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당한 이중계약 사기, 정말 죽고싶었다

[응모-전세가 기가막혀] 친구와 함께 산 아파트 때문에 법정에 선 사연

등록 2011.10.02 16:03수정 2011.10.0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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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우리 부부는 2살, 6살인 아들 둘을 데리고 서울 영등포 신길동에서 400만 원짜리 전세를 살았다. 그렇게 3년 정도 되었을까. 어느날 주인 아주머니께서 "종철 엄마, 아빠, 어쩌면 좋아"라며 말문을 여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집을 비워 달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많이 커서 우리가 사용하는 방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면서.

주인 아주머니는 "종철이네랑은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었는데..."라며 미안해 했다. 얼마나 많이 미안해 하는지, 우리가 더 미안할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집의 전세 구하기 작전이 시작됐다. 우리 가족은 신길동은 물론 대방동 지역 복덕방까지 이 잡듯 샅샅이 뒤졌으나, "사내 아이들만 둘이라면, 방이 있어도 줄 수 없다"는 야속한 소리만 수도 없이 들었다.

그때의 아내에게 많이 미안했다. 능력 없는 남편을 만나 사랑하는 아내와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고생을 한다는 자책감에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났다. 그렇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신문을 보니 부평쪽에서 서민아파트를 분양한다고 대문짝만한 광고가 실린 것 아닌가. 25평형 아파트를 1200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에 분양한다고 했다. 그 시절엔 '삼익아파트'하면 우리나라 최고 건설회사에서 짓는 명품 아파트였다.

내 수중에 있는 돈은 달랑 400만 원뿐이었건만, 삼익 아파트를 꿈꾸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안양에 살던 고향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이 친구도 나처럼 아들만 둘인데, 역시 아이들 때문에 전세방을 얻지 못해 난감해하고 있었다.

전세 얻다 지친 친구와 나, 함께 집을 장만하다

필자가 사는 부평 동아 아파트 1단지 전경 ⓒ 윤도균


그러던 어느날, 그 친구와 함께 소주 한 잔 하다가 전세방 이야기가 나왔다. 뭔가 불현듯 떠오른 나는 친구에게 "야! 그럼 우리 이러지 말고 이참에 아예 둘이서 합동으로 아파트 하나 사서(방 3개) 두 집이 함께 살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그 친구는 내 말에 솔깃해했고, 둘 다 아내들에게 의견을 묻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이튿날, 두 집 부부가 다시 만나 의견을 타진했다. 당장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아내들은 흔쾌히 찬성했다. 그래서 나는 거듭 아이들 엄마에게 다짐을 받았다. 시작은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다 보면 어려운 일도 있을 터이니 친구 사이 우정 변치 않게 서로 양보하고 협조하며 몇 년만 함께 고생하며 살아 보자고 했다.


며칠 후 두 가족은 부평에 내려가 '삼익아파트 25평형 모델하우스'를 돌아봤다. 모델하우스만 봐도 너무 좋았다. 친구와 나는 즉석에서 삼익아파트 25평형 2층을 계약했다. 그리고 우리 두 집 식구는 1980년 10월 19일 정 붙이고 살던 신길동과 안양을 떠나 낯설고 물 선 인천 부평 부개동에 있는 '삼익아파트 A동 201호'에 입주했다.

방 3개 중 큰방은 친구네가 쓰고, 작은방 하나와 골방은 우리가 사용키로 했다. 비록 한 집에 두 가족이 비둘기처럼 모여 살지만, 우리 두 가족에겐 이 작은 서민 아파트가 희망과 꿈을 안겨 준 행복의 보금자리였다. 한창 극성스러울 때의 사내 아이 4명은 어떨 때는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떠들고, 때로는 싸운 뒤에 울고불고 했다. 하지만 두 집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고 협조하면서 나름대로 깨가 쏟아질 정도로 재밌게 살았다.

청와대와 법원, 경찰서에 이중계약 탄원서를 보냈지만...

그런데 입주 후 몇 달 안 된, 12월 중순쯤 느닷없이 우체부가 내용증명이라며 등기 우편물을 내밀었다. 누가? 무슨 내용을 보낸 걸까? 궁금해하며 봉투를 뜯어 확인하니, 세상에 친구와 내가 공동으로 산 우리집이 이중 분양됐다는 거였다. 내용증명을 보낸 당사자는 자기가 선 계약자라며 1981년 1월 1일부로 우리집을 내어달라고 했다.

너무 황당했다. 너무 놀라 하늘이 노랗고 앞이 깜깜해 한동안 정신을 놓았다. 세상에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얼토당초 않은 시련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억울해 건축주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건축주는 이미 한탕 해먹고 종적을 감춘 상태라 앞길이 막막할 뿐이다. 

그 충격이 오죽했으면 30대 후반 나이에 얼굴 근육이 마비되는 증상까지 생겼을까. 그때의 좌절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현실이 나에게 닥친 것이다. 이 엄동설한에 아이 넷을 데리고, 누가 잘못했는지도 따지지 못한 상태에서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우리집을 내주고 쫓겨나야 한다니...

