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기... '긴급'·'대량' 요청하면 일단 주의

[번역시장의 문제와 대안②] 번역가 울리는 번역 사기

등록 2011.11.30 13:39수정 2011.12.05 09:39
0
원고료로 응원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번역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번역가들의 일터인 번역 시장은 여전히 열악합니다. '번역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에 실력이 부족한 지원자가 많아지자, 번역 회사들은 고용을 줄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비 번역가와 번역가들은 치열한 일감 경쟁에서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기자는 번역가들이 지적한 번역 시장의 문제들 중,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여겨져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한 사안들을 집중 취재했습니다. <기자 말>

a

온라인 카페 <번사모>에서 모집한 A피해자 오프라인 모임. 피해에 대한 법적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 이지수


"법으로 안 된다면… 사설 탐정까지도 생각해봤습니다. 돈을 못 받더라도, 괘씸해서 그 사람을 꼭 찾아내고 싶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의 한 카페. 온라인 카페 <번사모(번역알바 사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난 피해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번역회사에서 맡긴 일을 해주고 돈을 받지 못한 번역가들. 회사명은 서로 다르지만 운영자는 모두 같다. 피해자들은 잠적한 운영자 A씨를 처벌하고 돈을 돌려받기 위한 법적 대응 방법을 논의했다.

번역 회사는 번역이 필요한 기관과 번역가를 중간에서 연결해준다. 그런데 번역가가 받아야 할 대금을 가로챈 뒤 사라지거나 대금 지급을 계속 미루는 번역 회사 운영자들이 있다. 이 탓에 피해자가 끊임없이 늘고 있다. <번사모> 회원 수는 약 80명. 카페가 설립되기 전(2011년도 이전) 피해자와 비회원을 포함하면 실제 피해자 수는 더 많다.

a

온라인 카페 <번사모> 가입인사 게시판. 피해자들이 카페에 가입해 글을 올렸다. ⓒ 이지수


이름과 회사명 바꿔가며 10년째 사기

A씨는 번역회사를 운영하며 번역료를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구인 광고를 내고 번역가를 모집했다. 지난 6월 A씨에게 일을 해주고 150여만 원을 받지 못한 ㄱ아무개(30)씨는 "구인 광고를 보고 연락했는데 메일로 작업을 의뢰받았다. 일을 해주고 아직까지 한 푼도 못 받았다. 수백 번 전화하고 수십 통 메일을 보냈는데 8월 말부터 모든 연락이 단절됐다"고 했다.

온라인 카페 <번역사랑> 게시판에 첫 피해 사례가 올라온 시기는 2003년 초. 게시글에 의하면 문제의 가짜 번역회사는 2002년부터 운영 중이었다. 피해자 이아무개(42)씨는 "전화할 때 꼭 (돈을) 줄 것처럼 말해서 사기가 아닌 줄 알았다"고 했다. ㄱ씨는 "일을 주기 전에 지급기한을 강조하고 지급일이 미뤄지면 메일로 사과한다. 계속 지급일이 미뤄져 항의하면 연락을 차단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A씨는 광고를 낼 때마다 이름과 회사명을 계속 바꿨다. 그동안 A씨가 만든 가짜 번역회사는 확인된 곳만 13곳, 그동안 사용한 가짜 이름은 7개다. A씨가 만든 ㄱ회사에서 일감을 받은 피해자 최아무개(29)씨는 "온라인 카페에 적힌 피해 사례들을 보고 같은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역시나 A씨가 만든 ㄴ회사에서 일을 받아 한 남아무개(32)씨는 "온라인 카페에 적힌 A씨 전화번호와 ㄴ회사 전화번호가 같았다"고 했다.

문제 회사는 버젓이 운영 중... 피해자 늘까 우려

다른 몇몇 운영자들도 A씨와 유사하게 번역 사기를 벌이고 있다. B씨에게서 처음 번역일을 받은 조아무개(25)씨는 "언제까지 일해주면 돈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일을 해줬는데 지급을 미루더니 잠적해버렸다"고 했다. C씨에게 사기 당한 곽아무개(20)씨는 "광고를 보고 일을 해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광고는 다른 번역회사의 명의를 도용한 것이었다. C씨는 10년째 똑같은 방법으로 부당이득을 챙긴다"고 말했다.

연락은 되지만 번역료 지급을 상습적으로 미루며 돈을 주지 않는 운영자도 있다. 지난 6월 ㄷ회사 운영자 D씨에게 200만 원의 일을 해준 손아무개(32)씨는 현재 ㄷ회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손씨는 지급받지 못한 나머지 50만 원을 받기 위해 지난 8월 소송을 제기했다.

"매일 회사에 전화를 해요. 그때마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면서 지급을 미루더군요."

