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부터 70년을 이고 지고 다녔지요"

심훈 셋째 아들, 심재호가 말하다② - 아버지 육필원고를 모으게 된 과정

등록 2011.11.03 17:54수정 2011.11.03 18:48
0
원고료로 응원
심훈의 셋째 아들 심재호 씨가 평생토록 모으고 간직한 심훈의 유품 4천5백여 점을 미국에서 당진으로 이전해 오기로 약속했다. 심훈의 육필원고에는 일본인들이 시뻘건 줄로 검열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토록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방대하고 중요한 유적인가. 역사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심재호 씨가 한 달여간 당진에 머물며 심훈 육필원고를 총정리한 뒤, 지난 15일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평생토록 아버지 심훈의 발자취를 쫓았다. 심훈의 유품을 모으고 관리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그 자신도 아버지 심훈을 빼닮은 삶을 살아왔다. 군사정권시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이산가족찾기운동으로 북한을 수시로 오갔다. 심재호 씨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가 기억하는 필경사와 공동경작회, 아버지 심훈의 육필원고를 모으게 된 과정 등에 대해 듣고 기록한 것을 연재 보도한다.  - 기자 주
  

a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의 3남 심재호씨(76) ⓒ 심규상


심재호씨는 줄곧 필경사 뒤편에 자리한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상록수>는 필경사에서 써졌지만 아버지 심훈은 <영원의 미소>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할아버지가 살던 '큰집'에서 썼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전쟁을 겪으면서 서울과 당진을 오가며 살았던 심재호 씨는 어린 시절 큰집을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의 육필원고를 비롯한 유품을 처음 발견한 것도 큰집이었다.

"큰집에 다락방이 있었어. 어느 날인가 다락을 열어보니 거기에 온갖 재밌는 게 수두룩 한 거야. 자세히 보니 아버지의 유품이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다락에 넣어두고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 먼지가 수북했지... <먼동이 틀 때> 촬영 때 현장에서 사용하던 작고 빨간 마이크도 있었고, 필경사 문패도 있었지. 필름도 여러 개 있었는데 내가 어릴 적에 꺼내다가 머리에 두르고 놀았어. 아,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그렇게 귀중한 거였더라고..."

심재호 씨가 육필원고를 유심히 보게 된 것은 16살 이후였다. 중학교를 가기 위해 큰집을 떠나야 하던 날, 다락에 들어 있는 아버지의 유품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집도 없고, 부모도 없다는 걸 깨달을 때쯤이었을 거야. 그때까지는 남이 볼 때는 중요하지도 않았으니 그냥 방치되어 있었거든. 쥐가 뜯어 먹고, 벌레도 먹고. 그래서 그때부터 싸 짊어지고 다녔지."

고등학교 시절 남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살던 때에도 심 씨는 아버지의 유품은 꼭 들고 다녔다. 22살에 이른 결혼을 한 뒤, 셋방살이를 할 때는 잠시 지인에게 맡겨 놨다가 다시 집을 장만하면 찾아오기도 여러 차례 했단다.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 오면서도 아버지의 낡은 원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수십억원을 주겠다는 이가 있을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이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필요치 않았다.


"이희승씨가 있을 때였는데 동아일보에서 날 더러 와서 일을 하라고 했었어. 그때는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학관 선생을 할 때 였거든. 근데 마침 탐구당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30주기를 맞아서 심훈 전집을 만들 테니 도와달라고. 그래서 동아일보를 찾아가서 나중에 간다고 했지. 그때 처음으로 유품을 모두 풀어놓고 자세히 보게 됐어." 

물론 1년 뒤 심훈 전집을 출간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당시에도 유명 언론사였던 동아일보의 러브콜을 거절하고 심 씨는 아버지 유품 정리에 몰두했다.

"유고를 풀어놓고 보니 빠진 것도 있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것과 다른 것도 여럿 있다는 걸 알았지. 빠진 것은 잡지를 갖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 찾아가 베껴와 메웠어. 아버지의 유고는 초고예요. 때문에 자신이 쓰고 그 위에 고쳐 쓴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죠. 때문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된 것과는 내용이 다른 것도 많아요. 신문사에는 고친 초고를 다시 직접 베낀 재고를 보냈으니까."

이후 <신동아>에서 최고편집자까지 지낸 심재호 씨는 군부독재 시절 정부의 언론탄압에 회의를 느끼고 미국으로 떠났다. '언론인이 써야 할 기사를 쓰지 못하면 뭐 하러 남아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심씨가 미국으로 들어간 다음해에 동아일보 광고사태와 해직사태가 줄지어 터졌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모두 심 씨의 동료들이다.

미국에 가서도 아버지의 유품은 늘 지니고 다녔다. 막노동부터 샌드위치 장사, <일간뉴욕> 발행인을 맡을 때까지. 그리고 이제 심재호 씨는 평생토록 보관해 온 아버지 심훈의 육필원고 4천5백여 점을 모두 당진에 내어 놓겠단다. "상록수의 고향, 당진이 심훈의 유품이 돌아가야 할 자리이고 유품은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라 당진군민, 나아가 우리 모두가 주인이며 잘 보존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이유다.

<글 싣는 순서>
1. 심재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필경사- "필경사는 꽃동산이었죠"
2. 아버지 심훈의 육필원고 모으게 된 과정- "중학교 때부터 70년을 이고 지고 다녔지요"
3. 심훈의 첫 영인본 발행 과정- "자꾸 도둑맞으니까 마음이 급해졌어요"
4. 심훈 선생의 주변인물과 <박군의 얼굴>에 얽힌 이야기
5. 아버지 심훈 빼닮은 심재호의 삶 1
6. 아버지 심훈 빼닮은 심재호의 삶 2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당진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당진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심훈 #심재호 #심훈 삼남 #필경사 #상록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