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도우미의 염산테러, 결국 이렇게 됐다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⑬] 염산이 설거지의 필수품 된 까닭

등록 2011.11.29 21:00수정 2011.11.30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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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살면서 정말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양치질을 해도 입안이 텁텁하다는 겁니다. '필리핀 치약이 별로여서 그런가' 해서 한국산 치약으로 바꿔도 봤지만, 상쾌함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치과치료를 받았지만, 언제부터인가 가족들도 치아에 힘이 없고, 잇몸이 붓고 들뜬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뿐만이 아닙니다. 다이빙 가게를 운영하는 김 사장도 흔들리는 치아 때문에 고생하고 있고, 노래방을 운영하는 최 사장은 앞니가 쏙 빠져버렸습니다. 현지 빈민촌에서 5년 넘게 지하수를 식수로 살아온 어느 목사님은 하나 둘 흔들리던 치아가 거의 빠져 50대인데도, 나이가 20년은 더 들어 보입니다.

필리핀에서 이가 빠지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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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선 '앞니빠진 개우지'를 보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 조수영


우리 가족 치주질환의 원인은 필리핀 물 때문이었습니다. '물 좋은 나라'에 살던 우리는 이주 초기 정신없이 생활하느라 미처 필리핀 '물'까지는 걱정하지 못했던 겁니다. 보통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필리핀 수돗물에는 석회질이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물을 장기 복용(?)할 경우 노화가 빠르게 일어나고, 치아의 상태도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교민뿐만 아니라 빈민촌 사람들의 치아는 하나같이 엉망진창입니다. 거의 모든 어른들이 한두 개씩, 심하면 젊은 나이에도 앞니가 몽땅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치아가 그러니 뼈는 오죽하며, 신장은 온통 자갈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지하수를 마시며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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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는 정수한 물(Purified Water)을 파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배달도 해줍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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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을 넣으면 정수된 물이 나오는 기계입니다. 왼쪽이 1페소, 오른쪽 파란통은 5페소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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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된 물은 배달도 됩니다. ⓒ 조수영


그래서 필리핀 어디를 가든 정수된 물을 파는 가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현지인도 가게에서 파는 정수된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데, '무식해서 용감한' 이민자들은 한국에서처럼 지하수에 보리차나 옥수수차 등을 넣어 끓여서 마시고 있었던 겁니다.

필리핀에서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마치 돌멩이를 미세한 가루로 빻아 물에 타 먹는 셈입니다. 식수는 물론 밥을 할 때나 음식을 만들 때 마지막 헹굼은 반드시 정수된 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양치질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필리핀 물의 석회성분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물을 한번 끓여보면 됩니다. 처음에는 냄비가 뜨거워지면서 냄비의 코팅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면 안쪽 가장자리에 하얀 가루가 일어납니다. 이 하얀 가루가 지하수에 들어 있는 석회 성분입니다. 물이 마르고 나면 욕실 세면대나 주방용품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에 하얀 가루만 남습니다.

주방에서 일어난 염산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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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기구나 욕실바닥에는 어느새 허연 석회성분이 끼어 있습니다. 하지만 염산 하나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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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빈민가나 시골에서는 여전히 우물을 사용합니다. 지하수를 그대로 섭취할 경우 석회성분 때문에 풍치가 생기고 담석이 생깁니다. ⓒ 조수영


가사도우미 아이가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 중간중간에 정체모를 액체를 듬뿍 붓고 있습니다.

"그게 뭐야?"
"염산인데요."
"헉! 니가 날 죽이려고!"

다가가서 병에 쓰인 'HCl'을 확인하고는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실험실에서나 볼 법한, 아니 뉴스에나 나올 정도로 무서운 진짜 '염산'을, 그것도 음식을 담는 그릇에 장갑도 끼지 않는 맨손으로 닦고 있었습니다. 29%로 희석했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래도 염산은 염산입니다. 염산에 놀란 나보다 가사도우미 아이가 더 황당해합니다. 마트에서 코너 한쪽을 가득 채운 염산을 보고서야 가사도우미 아이의 황당한 표정이 이해가 됐습니다. 필리핀에서 설거지와 청소를 할 때, 염산은 말 그대로 '필수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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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슈퍼의 한 코너를 채우고 있는 염산. 필리핀에서 염산은 청소 필수품입니다. ⓒ 조수영


예전에 한국에서도 염산을 사용해 화장실 청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요즘은 수질과 토양 오염 때문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걱정은 아예 하지 않는 필리핀에서는 설거지할 때마다 염산을 마구 들이붓습니다.

주방용품이나 변기, 욕실바닥에 낀 하얀 석회가루를 염산이 묻은 수세미로 닦으니 감쪽같이 말끔해집니다. 하지만 변기에 혹시 염산이 남아 있어 엉덩이에 묻지 않을까, 그릇에 염산이 남아 '식도세척'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가사도우미 아이를 설득해 봅니다.

"염산을 쓰지 말고 수세미로 빡빡 닦아봐."

하지만 녀석은 내가 지키고 서 있지 않는 날이면 또 염산병을 꺼내듭니다. 석회를 깎아내야 하는 힘든 물리적 방법보다 석회를 한방에 녹이는 화학적 방법이 훨씬 편하니까요.

염산보다 무서운 락스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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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퍼아이가 사용하는 염산입니다. 29% 희석된 것이라지만 무섭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섬유유연제입니다. ⓒ 조수영


가사도우미 아이가 화장실을 청소합니다. 청소를 다해갈 즈음 염산이 모자라서 마트에 다녀오겠다고 합니다. 마침 락스가 보였습니다. 청소는 물론 소독까지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락스가 염산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동안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염산을 사러 가지 말고 대신 락스를 쓰라고 줬습니다.

"한국에선 욕실 청소할 때 락스를 쓰거든."

맨손으로 염산을 만지는 용감한 이 아이. 역시나 락스도 희석하지 않고 욕실 바닥에 후루룩 들이부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을 솔로 문지르더니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흐느적거립니다. 순간 가사도우미 아이는….

"맘~!"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버렸습니다. 놀라서 뛰어 들어간 화장실에는 메케한 냄새가 코와 눈을 찔렀습니다. 얼른 가사도우미 아이를 화장실에서 끌어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곧바로 의식을 찾았지만, 온종일 축 쳐져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화장실의 메케한 냄새는 일주일 넘게 빠지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사고의 원인은 락스의 주성분인 '차아염소산나트륨'이 염산과 같은 산성과 반응하게 되면 순식간에 '염소 기체'를 발생시키기 때문이었습니다. 염소 기체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독가스로 사용한 전력이 있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입니다.

필리핀 청소의 필수품인 '염산'과 한국 청소의 필수품인 '락스'가 만나 독가스를 만든 겁니다. 꽃다운 스무 살 가사도우미 아이는 독극물 때문에 저세상으로 갈 뻔했습니다. 그날 이후 미안함과 고마움에 염산을 쓰는 것쯤은 봐주기로 했습니다.

이제 염산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매일같이 가사도우미 아이의 염산 테러가 일어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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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에메랄드 빛 바다색은 수심이 낮고 산호초에서 나온 석회질 성분이 물에 녹아 초록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 조수영

#필리핀 #석회수 #염산 #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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