지면서 홀쭉해집니다.

a

‘레촌’이라는 것이 숯불에다가 통 바비큐 구이를 한 것을 의미하는데, 돼지를 통구이하면 레촌 바보이, 닭을 통구이하면 레촌 마녹이라 부릅니다. ⓒ 조수영



한 시간 반 정도를 구워서 마당 한가운데 놓는데, 아니 이건 몸매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고사상 돼지는 웃는 얼굴, 아니 적어도 입이라도 닫고 있던데 얘는 어째 이빨에 꼬리, 혓바닥까지 그대로입니다. 과정은 좀 잔인한 듯 하지만 굽는 동안 기름이 빠져 안은 부드럽고 담백하고, 껍질을 상당히 바삭바삭하고 고소해서 흡사 부드러운 누룽지를 먹는 느낌이 듭니다.

살과 껍질 속을 채운 갖가지 재료까지 토막 내어 접시에 담아내면 잔치 준비 끝입니다. 달짝지근한 소스에 찍어 먹는데 레촌 바보이를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건 우리나라 '새우젓' 과 쏴~한 소주 한잔입니다.

필리핀에 오시면 값싸고 영양 만점, 필리피노 사이에는 정력음식으로 소문난 발롯과 고소한 누룽지 맛 껍질이 일품인 레촌 바보이를 꼭 드셔 보시기 바랍니다.

a

꼭 잔칫날이 아니더라도 시장에 가면 레촌바보이를 살 수 있습니다. 아기 돼지의 배 안에는 바나나 잎, 마늘, 생강 등등 그득하게 넣습니다. ⓒ 조수영


초보 시식자의 발롯 먹기 매뉴얼
(1단계) 계란을 조금만 깬다. 이 때 절대 달걀 속을 보지 말 것!
두드려서 비어있는 쪽을 깨는 것을 권한다. 반대로 깨면 오리 얼굴부터 나와 놀랄 수 있으니까.
(2단계) 소금을 뿌려 국물을 마신다. 국물을 흘리지 말 것. 국물이 엑기스다.
(3단계) 안을 들여다보지 말고 한입에 먹는다.
꼭꼭 잘 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고소한 부분은 머리이다. 너무 딱딱한 부분은 뱉어도 된다. 가끔씩 이빨 사이에 깃털이 낄 수도 있다.
(4단계) 필리핀 친구에게 미소 지으며 "마사랍(따갈로그어로 맛있다는 뜻)"이라고 말해주자. 엄청 좋아할 것이다.

제일 중요한 한 가지! 처음 드실 때는 어두운 데서 드실 것을 권합니다.

덧붙이는 글 |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 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가족의 필리핀 정착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 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가족의 필리핀 정착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발롯 #발룻 #레촌바보이 #필리핀 #일로일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