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선생 3남 심재호의 '그 날이 오면'

아버지가 지닌 '삶의 DNA'까지 복제한 아들이 바라는 마지막 꿈

등록 2011.10.11 13:38수정 2011.10.1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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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필경사> 앞 아버지 심훈의 묘지 앞에 선 3남 심재호 ⓒ 심규상


심재호(76). 그를 보면 있으면 심훈 선생(1901∼1936)이 보인다. 외모뿐만이 아니다. 삶의 궤적이 영락없는 또 다른 심훈이다.

아버지인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숨졌다. 아버지의 생을 이어가라는 숙명을 타고 난 것일까. 아버지 심훈처럼 그 또한 셋째아들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소설 상록수>가 쓰인 당진 '필경사'(筆耕舍,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다. 얼굴 한 번 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가 그에게 베풀어 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전자가 뼛속 깊이 박혀 있었던 모양이다.


심훈은 23세 때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일 년 만에 박헌영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사건'으로 해직당했다. 심재호씨 또한 <동아일보>에 재직한다. 아버지처럼 해직된 것은 아니지만 그 또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자의반 타의반 신문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버지 심훈이 다시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활동했던 것처럼, 그 또한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 미주동포신문 <일간뉴욕>을 창간하는 등 언론인으로 복무했다.

해직당한 언론인 심훈-박정희 언론통제에 사표 던진 언론인 심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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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니지아주 자택에 마련된 <심훈기념관>에서 아버지 심훈의 자료를 설명하고 있는 심재호씨(지난 2010년 4월) ⓒ 심규상

심훈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독립운동가'였다. 심훈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다니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당시 판결문에는 "파고다공원에서 수천인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경성부 내의 각 곳을 광분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고 돼 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상하이 난징 등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당시 시대적 사명은 독립이고 해방이었다. 심훈의 <그 날이 오면>에는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절절한 심경이 담겨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중략>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하고 있다. 어두운 식민지 치하에서 자유를 속박당하는 삶이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부르짖고 있다.

<그 날이 오면>이 해방을 향한 염원이라면 소설 <상록수>는 해방을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일제에 수탈당하는 농촌과 농민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제를 극복할 자주교육으로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심훈- '통일운동가' 심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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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 ⓒ 심규상


아버지 세대의 소원이 '해방'이었다면 그의 아들세대의 시대적 요청은 남과 북의 '통일'이었다.

아들 심재호는 '통일운동가'였다. 1988년 '뉴욕이산가족찾기후원회'를 조직해 1995년까지 북한을 19차례 오갔다. 사재를 털어 1000여 명이 넘는 남북해외이산가족을 찾아주었다. 조국평화협회를 발족하고 뉴욕에서 남북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가 남과 북을 오가며 내린 결론이 있다. '우리 민족이 아직 분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와 사상, 이념이 가로막고 있을 뿐 남과 북의 사람들의 정신은 실핏줄까지 이어져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가 지금 살아 계신다면 남북통일과 민족화합 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버지 심훈이 살아계셨다면 '그 날'은 남과 북이 통일 되는 날이 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심훈은 노량진(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지만 삶은 충남 당진에서 정리했다.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온 그는 창작활동에 전념한다. 상록수를 비롯 많은 작품이 필경사에서 태어났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그는 <상록수> 상금을 상록학원을 설립했다.

집필 활동에 전념한 심훈-아버지 기록 복원에 몰두한 '심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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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지틴 상록수 사람들'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이 된 '공동경작회' 회원들 ⓒ 심규상


아들 심재호도 말년의 삶을 집필활동에 쏟았다. 하지만 그가 가장 몰두해온 작업은 아버지의 육필 원고 등 유품을 찾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영화 <먼동이 틀 때>의 극본과 제작 시나리오 원본, 시 <그날이 오면>의 일제 총독부 검열본 등을 비롯 보석 같은 4500매의 육필원고는 모두 심재호씨의 손에 의해 복원됐다.

지난해 봄 '심훈선생 유품인수 추진위원회' 위원들과 방문한 미국 버지니아 주 자택은 말 그대로 '심훈기념관'이고 '심훈문학관'이였다. 아버지의 흔적은 좁은 방안에서 끝도 없이 나왔고, 유품에 얽힌 사연 또한 끝이 없었다.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상록수 문학관'을 재정비하는 일이다. '심훈기념관'을 조성해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영화감독, 문학가로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대정신이 면면히 이어가도록 하는 일이다.

그가 최근 한 달 동안 미국에서 당진으로 건너와 아버지 친필원고를 재정리하고 이를 담은 4500매 사진 전체를 당진군민들에게 남겨두고 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심훈기념관 조성계획을 비롯해 유품전시 및 세부 활용계획 등 제반 준비 작업이 마무리되면 유품을 당진군으로 '이전'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몇 해 전에는 아버지의 유해를 직접 필경사(筆耕舍)에 안장했다.

지난 9일 당진상록문화제 현장에서 만난 그는 "부친의 친필 원고 등 유품을 지난 50년간 수집해왔다"며 "이 유품을 지키고 키워나가는데 당진군민들이 주인공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아버지의 유품이 우리 모두의 자산이자 보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한 것이다.

아들 심재호가 꿈꾸는 '그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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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선생의 삼남인 심재호씨가 부친인 심훈 선생 추모제에 참석해 헌화분향하고 있다. ⓒ 심규상


<창 밖을 내다보던 영신은 다시금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예배당을 두른 야트막한 담에는 쫓겨나간 아이들이 머리만 내밀고 족 매달려서, 담 안을 넘어다보고 있지 않는가! 고목이 된 뽕나무 가지에 닥지닥지 열린 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열매다. 그중에도 키가 작은 계집애들은 나무에도 기어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홀짝거리고 울기만 한다. 영신은 창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청년들과 함께 칠판을 떼어, 담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창 앞턱에다 버티어 놓고, 아래와 같이 커다랗게 썼다.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나무에 오르고 담에 매달린 아이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목구멍이 찢어져라고, 그 독본의 구절을 바라보고 읽는다. 바락바락 지르는 그 소리는 글을 외는 것이 아니라, 어찌 들으면 누구에게 발악하는 것 같다.>

소설 <상록수>를 읽다 보면 누구나 이 대목에서 주인공 영신처럼 코끝이 시큰해진다. 또 한 명의 심훈인 심재호씨는 '상록수 문학관'에, '심훈 기념관' 창틀에 '닥지닥지 사람의 열매'가 매달려 있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심훈 #심재호 #심훈문학관 #상록수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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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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