솔직히 그때는 너무 기가 막혀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렇지만,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난 어린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그냥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청와대 민원실과 법무부, 검찰청, 경찰청, 경기 도경, 인천 시경, 부평경찰서에 두 집 부부는 물론 심지어 아이 4명의 손도장을 찍은 탄원서를 보냈다.

그 사이, 이중 분양을 받았다고 내용증명 보낸 측에선 또 한편으로 나를 피고로 해서 명도소송을 제기한 한 상태였다. 세상에 태어나 39년 동안 살면서 파출소 한 번 안 가본 내가 아무 죄도 없이 피고가 되어 법정에 선다고 생각하니, 어린 아이들이 눈에 어른거리며 눈물이 앞을 가려 죽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 사기를 친 건축주 A(사기전과 38범)에게 꼭 복수를 하리라는 마음도 생겼다. 나는 그 정도로 악한 사람이 아닌데, 너무나 기막힌 피해를 보고나니, 악만 남아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때 받은 충격은 내 일생일대 가장 큰 고통이요, 교훈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친구와 함께 아파트 계약할 때 계약자 명의를 내 이름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랬기에 망정이지 만에 하나 친구 이름으로 계약을 했다면, 돈 없어 변호사 댈 입장 못된 우리는 명도 소송에서 찍소리 한 번 못하고 패할 형편이었다. 왜냐면 친구는 사람은 좋지만 이렇게 큰일 앞에선 당차지 못해, 제대로 조리 있게 말할 줄도 모르는 순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파출소도 안 가 본 나, 법원 출두 명령서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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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각계에 보낸 탄원서. ⓒ 윤도균


그런데 더 기가 막힐 일은, 탄원서를 낸 지 3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데서도 연락이 안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우리 두 집, 절도 없는 거지가 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흔들릴 무렵 드디어 청와대 민원실과 법무부 그리고 각계에서 답변이 왔다. 내용을 요약하면 '민사'이기 때문에 관에서 개입할 성질이 못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법무부 답변 내용에 담당 재판부에서 참고할 것이란 내용이 추신으로 적혀 있었다. 그 후 보름여 지나 인천지방법원 103호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서를 전달받았다. 1981년 어느 여름날 나는 피고가 되어 법정에 출두하려 집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천 지방 법원이라며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내용은 재판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 재판부 판사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출두를 앞두고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리곤 기대해선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떤 기대를 하게 됐다. 그 당시 나는 가느다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서둘러 집을 나서 법원에 일찍 도착해 담당 판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담당 판사는 "이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며 내가 각계에 보낸 진정서 사본을 내보였다. 그러고선 "진심으로 이번 일에 대하여 애석하게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이번 재판 사안이 민사 사건이 되어 담당 재판부에서 멋대로 어떤 결정을 할 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선 내 진정서가 단서가 돼 검찰에서 이중 분양 건축주를 지명수배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이후 재판이 시작됐고, 나는 이중분양 사건 피고인석에 서게 됐다. 그때 나는 마치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이날 재판은 양측 신원 확인 후 끝나고 다음 재판 날짜 확인만 하고 마무리됐다. 법정을 나서자, 아니나 다를까. 부인과 친구 부부, 아이들까지 모두 법원에 와 있었다.

내가 세입자의 전세금을 안 올리는 이유

필자가 사는 부평 동아 아파트 1단지 전경 ⓒ 윤도균


그 후 재판은 몇 차례 진행되었고 담당 판사는 매번 재판 전 나를 불러 '나도 피해자이고 이중분양 사기 친 건축주가 지명수배되었으니 잡힐 때까지 재판을 연기해 달라'고 발언하라고 알려줬다. 재판부에서 시킨 대로 의견을 제시하면 재판은 매번 몇 개월씩 연기됐고, 2년이 지나던 어느 날 드디어 이중분양 사기범 건축주가 제주공항에서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나를 상대로 소송을 낸 원고측은 패소했다. 일이 그렇게 되니, 구속된 건축주가 변호사를 통해 우리집을 등기 이전해줬다. 그런데 같은 아파트에서 나처럼 이중분양받았던 사람들이 지루한 소송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 둘씩 집을 헐값에 팔고 이사를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집을 하나 더 사 친구네를 아래층으로 이사 시켰다.

그 후 나는 10여 년 동안 그 집에서 살았고, 이후 그 집을 팔고 고층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 시절 2살이었던 작은아들이 이제 장가들 나이가 되었다. 아들이 장가가면 주려고 사놓은 아파트에는 전세를 놓았는데, 6년째 전세금 7000만 원을 그대로 받고 있다. 참고로 우리 동네는 22평 아파트 전세금이 1억 5000만 원 하다 조금 떨어져 요즘은 1억 3000만 원 선이다.

얼마 전 세입자인 아기 엄마가 "계약기간이 만료됐는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라고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 옛날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 곳곳으로 전셋집을 얻으러 다니며 겪었던 서러운 일이 기억나, 전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했다. 며칠 전 재계약을 했는데, 세입자인 아기 엄마는 연실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이 뿌듯했다.
#전세금 #전세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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