문제는 이들이 아직까지도 회사를 운영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법망을 피해다니며 끊임없이 구인 광고를 낸다.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번역가 조아무개(46)씨는 "최근 A씨가 다른 회사명으로 광고를 낸다"고 경고했다. 카페 <번역사랑>에도 B씨와 D씨가 회사명을 바꿔 광고를 낸다는 글이 지난 10월부터 올라왔다. 손씨는 "지금도 ㄷ회사는 버젓이 운영 중"이라며 "또다른 피해자가 생겨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터넷에서 허위 정보 확인하기 어려워

a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운영자 A씨의 번역 회사 구인 광고. 대표자 이름은 다른 사람으로 돼있다. ⓒ 이지수


운영자들은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의 허점을 악용해왔다. 운영자는 사업자등록번호가 없어도 광고를 낼 수 있다. 번역회사 정보가 허위이다 보니 피해자는 법적으로 회사에 대응하기 힘든 상황이다. A씨 이름을 몰랐던 조씨는 온라인 광고에 명시된 운영자를 국세청에 명의위장 사업자로 신고했다. 하지만 운영자 이름이 A씨의 본명이 아니어서 거절당했다. 그는 "번역회사가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허위 정보를 올리지 못하도록 사이트 운영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해 생겨도 보상 받을 방법 없어

하지만 법적 조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B씨에게 270만 원을 받지 못한 이씨는 지난 7월 B씨를 상대로 지급명령과 형사 소송을 제기해 한 달 뒤 둘 다 승소했다. 하지만 이씨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B씨의 통장이 세 개였음에도 잔고는 모두 합쳐 1만원 뿐이었다. 재산을 압류하지 못한 이씨는 "재산을 타인 명의로 빼돌리면 승소해도 피해를 보상받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경찰서에 형사 고소한 A씨는 현재 수배 대상이다. 그러나 A씨 사건은 A씨의 행방을 찾을 수 없어 9월 초에 내사중지 됐다. C씨 사건도 지난 8월 내사중지 됐다. C씨 사건을 담당한 경찰 수사 관계자는 회사 주소로 명시된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C씨를 찾지 못했다. 그는 "2개월 동안 수색했지만 단서가 발견돼지 않았다. C씨는 행방불명인데다 이름을 도용했을 가능성도 있어 찾기가 매우 힘들다"며 "피해 사례와 단서가 모이면 재수사에 착수하겠다"고 다짐했다.

대금 지급을 미루는 D씨 피해자 손씨는 "D씨는 도망가지도 않았고 피해자들에게 연락도 자주 한다. 상습적으로 돈을 안 주지만 사기 혐의를 입증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는 "번역가와 번역 회사의 관계는 근로 관계가 아닌 계약 관계다. 이런 경우 임금체불로 노동청에 신고해 형사재판을 진행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의 반응은... "추가 피해 막자"

피해자들은 경찰의 적극적인 수사를 호소한다. 피해자는 계속 늘지만, 개인별 피해 규모가 적어 경찰과 법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C씨 피해자 곽씨는 지난 1월 카페 <번사모>를 만들었다. 그는 C씨에게 피해를 입은 7~8명의 회원을 모았다. 첫 공동 대응은 쉽지 않았다. 곽씨는 "10만 원에서 100만 원 단위의 소액 피해가 대부분이었다"며 "피해자들이 처음에 억울해서 돈을 받으려다가 법적 절차가 복잡하고 오래 걸려 포기해버렸다"고 이야기했다.

최근에는 피해자들 사이에서 공동 대응에 적극 나서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운영자를 처벌하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다. 회원들은 'A씨정보공유게시판' 등 가해자별로 게시판을 만들어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A씨 피해자 모임을 주도한 최씨는 "피해 사례가 모이면 경찰의 적극적인 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고 말했다.

a

온라인 카페 <번사모> 홈페이지. 피해자들이 공동 대응에 나서고 있다. ⓒ 이지수


'긴급', '대량' 번역 요청하는 회사는 주의

더 이상의 번역 피해를 막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번역회사에서 3년 동안 근무한 박아무개(30)씨는 "대부분의 번역회사는 인맥 위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인맥이나 정보가 없어 일을 구하기가 어려운데, 사기꾼은 이들을 노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씨는 주의해야 할 번역회사에 대해 "지나치게 급한 번역이나 어려운 번역, 대량 번역 등 노하우가 필요한 작업을 맡기는 경우에는 조심해야 한다. 검증이 안 된 사람에게는 그런 일을 맡기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이에 덧붙여 "번역가 및 내부 관리자를 상시 모집하는 회사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번역가 조씨는 카페 <번역사랑>에 '번역 사기 피해 대응 방법'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문제 회사와 정상적인 회사의 구인 광고를 예시로 들어 "회사 정보가 정확한지 살피고, 온라인 카페에서 피해 사례가 없는지 찾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회사와 처음 거래할 때는 정상적인 회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증명서를 요구하고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AD

AD

인기기사

  1. 1 이 사진들을 보십시오... 문재인 정부 실망입니다
  2. 2 트럼프 뛰어넘는 바이든의 탐욕
  3. 3 "두려워하는 게 보였다"... 이탄희는 어떻게 설득했나
  4. 4 수상한 태양광 사업... 작은 농촌마을에서 벌어진 일
  5. 5 '최대집 의협'이 툭하면 코로나 볼모 잡는 세가지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